먹을거리가 간절했던 그 시절
요즘은 먹을거리가 넘쳐납니다. 서울 시내에서 전 세계 유명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고, 너나 할 것 없이 미식가를 자처합니다. TV에서는 경쟁하듯 ‘먹방’(먹는 방송)과 ‘쿡방’(요리 방송)을 내보내고, SNS에도 음식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물론 여전히 먹을 게 없어 굶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다들 가난했던 과거에는 배불리 먹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6·25전쟁 때는 모두가 생활이 궁핍했습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요. 지금도 서울역 앞과 몇몇 지역에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는 이곳에서 밥을 굶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나눠줬습니다.
<사진> 속 어머니들은 생활고에 지친 표정으로 가족들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습니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어린 아이들을 집에 두고 왔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고 안타까웠을까요.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간 사람들을 위해 사회부구호본부에서 무료급식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부산역 앞 등 3곳에 급식소를 설치하고 매일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굶주리고 병약한 노인과 어린이에게 UN에서 보내준 분유와 백미를 혼합한 우유죽을 배급했습니다.서울에도 미국 가톨릭구제회 한국지부가 운영하는 무료급식소가 8곳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루 5,620명에게 쌀과 옥수수를 섞은 우유죽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가톨릭구제회가 곡식과 솥 등의 식기, 천막 비용을 모두 댔고, 결식아동과 서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줬습니다. 용두동과 청량리, 미아리, 영등포, 대방동, 이문동, 서울문리사법대 등에 급식소가 있었습니다.
서울시가 무료급식소와 의료 시설에 급식하기 위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유니세프 분유 12만 파운드가 비로 인해 모두 변질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5개월 동안 나눠줄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정부의 현장 조사 결과 이 분유는 5년 전에 받아놓은 것으로, 즉시 배급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다고 하네요. 급식소 소장이 극빈자 무료급식용 옥수수 가루 1,000여 포대를 팔아 착복한 일도 있었습니다. 다들 먹고살기 힘들 때라 별일이 다 있었네요.
<사진> 1950년대 무료급식소 앞에 줄을 선 사람들.
보릿고개를 넘기며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은 후에도 배를 곯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바로 ‘보릿고개’라고 하는 춘궁기 때입니다. 예전에는 쌀을 추수한 뒤 보리를 심어 2모작을 했는데 보리가 제대로 맺힐 때까지의공백 시기를 춘궁기라고 합니다. 전년에 추수한 쌀이 바닥나는 5∼6월이 바로 춘궁기입니다. 쌀과 보리를 대체하는 구황작물로 버텼지만 그마저도 어려우면 나무껍질이나 진흙까지 먹었다고합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나무껍질과 흙을 많이 먹어 심한 변비를 겪었던 데서 나왔습니다. 나무껍질을 하도 벗겨 먹어 나무가 말라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춘궁기 영세민 구호를 위한 급식센터도 있었습니다. 각 지역에서는 구호양곡을 미리 확보해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하루 세 끼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당시 신문기사에 ‘보릿고개 미담’이 실려 있습니다. “나주군 왕곡면 화정리에 사는 씨는 보릿고개를 당한 극빈자들에게 전해달라고 벼 10가마를 면에 기탁했다. 씨는 머슴살이를 해가며 근근이 살림을 꾸리는 처지라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나주군수는 그의 갸륵한 미행을 표창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음식이 넘쳐나고, 뭐든 먹고 싶은 대로 먹을수 있는 현실이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한편으론 낭비하지 말고 절약해야겠다는 각오도 하게 됩니다.
- 사진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 글 김구철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