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동쪽 끝. 서울의 모든 곳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서울 중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고덕동. 나는 그곳에서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를 보냈다. 20대에 접어들면서 부모님은 경기도 광주로 이사를 가고 나는 흑석동으로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동네를 떠났지만, 성장기의 추억을 오롯이 간직한 동네라 그런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고덕동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많았다. 상일동역에서 고덕초등학교 쪽으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 양옆으로는 큰 나무들이 즐비했고 옆에 있는 작은 산에도 나무들이 빼곡했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에 조성된 작은 풀밭에도 수많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상일동역에서 밖으로 나와 걷다 보면 항상 향긋한 풀냄새와 꽃냄새가 났다. 특히 여름에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어대는 매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의 서울에서는 경험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은 나름 서울의 중심이라 할 동작구에서 살다 보니 그 동네가 얼마나 서울답지 않은 곳이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달동네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발전이 더딘, 그래서 더 아름다운 동네였다. 아마도 서울의 끝자락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멈춘 동네
2010년도인가. 대학교 졸업영화 시나리오가 너무 안 풀려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고덕동에 간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고덕동만은 변하지 않은 채였다. 그곳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또는 혼자서 무수히도 걸었던 거리들, 신나게 뛰어놀던 놀이터. 수많은 추억이 담긴 공간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다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북적이며 시끄러웠던 놀이터가 이제는 놀이기구에 녹이 슬어서인지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외로운 아이처럼 방치되어 있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그런 풍경이 낯설었지만 혼자 앉아 조용히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가만히 앉아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낭만에 빠졌다. 역시나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고덕동에서만 6번 이사를 다녔는데 5번은 주택에서, 마지막에는 주공2단지 아파트에서 살았다. 6번이나 이사를 다녔으니 고덕동 구석구석이 나에게는 추억의 놀이터라고 할 수 있다. 주택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하기로는 3번째로 이사를 간 곳이다. 그리고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집이었다. 그곳에서 정말 놀랄 만한 광경을 목격했다. 내가 그곳에 살았던 때는 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2010년에도 이미 15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런데 그 당시 아버지가 붙였던 창문의 시트지가 아직도 버젓이 붙어 있는 것 아닌가! 타임머신을 타고 15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당장이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물론 그럴 만한 용기가 없어서 돌아섰지만.
그 외에도 비록 담장은 없어지고 마당은 주차장이 되었지만 마당 한쪽에 자리했던 대추나무는 열매를 간직한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동안 멀뚱히 그곳에 서서 그 당시의 추억들을 되새겼던 기억이 난다.
공간은 추억을 남기고
마음의 안식을 얻은 후,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꼭 이곳에서 영화를 한 편 찍자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역시나 나의 게으름 덕분에 결국 그곳에 대한 영화는 시나리오 구상단계에서 진척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후 고덕 2단지 역시 재개발의 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다행히 주택가는 재개발 대상에서 제외되어 남아 있지만, 주공아파트는 없어지고 말았다. 추억이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흐릿해진다. 눈에서도 기억 속에서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마땅히 시골이라 할 만한 곳이 없던 나에게 고덕동은 시골이자 마음의 안식을 주는 고향 같은 동네였다. 하지만 이제는 반쪽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건 좀 서글프다.
어릴 적 방학 때면 친구들과 뒷산에 가서 메뚜기부터 사마귀. 매미 등 수많은 곤충들을 채집했고 매일매일 동네 골목에서 팽이치기와 딱지치기 등을 하며 해질녘까지 지칠 줄 모르고 놀았다. 동네 독서실에서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한 건지 잠을 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딴에 친구와 함께 새벽공기를 마시며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던 낭만적인 시간들도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거나 찍을 때 공간이 주는 정서나 분위기를 중요시하는 편이다. 그 인물의 성격이나 분위기, 그리고 감정을 설명하는 데 공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덕동은 추억을 담은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공간 자체가 주는 독보적인 매력이 컸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 더 눈에 담아두지 못한 것,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그 매력을 소개하고 보여주고 싶은데 더 이상 그러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크게 다가온다.
나무보다 높고 거대한 건물에 둘러싸이고, 향기로운 풀냄새는커녕 매캐한 매연을 맡으면서 살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딴에는 나이가 들수록 삶이 고단하다는 것을 느껴서인지 어느 때보다 그 공간이, 그리고 그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간절해진다. 지금은 재개발을 하느라 공사장이 되어버린 고덕동. 공사가 끝나고 나무가 빼곡했던 자리에는 높고 거대한 아파트가, 녹이 슨 낡은 놀이터에는 우레탄 바닥과 플라스틱 놀이기구들이 채워지겠지만, 나는 다시 고덕동을 찾아가 혹시라도 남아 있을 흔적을 찾아보고 싶다.
- 글 이지원_ 단편영화 <여름밤>으로 2016 청룡영화상 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정말 우연히 영화를 전공하게 되면서 영화가 좋아졌고,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몇 편의 단편영화 작업을 했고, 지금은 상업 장편영화를 준비 중이다.
- 그림 신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