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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10월호

종로 4가 사거리의 터줏대감 벽화와 건축 살구빛 벽화가 있는 건물, 도시에 온기를 지피다
종로 4가와 5가 사이에 있는 광장시장은 서울시민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각광받는 곳이다. 시장의 서쪽 출입구 근처에는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웅장한 멋이 있는 테라코타 벽화 한 점이 걸려 있다. 이 작품과 작품이 걸린 건축물(현 우리은행, 구 상업은행)은 1974년에 함께 건립됐는데, 건축과 미술의 당찬 실험과 순수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 마치 숨은 보물 같다.

건축과 예술품의 공생은 어떻게 도시의 한 지점의 감정을 만들어 갈까? 처음부터 계획된 건물과 거리에 놓인 예술품의 관계는 다분히 형식적으로 흘러왔다.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주차장 등 일부 시설을 제외한 연면적 1만m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 건축 비용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들여 법적으로 ‘건축물 미술작품’이라 하는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해야 한다. 작품이 설치 될 때에는 미술, 건축, 디자인, 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 의해 미술품의 안전성, 예술성, 건축물 및 환경과의 조화 등의 항목에 따라 심의를 거친다. 그러나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미술작품이 설치돼 도시 미관이나 시민의 감성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팝아트의 영향으로 도시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좋은 작품도 놓이지만 진중하고 세련되며 우리 성정에 맞는 따뜻한 예술과 건축의 조화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1 흙을 닮은 빛깔과 입체 부조에서 웅장한 힘이 느껴지는 오윤의 벽화, 그리고 조건영의 건축물(우리은행). 광장시장과 이웃한 이 건물은 벽화 아래 들어선 노점과도 이웃할 때가 많다.
2 최근에 부착된 벽화에 대한 설명.

기하학적 건축언어의 실험과 민중예술의 메시지를 품은 건물

종로 광장시장 서쪽 출입구의 북쪽에는 우리은행(구 상업은행) 건물이 종로 4가 사거리에 면해 있다. 1974년에 지어진 2층 규모의 이 건물은 원래 10층으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은행의 1층은 거리보다 1m 정도 높이 위치해 있고, 사거리에 면한 벽에는 민중 판화가 오윤과 그의 친구인 오경환, 윤광주가 같이 작업한 높이 3.4m, 건물 전면 32m에 걸친 규모의 테라코타 벽화가 걸려 있다. 1974년에 건물이 지어질 때 함께 제작된 작품인데, 건물의 외관은 시간의 흔적을 숨길 수 없이 많이 변화돼 있다. 원래 은행의 입구는 건물 남쪽의 입체적인 삼각형의 예리한 캐노피 아래에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큰 원통 2개로 이루어진 매스 안에 나선형 계단이 S자를 그리며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진다.
이 건물은 기하학적인 순수한 건축언어로 건축 설계를 한 젊은 건축가 조건영의 초기작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출입구는 예리한 삼각형, 계단은 나선 계단, 은행 업무 공간은 네모난 형태로 순수한 기하학적 모양을 다 적용해, 건물 또한 순수한 형태로 만들었다. 지금은 오윤의 테라코타 벽화가 더 많이 회자되지만, 건축가 조건영이 거리를 향해 벽화를 놓을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건축과 예술의 접목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건영의 친구 아버지가 당시 상업은행의 임원이어서 아무런 유명한 작품도 없는 26세의 신예 건축가에게 흔쾌히 설계를 의뢰했고, 조건영은 친교하던 민중 지식인과 예술인 중에 동갑내기이던 오윤과 협의해 벽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민중예술의 선구자 역할을 한 오윤 역시 당시 26세의 젊은 나이로 그의 작품 세계를 열기 시작해, 벽화는 선의 흐름이 명확하고 꽃잎 같은 부조의 모양을 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윤범모는 ‘1970년대의 오윤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벽돌공장이나 전통 가마 등지에서 흙 작업에 몰두해,1980년대에 그가 선이 강한 작품을 낳게 되는 스케치를 많이 남겼다’ 한다. 오윤의 민중예술에 대한 관심은 당시에 50년 정도 앞서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가 보인 저항적인 메시지의 영향도 있지만, 한국의 전통적 표현 양식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광화문에 테라코타 연구소를 열기까지 했던 오윤의 흙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조건영 역시 서슬 퍼런 유신 정권시기에 건축사무소를 개업하고 동시에 재야의 지식인들과 교우하며 권력의 시녀와 같던 당시 건축가들과는 다른 행보를 이어 갔다.

흙의 감성과 재치, 도시에 필요한 그것을 오래 보고 싶다

조건영과 오윤은 옛 동대문시장, 즉 지금의 광장시장이 일본 자본에 의해 설립된 남대문시장이나 명동과는 달리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들은 1960~70년대에 장준하 선생을 구심점으로 움직이며 민중예술을 규합해 1988년에 민예총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뜻을 같이한 이들이기 때문에 영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 우리은행에는 광장시장 상인의 편의를 위해 시장과 은행건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놓여 있다. 시장 점포 사이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계단을 올라가면 은행으로 연결된 2층 쪽문이 나온다. 그만큼 상인의 의존도가 높다는 뜻이다. 광장시장 안에 있는 점포 상인의 은행 이용이 건축·건물의 의도와 용도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시장 밖 테라코타 벽화 앞에 자리 잡은 꽃 노점은 건물이 의도하지 않은 부분-부가적인 공간을 활용하는 셈이다. 종로구와 은행은 그 앞이 사실상 불법 점유되는 것이므로 정비에 나설 수 있지만, 필자가 이 벽을 보아온 십수년의 시간을 돌이켜보니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벽화와 아래의 검정 돌 마감은 솔직히 기대기 딱 좋게 생겼다. 만약에 요즘 지어진 건물처럼 은행 유리창이 거리에 면해 있다면 그 앞 대지 안의 공지는 주차 공간으로 활용됐겠지만, 40여 년 전에 지어진 이 벽 앞에는 마치 오윤의 민중화가로서의 전력을 알고 있는 듯이 꽃 노점이 자연스레 기대 있다.
최근에 붙은 테라코타 벽화의 명패에는 “멕시코 벽화운동의 강력한 메시지 전달력에 주목한 오윤은 건강한 흙의 생명력을 도심 속으로 옮겨왔다.”라고 적혀 있다(사진 2). 돌격 개발의 시대에 이미 흙을 논하고, 1980년대에는 종로에 사과나무를 심어보자는 노랫말도 나올 지경이었다. 무지막지한 도시화 광풍 속에 광화문 일대와 강남역 사거리는 시민이 여름 물난리를 반복적으로 겪는 난개발이 진행됐고, 더 이상 쾌적한 기후도 잃었음을 올여름에 톡톡히 몸으로 경험했다. 불투수성 잿빛의 벽과 바닥, 심지어 쌓인 먼지와 흐린 대기까지 차갑게 다가오는 현실에서, 살구빛을 내는 흙 벽화와 그것을 기하학적 대조로 돋보이게 하는 건축이 종로4가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광장시장을 알리는 터줏대감이라 하면 무리한 칭찬일까? 그곳에 불가능할 것 같은 따뜻한 벽과 군더더기 없는 기하학적 건물이 있기에 종로4가를 인식하게 된다면 비약일까? 시장의 주력 상품이 마켓 상황과 국제화, TV 엔터테인먼트 등에 의해 바뀌어가지만 시장 사람들의 금고 역할을 함과 동시에 따뜻한 감성까지 만드는 흙벽과 건축이 이 사거리의 명물이라고 나는 여기고 싶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은 높아지고 대지가 잿빛으로 변할지언정, 내 눈이 흐려져 앞이 가물가물해질지언정 따뜻한 살구빛의 흙벽은 잿빛 대기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터줏대감으로 이곳에 있어주었으면 한다. 서울의 많고도많은, 넓디넓은 사거리 중에 이처럼 진정으로 따뜻한 느낌을 가진 곳 하나쯤은 이렇게 눈에 띄지 않게 있더라도 간직하고 싶다. 이름 모를 벽화에 명패를 붙여 그 의미를 알리듯이, 많은 건축가로부터 그 기하학적 명쾌함에서 천재적인 건물이라 여겨지는 이 건물도 부디 기하학적이고 순수한 딴 세상과 같은 재미를 최대한 느낄 수 있는 원형으로 유지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문화+서울

글·사진 송하엽
중앙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미국건축사. 저서로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 <표면으로 읽는 건축>이 있으며, 서울건축문화제에서 ‘담박소쇄노들: 여름건축학교’ ‘한강감정: 한강건축상상전’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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