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시원 작 면회
* <10분 희곡 릴레이>는 젊은 작가 혹은 지망생들의 재기발랄한 10분 단막극입니다.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人에 가시면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webzine.e-st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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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현재
곳 교도소의 면회장
등장인물 남자(42) | 여자의 복역 중인 남편
여자(38) | 남자의 옥바라지를 하는 아내
면회실이다. 단절된 유리창 사이 콩알같이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고,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무대가 밝아오면 임신해 배가 조금 부른 여자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불편하거나 불안한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 이곳을 왕래한 것 같다.
잠시 후, ‘웽’ 하는 비프음이 울리고 여자의 반대쪽에서
하얀 번호표가 붙은 푸른 수의 차림의 남자가
들어와 앉는다. 둘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유리창을 기준으로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면회를 시작한다.
- 여자
- 왔어요?
- 남자
- 응. 날씨 많이 춥지?
- 여자
- 크리스마스잖아요.
- 남자
- 맞아. 교회에서 난리도 아니야. 게다가 절도 덩달아서 말이지.
남자가 한 대답을 끝으로 둘 사이에 일상적인 침묵이 흐른다.
- 남자
- 아, 이번에 월동용 양말이 새로 나왔어. 근데 받고 보니까 올이 좀 나가 있더라? 벌써 구멍이 난 듯, 안 난 듯 아슬아슬하게. 이게 생각보다 엄청 거슬린 거 있지?
- 여자
- 구멍 하니까 생각난 건데, 집에 웬 쥐가 나왔어요. 엄청 큰놈이더라고요. 거의 주먹만 한 구멍을 싱크대 밑에 딱, 뚫어놓고 아주 왕처럼 살고 있는데, 잡으려고 해도 이 몸으로 잡기 쉽지가 않아서….
- 남자
- (다소 격앙되어) 쥐! 그래! 나도 교도관한테 말했다니까? 분명 쥐가 내 보급 양말을 갉았을 거라고. 근데 여기엔 쥐가 없다는 거야? 올 초에 업체 불러다가 다 잡았다고 그러면서.
- 여자
- (상기된 듯한 어조로) 나도 업체를 불러서 했는데, 솜씨가 좋았어요. 처음에 직원을 보고 좀 놀랐거든요? 이런 일 하기엔 좀…. 뭐랄까? 잘생겼다고 해야 하나? 잘하려나 걱정했는데 아주 프로더라고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쥐똥 몇 개 발견하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는…,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느끼하게) “포유강, 설치목, 라투스 노르베기쿠스. 그러니까, 시궁쥐죠. 아이러니하게도 멸종 위기 ‘관심 필요’종입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여자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직원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느라 잠시 대화에 공백이 생긴다.
- 여자
- 아, 그 남자 마인드도 아주 프로였어요.
- 남자
- 아니, 지가 뭔 신이야? 어떻게 알아? 이 넓은 가막소에 ‘쥐가 한 마리도 없다’는 것과 ‘몇 마리쯤 있을지도 모른다’랑 뭐가 더 옳을 만하냐고? 나이도 나보다 어린 놈이 반말이나 찍찍 해대면서. 그리고! 아주 폭신한 동계 양말을 두 겹이나 신고 있었어.
- 여자
- 나이도 어린 사람이 얼마나 옳은 소리만 하는지. (다시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전 이 일이 천직입니다. 동창회에 나가서도 떳떳하게 말해요. 세상에 직업의 귀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고는 그 굵고 탄탄한 팔로 긁개를 쥐곤 막 구멍 속으로 밀어 넣더니…!
- 남자
- 그래, 그놈 아주 이 짓이 천직이야. 끽해봐야 공무원 시험보고 다달이 나오는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면서 사는 놈이. 그러니까 그릇이 딱 그 정도인 거야. 남자로 태어났으면, 사업도 크게 해보고! 그리고 좀 말아먹기도 하고! 남자가 한 번 살지. 두 번 사냐?!
- 여자
- 그러고는 ‘찍찍!’ 하고 지랄 발광하는 소리가 났어요. 그 남자는 왠지 더욱 신나서 더 빠르게, 강하게!
- 남자
- 그래서 나도 생각했지. 아, 이건 좀 아니다. 내가 좀 더 강하게 나가야겠구나. 이 빌어먹을 공무원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건, 좀 더 잘나가는 공무원의 말 한마디뿐이니까. 곧장 방으로 돌아가서 소장 면담 신청서를 쓰기 시작했어. (목청을 가다듬고) 친애해 마지않는 교도소장님께.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사회 평화와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바쁘신데도 이렇게 서면으로나마 연락드린 것은 최근….
- 여자
- 그 날카로운 턱 선으로 비지 같은 땀을 뚝뚝 흘리며 한참을 씨름하다, 마침내! 그놈이 나왔어요. 사실은 그년이었지만. 얼마나 발악을 했는지 반 토막이 나 있는 상태로 나왔어요.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어쩌겠어요. 나도 사정이 있는데.
- 남자
- 꼬박 하루를 공들여서 써가지고 수리함에 넣어뒀지. 뭔가 뿌듯했어.
- 여자
- 휴지로 그녀를 감싸고 짧게 기도한 후, 지퍼락에 담아 가방에 넣었어요. 그리고 떠나기 전 신발장에 서서 참 인상 깊은 말을 했어요. (남자 목소리로) “암컷이네요. 이 녀석도 올바른 집에, 올바른 상황에 태어났다면 귀여움 받았을 겁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요. 그러곤 혹시 쥐가 다시 나오면 연락 달라며 명함을 줬어요.
- 남자
- 뭔가 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마저 들더라. 비록 내 한 몸 이곳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지만 내 정신과! 투쟁심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식단은 엉망이었지만 무척 맛있게 먹었던 것 같아.
- 여자
- 그런데 놀랍게도 쥐가 또 나타난 것 같았어요. 잠자려고 누우면 “찍찍”, 밥을 먹다가도 “찍찍”. 도무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얼른 전화기를 들었죠. 근데 왠지 전화를 하면 재촉하고 따지는 것 같을까 봐 문자를 날렸어요. (교태를 부리며) ‘쥐가 또 나오는데 이걸 어쩌면 좋죠?’
- 남자
- 기다리고 기다렸어.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그런데 보름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거야. ‘편지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나? 혹시 접수가 안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밥 먹고 다시 쓰려고 마음을 굳힌 찰나. 그 보급 교도관 놈이 내가 쓴 편지를 내 앞에서 직접 읽으며 비실비실 쪼개는 거야.
- 여자
- 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이 없었어요. 전화도 안 받고. 업체에 물어보니까, 다른 직장으로 옮겼대요.
- 남자
- 그러곤 내 식판을 엎었고 지금까지 내 일과 외 시간까지 따라다니며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해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괴롭히고 있어.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
- 여자
- 어쩜 서비스일 하는 사람이 그래? 사실 쥐를 찢어 죽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
둘 다 흥분해 씩씩거린다.
그리고 둘은 진정하기 위해 숨을 몰아쉰다.
- 남자
- 난 제대로 된 걸 받고 싶었을 뿐이야. 남들처럼.
- 여자
- 그럼요! 사람은 모두 제대로 된 걸 받고 싶어 하죠.
둘은 구태여, 여태와 달리 혼잣말하듯이 이야기한다.
- 남자
- 그 양말, 그냥 구멍이 조금 뚫린 것뿐인데. 아직 기워놓으면 얼마든지 쓸 수 있겠지?
- 여자
- 살았다면 분명히 좋은 엄마가 되었겠죠? 그렇게 큰 구멍을 뚫는 여자였다면.
사이. 면회 종료를 울리는 ‘웽’ 하는 비프음이 울린다.
- 남자
- 아 참, 여보! 메리 크리스마스.
- 여자
- 메리 크리스마스. 여보!
무대를 비추던 조명이 점차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