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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7월호

무용가 김충한이 꿈꾸는 무대 안팎의 혁신

김충한은 ‘한국적 소재를 모티프로 하는 춤’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름이다. 창작 신scene에서 굵직한 이력을 쌓아온 그가 보존과 전승을 중심으로 하는 국립국악원 무용단으로 거취를 옮긴 지 어느덧 1년 반이 흘렀다. 국립국악원에서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는 그는 관객의 마음에 닿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는 신념으로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행보를 조금씩 바꿔 놓고 있다.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고전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그가 꿈꾸는 무대 안팎의 혁신을 들여다봤다.

배우는 몸, 도전하는 마음
국립국악원 무용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지 어느새 1년 반을 지나왔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시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러 단체에서 예술감독으로 재직했지만, 그 어떤 단체보다도 시간이 빨리 흐른 것 같습니다. 국립국악원에 온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 반이라니요. 소화해야 할 공연이 엄청 많습니다. 초 단위로 연습해야 해요.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경우 녹음된 반주음악에 맞춰서 공연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음악을 실황으로 연주하고 거기에 맞춰 공연하기 때문에 무용단 내에서의 연습뿐만 아니라 정악단이나 민속악단·창작악단 등 연주자들과 호흡을 맞추는 시간이 필요해요. 다시 생각해도 숨이 찰 정도로,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네요.(웃음)

창작보다 보존과 전승에 좀 더 초점이 맞춰진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감독님께 새로운 도전이리라 생각하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한 것이 있나요?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정재呈才(궁중무용)를 위주로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재’ 하면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제대로 감상하려고 하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해야 할까요. 마니아층이 아니면 진입장벽이 있는 게 사실이에요. 저는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정체성이나 정신을 훼손한다는 건 아니에요. 그걸 잘 지키면서 창의적인 모습, 현대적인 모습이 어떤 것일지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2024년 초연하고 올해 재공연을 앞둔 <상선약수>입니다. ‘상선약수’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도덕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민속춤 열 가지를 다시 해석한 작품인데, 부임 후 첫 정기 공연 레퍼토리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나온 시도인가요?

임명이 확정된 그날부터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적인 소재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하는 작업을 많이 해왔어요. 그런데 보존과 전승을 중심으로 하는 국립국악원에서 갑작스럽게 현대화를 시도하면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쉬운 방법으로 접근을 해 보자고 생각했죠. 보통 민속춤은 독무입니다. 혼자 춘단 말이죠. 저는 한국 민속춤의 본질은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춤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고 그렇게 완성한 것이 <상선약수>입니다.

2024년 초연해 올해 재공연하는 국립국악원 무용단 <상선약수> ⓒ국립국악원

보통 민속춤 하면 개인의 기량을 극대화해 혼자서 추는 독무 형식이 익숙한데, 군무로 감상하는 건 색다른 경험입니다. 서로 다른 유파를 공부하는 것도 단원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을 듯합니다.

원래 민속춤이라는 건 한성준이라는 거장으로부터 파생한 것들이죠. 거기서 강선영류·한영숙류·이매방류 같은 유파들도 뻗어나가기 시작하고요. <상선약수>는 그런 유파들을 최대한 모으고 해체한 후 재구성해보는 시도였습니다. 특정한 유파를 따라가지 않는 거죠. 특정 유파의 춤에서 가장 좋은 부분, 혹은 특색이 있거나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부분을 종합적으로 모아서 재구성한 거예요. 당연히 작곡가에게 의뢰해서 음악도 다시 만들었고요. 그러다 보니 단원들에게는 큰 시도였어요. 이를테면 본인들에게 익숙한 동작과 순서가 있을 텐데 여러 유파를 왔다 갔다 하니 쉽지 않았을 거예요. 이런 시도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비판받더라도 지금 변하지 않으면, 지금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시작했습니다.

2024년 10월 기획공연으로 무대에 올린 <고려가무>는 『고려사 악지』를 토대로 정재를 해석한 공연입니다. 기록만으로 온전히 춤을 복원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기록으로부터 시작되는 상상이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 같은데요. 김혜자·박성호·백미진 세 안무가에게 어떤 것을 요청했고, 이를 조율할 때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고려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무가 세 분은 정재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작업에 오랫동안 몰두해온 분들이에요. 그래서 창작할 때 고민되는 지점이 많았죠. 저는 관객이 공연을 어렵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엇보다 관객이 즐겁게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작품 전반에서 서사가 느껴지게요. 작품의 템포도 중요하게 고려했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느리게만 진행되면 관객이 힘들 수 있으니 동적인 부분을 넣고, 이와 관련해서는 작곡가들과 조율했습니다.

국립국악원에서 작품을 제작하고 공연 활동을 하며 즐거웠던 순간이나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국립국악원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보니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제게 공부가 안된 부분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또 공부할 게 너무 많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일 년 동안 다른 지역 순회공연을 하면서 종묘제례악을 볼 기회가 많았는데, 이제야 그 깊이를 알게 된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창작할 수 있는 소재가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던’이라는 건 ‘클래식’이 동반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없으니까요. 창작이라고 해서 클래식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닌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립국악원은 ‘클래식’이 잘 돼 있기 때문에 굉장한 것이 탄생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춤을 따라 걷는 길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춤이라는 세계에는 어떻게 빠져들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에요. 경북 문경 출신인데, 형의 유학길을 따라 서울로 온 거예요. 옛날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사람은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고요. 저희 때만 해도 서울로 빨리 가서 공부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죠. 저는 공부를 소홀히 했지만, 음악이나 춤에 재능이 있었어요. 예능에 관심이 있었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무용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충한’ 하면 화려한 이력의 기반이 된 명무 정재만과 훈령무가 떠오릅니다. 정재만 선생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1980년대에 대한민국무용제가 열렸어요. 지금의 서울무용제인데, 거기서 정재만 선생님의 <홰>라는 작품을 보게 됐지요. 그런데 그 작품을 보고 너무 깜짝 놀란 거예요. 그래서 정재만 선생님께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정재만 선생님께서 가장 많이 가르쳐주신 게 훈령무예요. 지금은 제가 선생님의 훈령무를 이어서 추고 있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요.

늘 푸른 소나무처럼 살라고 하셨어요. 소나무는 색깔이 변하지 않잖아요. 일 년 내내 계절이 변해도 자신만큼은 변하지 않는 그런 존재죠. 자신의 예술관, 신념을 지키고 어떤 위치에 가더라도 늘 초심을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요.

정재만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일화도 많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많아요. 그래도 하나만 말해보자면, 저는 남자니까 남성 춤을 췄는데요. 어느 날 선생님께서 실제 교육 대상은 여성이 많다면서 치마를 입어봐야 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치마를 입고 연습을 했습니다. 치마를 잡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두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여성 무용수들을 가르칠 때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땐 누가 볼까 걱정도 되고 부끄럽기도 했는데, 사실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여성 무용수보다 더 예쁘게 치마를 잡을 수 있습니다.(웃음)

세계를 움직이는 춤
국립무용단·국립정동극장·경기도무용단에서의 굵직한 활동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간단히 말씀해주세요.

활동 이력이 많아서 모두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대표적으로 정동극장에서 진행한 시리즈가 있어요. 대표적으로 상설공연 ‘미소’ 시리즈가 있죠. 그전까지는 ‘춘향’ 이야기만 다뤘어요. 그런데 제가 해마다 내용이나 의상·무대 등을 재단장해서 새롭게 상설공연을 꾸렸습니다. 난타가 상당히 인기가 많던 시절이었는데, 그걸 뛰어넘을 정도였습니다. 유료 관객과 외국인 관객의 수가 상당했죠. 경기도무용단에서의 활동도 기억에 남습니다. 팬데믹 시기와 겹치면서 활동이 원활하지는 않았는데요. 제목을 <본>, <률> 등 한 글자로 정해서 레퍼토리를 차곡차곡 쌓았죠. 대체로 무용극이었는데, 일반 대중이 접근하기에 좋았죠. 미학도 미학이지만 울고 웃고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작을 떠올려보면 ‘무용극’, ‘댄스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우선은, 제가 국립무용단 출신입니다. 국립무용단에 재직할 때 송범 선생님께서 예술감독으로 계셨어요. 옛날엔 국립무용단의 작품이 거의 다 무용극이었습니다.요샌 무용극을 잘 하지 않죠. 저는 무용극에 강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뮤지컬을 좋아해요. 뮤지컬 보러 가면 사람들이 열광하는 게 눈에 보이잖아요. 노래도 노래지만,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가 있죠. 그래서 무용도 뮤지컬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대중과 교감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무용 쪽은 어렵게 작품을 만드는 경향이 있거든요. 저는 관객이 와서 이해하지 못한 작품은 실패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좋은 움직임이 있을 순 있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관객 입장에서 기억에 남는 게 없으니까요. 철저하게 사람들을 위한 춤, 관객을 위한 춤이 돼야 한다고 봐요.

대중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 또 대중과의 공감과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도 이런 신념을 갖고 계셨는지 궁금합니다.

젊을 때는 저도 못 알아듣는 작품을 많이 했죠. 그래서 실패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관객의 반응이 없어요. 예술가는 엄청난 고민을 하고 만들었는데, 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죠.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박수 소리만 들어도 알아요.

무용가로서 한국춤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외국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이 ‘호흡’이에요. 승무나 살풀이춤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죠. 우리는 이걸 내공이라고 하는데, 이 내공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요. 그런데 요즘 교육은 이걸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안타까워요. 우리는 스승과 밀접하게 교육을 받아온 세대니까 그 내공을 조금 전수했거든요. 그런데 다음 세대는 이런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아요. 외국춤 하는 사람이 한국춤을 추는 것 같은 호흡이 나타난다고 해야 할까요.

감독님께서 한국춤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세계를 꿈꿔요. 예전에는 외국에 한번 나가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지금은 세계가 우리를 쳐다보기 시작했잖아요. 우리가 가진 전통을 세련되게 만들어 세계로 가는 것이 제 꿈입니다.

글 성혜인 음악평론가

사진 Studio K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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