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너머 임현정이 향하는 본질
임현정의 행보에는 일관된 태도가 있다. 하나의
세계를 흔들리지 않는 관점으로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 음악이 가진 본질로 향하고자 하는
뚝심 있는 마음가짐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몇몇 K-팝 가수들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고 떠들썩해진 것은 최근이나, 임현정이
클래식 앨범 차트로 빌보드 1위를 기록한 것은
10년도 더 전인, 2012년이었다. 상황은 지금과
달랐다. 프랑스에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러 온
동양인에겐 인종차별이 만연했고, 한국
피아니스트에 대한 인식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 시절, 영국의 권위 있는 음반사 EMI에서
한국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발매한 것이다. 그 후로 임현정은 흔한
콩쿠르 우승 이력 없이 연주자로서의 궤도에 올라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왕벌의 비행’을 연주한 영상은 유튜브에 오래도록
회자했고, 프랑스 출판사 알방 미셸Albin Michel에서
에세이 『침묵의 소리Le Son du Silence』2016를
출간하며 깊은 철학적 사유의 역량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해,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는 공연을 열었다. ‘임현정다운’
특별한 점은, 피아노 파트만으로도 이미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이 작품을 오케스트라 부분까지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해 독주 무대에 올린 것.
이 독특한 프로젝트의 동기에 대해 임현정은
“작품에 녹아 있는 작곡가의 생각, 그 모든
세포 속까지 침투해 속속들이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고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밝혔다.
오는 6월, 또 한 번의 ‘임현정다움’이
느껴질 무대가 다가온다.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곡을 연주하는 것. 심지어
한 무대에 현대 피아노와 더불어 피아노의
전신이자 바흐 시대에 사용된 건반 악기인
하프시코드•클라비코드•오르간이 같이 오른다.
또 한 번의 ‘다시 없을’ 기록 같은 무대를 준비하고
있는 임현정과 긴 대화를 나눴다. 공연 준비와 함께
이제 갓 4개월이 된 아들을 둔 ‘초보 육아맘’으로의
일상도 함께 보내고 있는, 그래서 “인간의 본질도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열정적인
예술가의 단면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임현정의 이미지에 ‘육아’는 없었는데… 출산을 축하합니다! 연주를 준비하는 데 있어 손목에 무리는 없나요?
다행히 바흐의 작품이라 큰 어려움은 없네요. 라흐마니노프 전곡 연주 때는 만삭이었는걸요! 아직은 초보라 육아는 배워가는 중이에요. 수유와 연습을 번갈아 하는 게 일상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겪은 소회도 특별했을 것 같아요. 일상의 변화가 음악에 대한 관점을 바꾸기도 했나요?
사실 한 여성으로서 생명을 출산하는 것을 오롯이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통 주사도 없이, 가정에서 수중 분만으로 진통을 전부 느끼면서 낳았죠. 이 과정도 음악에 접근하듯 본질의 탐구로간 것 같아요.(웃음)
언급한대로, 늘 깊이 있는 탐구 과정을 거쳐 무대에 음악을 올립니다. 이번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곡이라고요.
사실 이미 10년 전에 두 권 중 첫 번째 곡집을 전곡 연주하며 세계 투어를 했어요. 그래서 항상 ‘언젠가는 전곡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죠. 첫 번째 곡집을 연주하면서, 바흐가 인류에게 보물로 남겨둔 이 작품을 깊이 체화하고 싶었거든요. 요즘 전곡을 준비하며 다시 드는 생각은, 그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했다는 것이에요. 이 작품은 클래식 음악가를 넘어, 음악을 다루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본질’이니까요. 음악 그 자체를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특별히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 음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2개의 모든 조성에 해당하는 장•단조를 모두 사용한 작품이에요. 그리고 한 조성에 대해 프렐류드와 푸가라는 상반된 형식을 가진 두 작품을 묶어두었죠. 프렐류드는 자유로운 형태, 푸가는 여러 성부가 민주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엄격한 형식입니다. 특히 푸가가 이뤄내는 음악적 이상은 거의 유토피아에 가까워요. 이 경이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건, 그 멋진 예술에 저 또한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일종의 ‘팬심’이죠. 나 또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
총 네 악기가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각 작품에 어울리는 악기로 연주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이 적용되나요.
오르간은 피아노와 달리 음이 여러 마디에 걸쳐 지속될 수 있죠. 낮은음이 지속되는 가운데, 화성과 선율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작품들을 보면 ‘아 이 작품은 오르간이 아니면 바흐가 원한 것을 완벽히 표현할 수 없구나’라고 절로 느껴집니다. 하프시코드는 악기가 가진 가벼운 건반을 특징으로 떠올렸어요. 마치 건반과 손가락 사이에 바람이 통하는 듯한 테크닉이랄까요. 반면에 클라비코드는 사실 시대악기라는 점에서 하프시코드와 비슷하지만, 휴대용으로 작곡가가 침대 바로 옆에 두고 언제든지 연주할 수 있는 악기라는 점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바흐의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이 담긴 작품은 클라비코드로 선보이려고 해요.
현대 피아노로는 어떤가요. 바흐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한 피아노가 없었습니다.
사실 바흐가 지금의 현대 피아노를 알았다면, 무척 반가워했을 것 같아요. 바흐의 대위법에서 사용되는 성부들이 더 뚜렷이 들릴 수 있고 강약 조절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요. 악기가 가진 장점을 발휘해 몇몇 곡은 현대 피아노로 연주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바흐의 작품을 연주하는 데 있어 페달 사용을 망설이지 않아요. 바흐는 당시 대성당 오르간처럼 울림이 큰 음향에 익숙했고, 실제로 당대 음악평론가들이 바흐의 연주에 대해 “엄청난 기교에도 정확했고, 천둥번개가 치는 듯했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죠. 바흐의 제자는 “그가 연주할 때면 가사에 담긴 의미를 음으로 표현하듯 치라고 가르쳤다”고 언급하기도 했어요. 바흐가 작품에 담고자 했던 선명한 표현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저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에선 흔하지 않은 경력을 쌓아왔습니다. 콩쿠르 우승이 아닌, EMI 음반 발매를 도약대로 삼았죠. 그 후로 빌보드 클래식 앨범 차트 1위까지, 당시의 사건은 20대의 젊은 임현정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또한 이후 자신만의 길을 걸어오면서 정립한 ‘성공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나요?
뜻밖의 소식인 건 맞죠. 하지만 제게 있어 큰 ‘사건’은 20세 당시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에 도전한 것이었어요. 베토벤에 도전하겠다는 제 계획을 찬성하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어요. EMI에서도 처음엔 다른 레퍼토리로 녹음하기를 제안했죠. 하지만 저는 당시 베토벤에게 푹 빠져 있었고, 8일에 걸쳐 공연까지 해낸 뒤였어요. 그렇게 베토벤 작품으로 녹음했고, 어느 날 EMI 지사에서 빌보드 차트 1위를 했다고 메일이 왔더군요. 재밌는 사실은, 유럽에선 ‘빌보드 차트’를 잘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파리에서 쭉 공부를 해온 저도 당시엔 별생각이 없었던 거죠. 그 타이틀이 어느 지역에선 아무 의미가 없고, 또 어디서는 대단한 의미라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물론 행운인 건, ‘빌보드 차트’가 제게 한국에서의 공연 기회를 준 것이었죠. 그러나 결국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제가 아무런 지지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묵묵히 베토벤 전곡이라는 대장정을 걸었다는 사실이에요. 나를 둘러싼 환경은 내버려두고, 음악이라는 본질에 집중하는 것. 그게 제가 오늘날까지 해온 싸움이에요.
‘싸움’이라… 말 그대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과정이 싸움에 가까웠을 것 같아요. 자신만의 개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신기한 점은,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거예요. 베토벤으로 예를 들자면, 그가 혁신적인 작품을 쓰면서 ‘베토벤답게 느껴지게 작곡해야지’ 하고 생각하진 않았겠죠. 그저 본인에게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를 진정성 있게 표현했고, 우리는 그것을 ‘베토벤’이라고 부르는 거고요. 그러니 예술가 본인은, 그저 본인일 뿐이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개성이 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유일무이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수많은 눈의 결정체 모양이 전부 제각각인 것처럼요. 우리는 전무후무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개성으로 느낄 수밖에 없죠. 저 또한 사람들의 소리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하며 음악에 순수하게 몰두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어요.
‘자신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곧 개성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또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모호하기도 합니다.
음… 음식의 간을 보는 것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어떤 음식이 내 입맛에 딱 맞는 간인지는 조금씩 먹어보면서 알잖아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제 연주를 녹음해서 많이 들어요. 들으면서 ‘여긴 딱 좋아’, ‘여긴 좀 아닌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생각을 ‘존중’하려고 합니다. 사실, 요즘 시대에는 그 생각을 존중하는 단계가 어려운 것 같아요.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더욱 그렇죠. 저는 그 순간만큼은 ‘사회 속의 나’라는 역할을 완전히 내려놓고 ‘나라는 사람 자체’만을 마주하려고 노력해요. 누군가의 가족이나 제자가 아닌, 그냥 ‘임현정’의 목소리를 찾는 거죠.
『침묵의 소리』, 『블리스』2024 등 여러 책을 집필하기도 했는데요. 글을 쓰는 것도 ‘나만의 목소리’를 찾는 하나의 방법인가요?
저는 문학을 무척 존중하고, 음악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해요. 리스트나 슈만·베를리오즈처럼 위대한 음악가이자 글을 쓴 작곡가들도 많이 있죠. 원하는 바를 글로 명확히 표현할 때, 음악적 아이디어도 뚜렷해지는 걸 느껴요. 이번 연주를 준비하면서도 바흐에 관한 책을 집필했어요. 바흐에 관한 자료, 그리고 바흐의 음악을 연구하며 ‘내가 느낀 바흐’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죠. 글은 제 음악세계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도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인가요.
책은 정말 좋아해요. 동시에 두세 권을 늘 읽고 있는 것 같아요. 『왓칭』2011이라는 명상 관련된 책을 좋아해서 여러 번 읽었고,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라는 프랑스 작가의 책도 좋아해요. 도스토옙스키를 너무 좋아해서 러시아어를 공부할 정도였죠
무엇이든 끝까지 파고들고, 또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마음가짐을 유지하게 해주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승화’라는 키워드가 내 안에 늘 자리잡고 있어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죠. 더불어 모든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가능성을 끌어내 사용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데, 저한텐 그걸 이루게 해주는 것이 음악이고요. 음악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 그 완전한 원리 속에 저 또한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제 원동력이죠.
글 허서현 월간객석 기자
사진 제공 다나기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