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욱,오늘도 균형을 가웁니다
매일 비틀거려도 다시 중심을 찾아가는 사람. 양정욱은 쓰러질 듯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손끝으로 균형을 이어 붙인다. 결국 그의 조각엔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남는다.
‘올해의 작가상 2024’ 수상을 축하합니다. 작가님께 올해의 작가상은 어떤 의미인가요?
살아가면서 조금씩 나누어 받을 축하를 한 번에 받은 기분이에요. 이번 기회로 ‘올해의 작가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상인지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덕분에 작가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느낌이에요. 당분간은 작가로 사는 삶이 더 짙어질 것 같습니다. 10여 년간 작업을 이어오며 여러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 기쁜 일에는 항상 반대편의 일이 있었고, 창작에 몰두할수록 가족을 챙길 여유가 부족했죠. 풍요 속에 마음이 빈곤해지는 때도 있었고요. 끝내 저는 모든 일을 ‘이런 일이 생겼구나’, ‘이런 일도 생길 수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잘 차려진 한 끼의 식사를 감사히 먹고는 잊어버린 뒤, 다음 끼니를 준비하는 것처럼요. 다음 끼니는 제 취향과 다를 수도 있고, 건너뛰어야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기대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슬퍼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그동안의 작업 여정을 돌아보게 됐나요?
제 작업은 수십 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글을 아내에게 보여주고 그 반응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아내가 “비슷하다”고 말하면, 묘하게 안심이 돼요. “양정욱답다”로 들리기 때문이에요.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에서도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작업은 다 비슷한 것들이에요.” 물론 기술이나 연출 방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어요. 시대나 공간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져야 하는 부분이죠. 소재 또한 바뀌었습니다. 사람에서 사람들로 시선이 넓어졌고, 피곤과 불안, 혼란, 갈등 같은 감정들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그러나 모든 작업 뒤에는 공통의 질문이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으로 움직이고, 무엇으로 그것들을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것들을 알아야 하는가.’ 향후 작업의 궤적은 일부 변하겠지만, 다루는 내용은 계속 제 작업의 중심을 이루게 될 거예요.
한 인터뷰에 따르면 ‘매 전시가 끝날 때마다 작업을 그만두고 글을 쓰거나 카페를 할까?’라는 생각을 한다고요.
예술이 반드시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성껏 끓여낸 김치찌개 한 그릇도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가 예술이에요. 저는 그저 제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술을 실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작업을 그만두는 것이 예술을 그만둔다는 의미로 다가오진 않아요. 작가로서 저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예술을 선호합니다. 실재하는 재료로 만든 작품이 특정 공간을 점유하며 관객과 만나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거든요. 그것이 조각이라는 장르의 특징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요. 반대로 물리적 공간이 없다면 제 작업은 존재할 수 없고, 관람 역시 불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조건은 창작 과정에서 제약으로 작용하고, 전시의 시작과 끝에서 저를 고민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 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만약 정말로 카페를 열었다면 어떤 콘셉트였을까요?
바람을 현실화하려고 틈틈이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어요. 콘셉트는 전형적인 카페보다는 ‘개방된 수장고’에 가깝습니다. 안온하게 차를 마시며 작품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공간. 이곳에서 관람객과 자주 만나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기를 바라요. 작품과 글로 가득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가까이 마주 앉아 온기를 나누는 풍경은 제가 작업을 통해 지향하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제가 작가라면 ‘올해의 작가상’ 수상으로 인해 작업이 나를 대변하고 있음을 체감할 것 같습니다.
작업은 저를 말하지 않아요. 되레 저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대부분이에요. 제가 꿈꾸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작업에 내세운 허구의 인물들은 실은 허구가 아닐지도 모르죠. 저는 차갑고 이성적인 편인데, 정작 저는 그런 성격이 만족스럽지 않아 반대의 모습을 동경해왔아요. 아내는 종종 “작업 속에서 사람 좋은 척한다”고 농담을 던지곤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태생적으로 선한 사람과, 악했지만 자신을 깨닫고 선함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 중 과연 누가 더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터뷰를 위해 그동안의 작업을 재차 살펴봤는데, 긴 작품 제목들이 흥미로웠습니다. 가끔은 작품 내용과 단번에 연결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요.
처음 걷는 산길에서 단번에 길을 알기란 어렵습니다. 몇 번쯤 지나야 어렴풋하게 길의 모양이 보이죠. 어쩌면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제목은 일종의 힌트일 뿐입니다. 무제나 숫자로 된 제목도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작동할 수 있어요. 저는 되도록 친절한 방향으로 제목을 짓고자 합니다. 긴 글이 짧은 글로, 짧은 글이 한 줄의 제목으로 남습니다. 제목을 정할 때 보는 이의 경험을 염두에 두지만, 소재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작품은 어떤 이름으로든 불려야 하기에 힌트로 활용하려고 해요.
작품과 연관된 에세이가 곁에 있으면 빠르게 공감할 수 있지만, 없으면 간혹 미로에 빠지기도 해요. 그럴 땐 제목만 보고 ‘인간다움으로 돌아가라는 것이겠지?’라는 판단을 내리고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옷이나 자동차를 고를 때 저마다의 기준과 취향을 가지고 있잖아요. 특별히 배운 적은 없어도 꾸준히 보고 경험하는 동안 자기만의 미감과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죠. 무언가를 멋지거나 촌스럽다고 인식하는 감각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창작물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감각은 오랜 시간 흐름을 따라가며 형성되고, 또 어떤 감각은 찰나의 인상이나 생소한 조합 속에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그런 묘한 뉘앙스들을 모아 자신만의 경험과 조합하고, 그로부터 또 다른 의미를 유추합니다. 전시실에 에세이를 놓은 건 이번 전시가 두 번째였어요. 기실 에세이를 전시실에 공개하는 건 꽤 망설여지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친절한 해설서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유로운 해석을 제한하는 장치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를 둘러싼 반응도 호불호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금속·나무·모터·실·철 등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서 사람의 손때나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점도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담아낸다고 할까요?
저는 소박한 대상에 끌려요. 꼭 저렴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그 본질을 알고 익숙하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사용하는 로우테크low-tech 재료는 특별하진 않아도, 기억의 끝자락에 스며드는 힘이 있습니다. ‘나도 해 볼 수 있겠다’, ‘충분히 따라 해 볼 수 있겠다’라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에요. 처음 가는 소모임에서 늘어난 티셔츠나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편안해지잖아요. 반대로 정장을 입고 있으면, 괜히 긴장되고요. 제 작업도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으면 합니다. “저건 나무와 실이구나. 그런데 움직이네?” 하고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사용하는 기술도 소재 선택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기술을 ‘사랑’에 비유하곤 해요. 연기에 빗대자면 화려한 연기는 쉬워 보여요. 하지만 어설프고 바보 같은 연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미묘한 불완전함 속에 치밀한 계산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죠. 최신 장비와 기술을 몰라서 외면하는 건 아니에요. 인터랙티브한 제어와 서보 모터의 섬세함도 구현할 수 있지만, 실험에 실험을 거쳐 제 작업에 어울리는 건 로우테크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때때로 능숙하지 못한 이에게 작업을 부탁하기도 해요. 삐뚤빼뚤 실을 감고, 투박한 방식으로 금속 구조물을 묶는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정성과 단단함이 제가 건네고 싶은 조형의 감정이거든요. 제 작업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안정적으로 서 있지?”보다, “여러 번 묶어 튼튼하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으면 합니다. 불완전하고 서툰 손길, 낮은 기술과 단순한 재료 안에 담긴 애틋함, 저는 그것을 ‘사랑의 기술’이라 부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밭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아버지와의 추억을 돌아보는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2024에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시퀀스가 오버랩됐어요.
아직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웃음) 작업은 물·바람·태양이라는 필수 요소와 씨름하며 체념하고 또 성장해나가는 아마추어 농사꾼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세 가지 요소는 넘쳐도 부족해도 곤란한 것들이잖아요.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에는 행복과 긴장감, 배부름과 배고픔, 피곤함과 활기 같은 상반된 감정의 진폭이 반복되며 스며 있습니다. 2017년에 쓴 소설과 아내가 가꾸던 작은 텃밭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업은 ‘흔적’을 매개로 타인의 상태와 감정을 짐작하는 우리의 일상을 비춥니다. 출근길에 헝클어진 뒷머리 하나로 누군가의 아침을 그려보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아내가 개킨 빨래가 엉뚱한 곳에 놓인 걸 보며 그날의 고단함을 헤아리는 식의 짐작이요. 전시실에 작품을 설치할 때도 구체적 형상 없이 몇 개의 작대기만으로도 누군가의 감정과 상황을 짐작하며 곁에 있는 사람과 시선을 나누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작업을 수놓은 전구는 희망, 기다림 등 감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는 것 같아요. 제 작업에서 빛은 곧 희망입니다.
어두운 방 안에 아침 햇살이 들어오듯, 전구의 따뜻한 빛은 사람 마음속의 작은 불빛과 닮았어요. 그것은 연민이나 호기심처럼 삶을 이어가게 하는 동력이 되죠. 예전에 전구 회사 대표님께서 하신 말이 있는데, 여전히 긴 여운을 남깁니다. “가장 중요한 공간에는 아날로그 전구를 켜세요.” 이후 글을 쓰는 책상과 아이 방에 아날로그 전구를 켜두고 있는데요. 전구가 광원을 넘어, 마음의 파장을 다독이고 감정을 조율하는 것 같습니다.
전시를 감상하는 동안 작품과 작품이 벽면 위에 그려낸 가느다란 선으로 연결된 점을 발견했어요. 개별 작품에선 각각의 요소가 실로 이어져 연장선처럼 보였죠.
저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해요. 그 연결은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과 역할에서 비롯됩니다. 가령 기자라는 직업은 서로 다른 회사에 소속돼 있어도 공통의 문제의식, 즐거움, 은어 등을 공유하잖아요. 저 역시 아버지이자 선배 작가, 통신사의 고객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 속의 역할들은 끊임없이 겹치고 생겨나며,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연결의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 같은 연결이 언제나 곧고 매끈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구불구불한 분필 자국처럼 불완전한 형태일수록 인간다운 진정한 ‘닿음’이 일어난다고 믿어요.
양정욱,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 드로잉, 2024, 나무, 모터, 전구, 실, 철, 300×700×300cm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마감을 목전에 두고 동료들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 때문에 늘 신작에 특별한 애착이 생깁니다. 특히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와 <서로 아껴주는 마음>2024은 작업실 안에서 불과 1미터 남짓한 거리를 두고 동시에 작업한지라 감정과 기억이 진하게 남아 있어요. 무엇보다 두 작업 모두 ‘아버지’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있어서 감정선마저 서로 닮았고요.
2013년부터 2015년까지의 작업을 시작으로 작품 규모가 점점 커지고, 노동과 생계라는 소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더군요.
졸업하면서 넓은 공간을 지원받았고, 갤러리와도 연을 맺었으며, 레지던시에도 입주했습니다. 물리·경제적 환경이 안정되면서 작업의 외형과 규모가 자연스럽게 커졌습니다.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이를 담아내는 조형의 조건이 달라진 셈이죠. 초기 작업은 유난히 얇은 구조가 많았어요. 좁은 작업실 문과 가파른 계단을 지나야 했기에 겹겹이 얇은 레이어를 쌓아야 완성할 수 있도록 작품을 설계했습니다. 한편, 결혼과 육아는 작업의 스펙트럼을 넓혀주었어요. 최근 둘째 딸을 품에 안고 인터뷰 사진을 촬영하곤 하는데, “가정을 꾸려도 작가로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예요. 요즘 특강과 인터뷰에선 스스로 ‘미술 업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요.(웃음) 개인사업자로서 수입, 세금, 계약 등을 책임져야 작가라는 직업이 잘 굴러간다는 것을 공유하는 데 의의가 있어요. 실제 특강에서 제 작업 설명보다 작가로서 살아가는 법, 직업인으로서의 자세 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잦습니다.
작업과 삶 모두 ‘균형’이라는 키워드로 귀결되네요.
작업이든 삶이든 출발점은 마음에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엔 넓어 보이던 공간도 익숙해지면 좁아지듯, 어떤 역할을 수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지치고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죠. 이러한 변화 또한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서구식 균형이 하루를 일정하게 나누는 직선형 구조라면, 제가 말하는 균형은 쓰러질 듯 돌아가는 원반을 손으로 끊임없이 조정하며 중심을 잡는 불안정한 상태에 가깝습니다. 숫자처럼 정확히 맞추려 하기보다는 미세한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찾아가는 움직임 자체가 진짜 균형 아닐는지요. 비틀거리더라도 부단히 도전하려는 태도에서 저는 인간의 근본적인 품격을 발견합니다.
드로잉·조각·글쓰기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다음 전시에서는 어떤 형태로 작업을 펼칠 계획인가요?
주제는 유지하되, 형식은 아직 물음표입니다. 에세이를 배치한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 방식에 관해 관객은 “이해가 쉽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미술 관계자 사이에서는 해석이 고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어요. 그래서 다음 전시에서도 글을 둘지, 아니면 작품만으로 관객을 끌어당길지를 두고 고민 중입니다. 사실 저는 현대미술보다는 대중미술을 지향합니다. 영화를 본 뒤 “이번이 더 낫다”, “이건 조금 어려운데” 같은 대화가 오갈 수 있는 그런 작업이요.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 개막 전 미술관을 경비하는 분께 제 작업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며칠 후 그분이 지인을 데려와 도슨트를 자청하시더군요. 제 작업이 누군가에게 쉽게 닿을 수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이는 아이를 키우면서 확고해졌습니다. 언젠가 제 아이가 길에서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는데, 휙 지나치는 어른을 보며 ‘이게 맞는 세상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다정한 세계를 선물하고 싶다’는 다짐이 생겼죠. 앞으로 제 작업이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닿는 자리가 됐으면 해요. 나아가 선배·동료·교사와 같은 어른들이 보고, 다정한 미래를 함께 그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박이현 럭셔리 매거진 피처 디렉터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