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부터 완성까지 오로지 나의 손으로. 가구 매장 이케아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가격이나 디자인,
품질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서 완성해 보도록 하는 데 있기도 하다(그 점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물건을 직접 만들자는 ‘메이커스 운동’이 일어난 것도, 뜯어볼 수 없도록 스마트폰을 만드는
애플과 삼성 등에 ‘수리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본능에 닿아 있다.
독일에서 오르겔을 만나다
이 작품을 만들면서 우크라이나가
내내 마음에 있었어요. 그래서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잎사귀를 그려 넣었습니다.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 우리는 이들을 ‘장인’이라고 부른다. 과거부터 장인의 영역이 넓었던 유럽에서는 장인을 존중하는 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다. 특별히 독일에서는 서양 악기의 정점이자 ‘악기의 왕’(모차르트)이라 불린 오르겔Ọrgel, 영어로는 오르간(Organ)을 만드는 장인을 여전히 존경한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오르겔을 단순히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처럼 ‘짓는다bau’는 의미로 ‘오르겔바우Ọrgelbau’라고 한다. 오르겔을 만드는 장인, 즉 오르겔바우마이스터Ọrgelbau Meister는 건축 기술과 공학 지식, 예술성을 두루 갖춰야 해서 ‘장인 중의 장인’으로 꼽힌다.
국내에도 오르겔을 만드는 이가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적잖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유일하게 국내에서 활동하는 오르겔바우마이스터 홍성훈. 그는 1997년 독일 오르겔바우마이스터 국가시험을 통과하고 마이스터 자격을 받았다. 12년간 독일에서 오르겔 제작을 배운 끝에 일궈낸 성과였다. 그는 1998년 귀국한 후 현재까지 22대의 오르겔을 만들었다.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최근에 완성한 오르겔이 있는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옥이었다. 사옥 10층에는 작은 성당이 있다.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방송하는 <TV 매일미사>를 촬영하는 작은 스튜디오 같은 곳이다. 그곳 한 켠에 오르겔이 들어섰다. 작품번호는 23번(22번 미제작). 지난 1월 4일 신부의 주례로 오르겔에 대한 축복식이 진행됐다.
이 오르겔은 신자인 김종수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단양지회장이 1억 원을 기부해 만들어졌다. 이 파이프오르겔은 정결함을 뜻하는 흰색과 영광을 상징하는 금색, 두 가지를 사용했다. 오르겔 전면 상단부에는 금빛 올리브 잎 조각이 배치됐다. 안명희 화가가 디자인하고 정유채 조각가가 새겼다. 가로 1.72m, 높이 2.4m로 무게는 800kg에 이르는 오르겔에 214개의 파이프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홍 마이스터가 만든 작품 중에서는 중간 정도 크기에 해당한다. 그는 14m에 이르는 작품을 만든 적도 있다. 이번 오르겔은 제작 기간이 1년으로 길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는 가장 힘들게 만든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이 작품을 만들면서 우크라이나가 내내 마음에 있었어요. 수만 명이 죽어가는 전쟁으로 마음이 굉장히 아팠죠. 그래서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잎사귀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가 우크라이나를 가깝게 여긴 것은 추상적 인류애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지난 2017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있는 ‘생명의말씀교회’에 작은 오르겔 ‘바람피리’를 제작해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첫 수출품이었다. 현재는 우크라이나 모처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최근에 완성한 23번 오르겔.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며 평화의 상징 ‘올리브 잎사귀’를 그려 넣었다.
국내 유일의 파이프오르간 제작자가 되다
20대의 그는 어떻게 오르겔 제작에 도전할 엄두가 났을까? 복잡한 오르겔 제작 방법을 배우기란 성공적으로 끝마칠지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제작을 배운 뒤에 어떤 길을 밟아나가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한국인 마이스터 선배도 존재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에서 1년간 활동하다 한계를 느끼고 클래식기타를 배우기 위해 198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 그를 독일 뮌스터에서 친해진 한국 음악 유학생이 오르겔 제작을 배우지 않겠느냐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한국에는 오르겔을 만드는 사람이 없으니 해보는 게 어떠냐고 아침저녁으로 세뇌를 하더라고요.” 한동안은 무시했다. 하지만 1년쯤 기타를 배우다 회의감이 들었을 때 오르겔이 생각났다. 친구를 따라 오르겔 제작소에 갔다가 결국 1987년 오르겔 제작에 발을 들이게 됐다. “제 머릿속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난 거죠.”
오르겔을 제작하려면 음악적 재능이나 손기술이 뛰어나야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장 절실한 것은 체력과 끈기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에 매달려야 했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독일인 동료들보다 빵을 더 많이 먹었다. 그는 “다르게 말하면 ‘노가다’”라며 웃었다.
고된 배움에 길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하나의 오르겔을 완성하면 생각이 바뀌었다. 잘린 나무, 벗겨진 가죽, 차가운 철. 죽은 재료가 모여 새롭게 생명을 얻을 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오르겔의 첫소리를 들으면 이것이 부활의 악기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거예요. 그렇게 ‘한 번만 더 해야지’ 하다 보니 25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인이 오르겔 제작법을 배운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독일인도 적지 않았다. 비자를 심사한 공무원은 “400년이 넘는 독일의 오르겔 제작 기술을 외국인이 10년 만에 배워서 오르겔을 만드는 게 가능하냐”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달랐다. 마이스터가 돼 귀국하는 제자에게 “홍오르겔을 만들라”고 말했다. 귀국 후 그의 작업은 이 말의 진의를 깨닫고 실현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오르겔의 외형에 한국의 형태와 색을 입히다
오르겔의 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듣고
이런 멋진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월오봉도 오르겔 제작을 의뢰하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장 큰 악기인 오르겔은 그 크기부터 신을 상징했다. 오르겔의 기원은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물오르겔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시대에 교회가 대형화하면서 오르겔도 점점 커졌다. 오르겔에서 쏟아져 내리는 장엄한 소리에 사람들은 자연히 신을 떠올렸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음부터 가장 낮은 음까지 다 내는 악기예요.”
오르겔이 수많은 악기의 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만물을 품은 신을 연상케 했다. 오르겔 건반 옆에 배치된 손잡이나 버튼을 ‘스톱’이라 한다. 가까이서 보면 플루트, 클라리넷, 트럼펫, 첼로 등 온갖 악기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라고 할까? 오르겔로 낼 수 있는 악기의 소리는 700개가 넘지만 그 모든 소리를 담은 오르겔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미국 애틀랜틱시티의 보드워크홀과 유럽 최대라는 독일 파사우시의 성스테판 성당 오르겔은 각각 381개, 203개의 스톱을 갖추고 있다. “보드워크홀 오르겔의 파이프 조합의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보면 최초의 인류인 아담부터 연주를 시작했어도 아직 다 못했을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예요. 그래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신의 영역에 있는 악기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그런 오르겔을 한국의 소리가 담기도록 만든다니. 그에 대한 반응이 기대 또는 무시로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론의 조명도 많이 받았지만 “오르겔을 망치지 마라”며 극언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악기 제작자가 자국 고유의 소리를 찾아가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들은 오르겔의 소리는 나라마다 달랐다. 독일 오르겔은 정확하고 명쾌했다. 하지만 칼같이 날카롭게도 들렸다. 오히려 그는 프랑스에서 들은 오르겔 소리에 끌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프렌치 로맨틱 사운드. 홍 마이스터는 프렌치 로맨틱에 한국 악기에서 들리는 허스키함을 블렌딩했다. 특히 대금의 허스키한 중저음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나라마다 오르겔이 내는 소리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홍 마이스터가 찾은 답은 ‘언어’였다. “음악은 언어와 직결됩니다.” 우리의 귀에 독일어는 주로 거칠게, 프랑스어는 유려하게 들린다. 그런 모국어를 사용하다 보면 악기의 소리 또한 비슷한 질감을 표준으로 삼게 되는 것 아닐까?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자국에서 오르겔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타국 메이커에게 오르겔 제작을 선뜻 맡기지 않는다. 그 이유도 일정 부분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홍 마이스터는 생각한다. 외양에 한국의 형태와 색을 입히는 작업이 서서히 진행됐다. 전통 격자창을 입혔고(성남 선사교회), 뒤주 형태에 에밀레종의 구름 형상을 그렸다(대한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심지어 오르겔을 해체하고 연주대와 연주자가 필요없게 만들기도 했다(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마침내 그는 13번째 작품에서 서양의 형태와 완전히 단절했다. 그가 지어낸 것은 한 폭의 동양 산수화였다. 그가 “새롭게 시작하는 첫 오르겔”이라고까지 표현한 ‘산수화 오르겔’(국수교회)이었다. 연한 풀색으로 칠한 직사각형 액자 형태에 세 개의 산, 강, 하늘, 은하수, 뻐꾸기의 형태를 구현했다. 교회가 위치한 경기도 양평의 자연을 담은 것이다. 오르겔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남다른 모양이었다.
일월오봉도 오르겔
‘일월오봉도 오르겔’을 꿈꾸다
한국의 소리를 내는 오르겔을 만드는 데 심취한 그가 그에 맞는 음악을 찾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는 2021년부터 매해 11월 경남 하동군 지아프아트센터와 지리산국제오르겔음악제를 열고 있다. 국내 작곡가들이 새로 작곡한 오르겔 곡들이 그가 소장한 홍매화오르겔로 연주된다.
특히 올해는 그의 오랜 바람이 이뤄지는 해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직접 작곡한 ‘여민락’을 편곡해 홍매화오르겔과 국악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박영란 수원대 작곡과 교수가 1시간짜리로 편곡 작업을 하고 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후원으로 오는 5월 15일 청와대 안뜰에서 공연이 열린다.
오르겔을 만드는 작업도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새 오르겔은 강화도에 위치한 카페 ‘멍때림’에 세워질 교회당에 들어간다. 여기서는 분기별로 합창단과 오르겔이 함께 연주회를 열 계획이다. 여의도순복음강동성전에는 24번 오르겔을 작업하고 있다. 일은 끊이지 않았지만 재료 욕심을 내고 직원들 급여를 주고 나면 번번이 예산을 초과하기 일쑤다.
그는 앉아서 의뢰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22번은 육군논산훈련소 교회당에 짓겠다며 미리 작품 번호를 빼놨다. “장병들이 찬송가 ‘호산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저기에 오르겔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훈련소 교회에서 의뢰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먼저 제안하는 거죠. 저는 개척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올해로 그의 나이 64세다. 54세에 산수화 오르겔을 지은 이후 27년간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홍오르겔’을 만들고 81세에 은퇴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앞으로 남은 17년, 그가 반드시 만들고 싶은 오르겔이 있다. ‘일월오봉도 오르겔’이다. 일월오봉도는 조선 시대 왕의 의자, 즉 어좌 뒤편에 펼쳐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이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짙은 청색 하늘에 뜬 붉은 해와 하얀 달. 여기에 아쟁, 대금, 퉁소, 나각, 단소, 해금 소리가 나는 파이프를 앉히는 꿈을 꾼다. 그의 꿈을 이해하고 함께할 이가 나타날까?
“한국 영화와 드라마, K-팝으로 한국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나라가 됐잖아요? 더 다양한 한국의 문화를 되살리고 싶어 하는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오르겔의 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듣고 이런 멋진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월오봉도 오르겔 제작을 의뢰하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 김지훈_《한겨레》 기자 | 사진 공간느루 | 사진 제공 홍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