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무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를 절대 잊지 못한다.
타고난 성음, 담백하면서도 우아한 연기, 압도적 무대 매너는
판소리를 잘 모르는 관중의 시선마저 단숨에 사로잡는다.
국내외 수많은 무대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쌓아 올린 안숙선 명창이
지난 9월 판소리 〈춘향가〉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인생과 음악 철학, 한국 전통음악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묻고 경청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술가의 길
Q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소리에 입문하시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A 아무래도 가정환경이 영향을 많이 끼친 것 같아요. 집안 어르신들께서 국악을 많이 하셨어요. 국악 집안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어머니는 예술을 전혀 안 하셨어요. 어머니는 뒤에서 집안일을 하시면서 가족 어르신들을 도와드리는 일을 많이 하셨죠. 강백천 선생님, 강도근 선생님이 외당숙이시고요. 강순금 선생님은 이모세요. 어르신들 모두 당대 내로라하는 명인이셨죠. 제가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 불렀나 봐요.(웃음) 이모가 옆에 계시다 보니까 〈남한산성〉이나 〈진도아리랑〉 같은 것을 귀로 듣고 다 배웠거든요. 그러다 공연도 자주 다니게 됐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소리에 입문하게 됐어요.
Q 많은 뛰어난 스승으로부터 다양한 음악을 배워오셨는데 어떤 것들을 배우셨고, 어떻게 연습하고 훈련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어릴 적 강도근, 강백천, 주광득 등 여러 선생님께 판소리, 민요, 농악 등 다양한 음악을 배웠어요. 어찌 보면 다 실전 음악이었죠. 당장 합창이나 창극 등 무대에 올라 불러야 하는 음악이 많았어요. 공부가 많이 됐죠. 잘 아시다시피 향사 박귀희 선생님께 가야금, 가야금병창, 민요 등을 배우면서 우리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김소희 선생님께 만정제 판소리를 배웠고요. 그뿐만 아니라 정광수, 성우향, 박봉술, 오정숙 선생님 등께도 배웠어요. 지금 생각하기에도 저는 스승 복이 많았어요. 스승님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습은, 그냥 열심히 한 것 같아요.(웃음) 오래 쉬다 보면 걱정도 되고 불안해져요. 소리 연습을 해야 후련하기도 하고 걱정이 덜 돼요.
Q 스승의 가르침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으신가요?
A 예전 선생님들 모두 늘 ‘인간됨’을 강조하셨어요. 사제지간, 친구지간 등 관계에서 지켜야 할 예의, 또 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정갈한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예인이 평소 갖춰야 할 덕목, 차림새나 인간성 같은 거죠. 또 예인이 무대 위에서 지켜야 할 여러 덕목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어요. 언젠가 제가 방송에서 소리를 하다가 뭔가 실수를 하고 그냥 재담을 하며 어물쩍 넘어간 적이 있어요. 당시 김소희 선생님께서 건강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계셨는데 그 방송을 보시고 편지를 적어 훗날 저에게 주셨어요. 편지 안에는 ‘모두가 좋다고 해도 단 한 명이라도 아니라고 하면 그 공연은 아닌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 빽빽이 적혀 있었어요. 편지를 보면서 어찌나 얼굴이 달아올랐는지 몰라요, 부끄러워서요. 그리고 정말 감사했죠. 그렇게 꼼꼼하게 확인해서 알려주시고.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합니다.
남다른 음악 철학
Q 한국 전통음악 중에는 다양한 갈래의 성악이 있습니다. 그중 판소리는 다른 성악과 어떻게 다른가요? 그리고 판소리만이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요?
A 판소리는 분명히 음악 장르지만 동시에 문학 장르이기도 합니다. 가사를 보면 문학적 가치가 상당해요. 또 혼자 하는 일인극이기도 하고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악 반주도 없이 오로지 북 반주 하나에 맞춰 연기와 감정을 표현해 내는 거죠. 판소리에는 우리 삶과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듣는 분들이 공감하며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면서 들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창자와 청자가 서로를 함께 느낀다, 음악에 그보다 더한 매력이 있을까요? 실제로 우리 음악에는 추임새라는 것이 있는데요. ‘좋다~’ ‘얼씨구~’ 하는 것이 관객이 창자와 함께 소통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Q 판소리 소리꾼에게 좋은 목, 좋은 소리는 어떤 것을 의미하나요? 다른 성악에서의 좋은 목, 좋은 소리와 다른가요?
A 좋은 목이나 좋은 소리는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든 것 같고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판소리 목은 관리하며 만들어간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목을 가졌어도 소리꾼은 늘 목을 풀어야 해요. 하루만 풀지 않아도 생목(판소리에서 소리에 공력이 부족해 트이지 않은 상태의 성음)이 나오고 그러거든요. 늘 풀어두고 관리해야만 좋은 목을 유지할 수가 있죠.
Q 그동안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여러 판소리 완창 무대를 선보이셨습니다. 판소리 다섯 마당 완창 무대에 매해 꾸준히 오르던 시기도 있었고요. 판소리를 완창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소리꾼에게 완창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완창이란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무대라고 생각해요. 완창하기 위해 정말 오랜 기간 배우고 연습해야 하거든요. 중간중간 심적으로 많이 힘들기도 하고요. 정말 어렵고 힘든 무대지만 마치고 나면 참 뿌듯하죠. 물론 한편으로는 항상 아쉬운 마음도 들고요. 그러면서 또 공부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증명하고.
Q 좋은 소리를 하기 위해 평소에 어떻게 연습하시고 체력을 관리하시나요?
A 그냥 목을 아끼는 데 최선을 다해요. 늘 목을 따뜻하게 하려고 하고요. 지금도 찬물은 안 먹어요. 몇 년 전까지는 집에서나 차에서나 에어컨도 안 틀었어요. 가족이나 같이 다니는 분들이 고생하셨죠. 목에 수건을 감는 것도 도움이 돼요. 운동도 중요하고요. 젊을 때는 늘 걸었어요. 이 부분은 많은 분이 아실 거예요. 저는 공연 전에도 대기 시간에는 공연장 앞을 자주 걸어요. 또 평소에는 산에도 많이 가고요. 산에 가면 소리를 흥얼거리며 걷게 되니까 일석이조랄까요? 참 좋았어요.
전방위적 음악 활동
Q 시대의 변화와 함께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자체가 국악계의 중요한 역사라는 생각도 들고요.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셨고, 여러 작품에서 주연을 맡으시며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국립극장 전속단체 단장 겸 예술감독 이력도 가지고 계시죠. 여러모로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이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이유도 함께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A 아무래도 창극단에서 젊은 시절 많은 작품을 하고 배우면 서 성장했어요. 판소리는 원래 일인극이거든요. 내가 춘향이도 되고, 이몽룡도 되고, 변사또도 되고, 방자도 되고, 월매도 되는 거죠. 창극은 판소리가 기본이 되지만 연기, 음악, 무용이 어우러지는 우리 음악 종합세트라고 보시면 돼요. 또 관객이 즐기기에 아무래도 판소리보다 창극이 더 쉽고 재미있죠. 뮤지컬이나 오페라만큼 예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모자람이 없어요. 기억에 남는 작품은, 글쎄요? 생각해 보면 작품 하나하나 모두 기억에 남아요. 예전 허규 선생님 작품들도 기억에 남고요. 최근 작창했던 〈트로이의 여인들〉은 무대 밖에서 보니 더 남다르더군요. 요즘에는 출연보다 창극 관람을 많이 하는데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Q 해외 무대에도 무수히 오르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공연은 무엇인가요?
A 2002년과 2003년에 파리가을축제, 영국 에든버러에서 〈춘향가〉 완창을 했는데 그때가 기억에 남아요.
특히 관객의 호응이 기억에 남아요. 〈춘향가〉를 완창하려면 정말 길거든요. 솔직히 많이 걱정했어요.
우리말도 모르는 외국 관객이 5~6시간 우리 소리를 끝까지 듣기나 할까? 감동을 받을까? 그런데 정말 놀랐어요.
무대에서 노래하면 관객 표정까지 다 보이거든요. 그런데 슬픈 대목에서는 훌쩍거리고 웃긴 대목에서는 히죽히죽 웃더라고요.
‘아, 이거 음악으로 통하는 거구나.’ 결국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몇십 분 동안 기립 박수를 보내고 몇 차례나 다시 무대에 나가
인사를 하고 나서야 공연이 끝났어요.
Q 다국적 재즈 그룹 레드선Red Sun·정명훈·정명화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도 협업을 많이 하셨는데, 한국 전통음악과 다른 장르가 만날 때의 어려운 점 혹은 즐거운 점은 무엇인가요?
A 네. 협연도 많이 했죠. 김덕수 선생님과 레드선, 정명훈 선생님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했고,
최근에 정명화 선생님의 첼로 연주와 함께 〈사랑가〉와 〈흥보가〉를 협연했습니다.
김덕수 선생과는 아주 어릴 때부터 누님, 동생 하면서 알고 지냈어요.
어느 날 저한테 와서 우리 음악도 다른 장르와 협업을 해봐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내던 중 갑자기 연락이 와서 어디 연습실 같은 데서 외국 재즈 밴드 분들과 만난다고 어서 오라고 하더라고요.
가서 각자 자기 악기 연주하고 저는 소리하고 그랬어요. 악기 소리를 들어보니 저는 휘모리가 좋겠다 싶어서
〈수궁가〉 중 ‘좌우나졸~’ 시작하는 대목을 불렀죠.
그랬더니 즉흥으로 막 거기에 음악을 붙이는 거예요. 대단하대요. 물론 최종 작품은 많이 손봤는데 처음은 그렇게 즉흥적으로 시작했어요.
사실 협연은 늘 어려워요. 서로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래도 결국 음악으로 통하더라고요.
워낙 본인 장르에 대가이신 분들과 협연하기도 했고, 그래서 상대 음악을 이해하려는 배려가 있었어요.
타 장르와 협연하면서 제일 좋은 점은 결국 주목받는다는 거예요.
요즘은 젊은 분들이 많이 노력해 우리 음악이 대중 안으로 제법 스며들어간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게 좀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협연을 하면 그만큼 매스컴에도 많이 나오고 관심도 많이 가져주시고 결국 우리 음악을 더 알릴 수 있어서 좋아요.
예능보유자의 삶
Q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신 후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기분이 어떠신지요? 그리고 예능보유자 지정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A 너무 감사하죠. 특히 우리 음악하시는 선후배 여러분께 감사드려요. 그분들의 이해와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제 열심히 하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과거 선생님들께서 저에게 많은 것을 전해 주셨고, 저는 이제 그것을 후배들에게 다시 전달하는 위치에 서게 됐어요. 힘닿는 데까지 우리 소리를 올곧게 전할 생각입니다.
Q 한국 전통음악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우리는 한글을 쓰고 또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 국을 먹잖아요? 그게 우리 문화니까 그런 거죠.
지극히 당연한 거죠. 왜 그러느냐, 어떤 가치가 있느냐 묻지 않죠. 우리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문화잖아요.
당연히 알고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 많은 분께는 낯선 음악인 것 같아요.
일단은 알려야 합니다. 우리가 바둑 두는 법을 알아야 바둑대회 방송을 봐도 재미가 있지, 모르는데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우리 음악도 간단하게라도 배우고 해봐야 해요. 그래야 들을 때 재미가 있죠.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자꾸 접하고 한 가락이라도 배워두면 우리 음악을 듣고 볼 때 진정으로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글 성혜인_음악 평론가.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사진 제공 안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