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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8월호

무용가 박명숙나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
나에게 어울리는, 나만의 춤을 추겠다는 꿈은 그녀를 현대무용의 길로 나아가게 했고, 모든 이들의 일상 속에 예술이 숨 쉬도록 하고 싶다는 바람은 더 넓은 세상에 다다르게 했다.
나이가 믿기지 않게도 여전히 꿈을 꾸는 데는 비결이 있을 터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원초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면 선대의 경험을 추측하려 노력한다. 그때는 어땠을까, 그 시절에는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또 어떻게 그런 시도를 하게 됐을까. 기록으로 남겨진 과거는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증명하지만 당시의 생각까지는 미처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무용 1세대’ ‘무용가 출신 대표이사’ ‘최연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같은 화려한 이력과 나란히 이어지는 작품 목록에 감탄을 넘어 의문까지 들었다. 흰 종이에 가득 채워진 까만 글씨가 치열한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마주 앉은 이의 표정은 너무나도 말갰다. 칠순을 앞둔 예술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무용을 했어요. 제가 6·25 전쟁 때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부터 여러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셨죠. 걸음마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게 무용이었어요. 국립국악원에서 무용을 배웠고, 그림도 하고, 피아노 레슨도 받았죠.”
피리 연주자이자 무용가로 이왕직아악부에서 아악사까지 지낸 김보남에게 한국무용을 배운 박명숙은 진명여자중·고등학교에 진학해 김정욱에게 발레를 배우게 된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장르와 미술·음악 등을 접한 덕분에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도 넓어졌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새로운 춤이 있다고 해서 연습하는 걸 봤는데, 그게 현대무용이었어요. 내가 이런 춤을 춰야 나에게 맞는 예술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스스로 조숙했다고 회상하는 어린 시절, 박명숙은 이미 만들어진 예술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예술이 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에서 한창 배운 발레는 서양인에게 적합하고 익숙한 춤이었기에 “내게 어울리는 춤”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창작으로 이어졌다. “내 춤은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것.
“현대무용을 처음 접하고 ‘이거다’ 싶었죠. 연습을 열심히 해서 테크니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없었어요. 나만의 새로운 작품, 한국인인 내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모습을 춤으로 만들면 그게 정말 예술가의 역할이 아닐까?”
호기심 많고 탐구하기 좋아하는 박명숙의 예술 활동에 화력을 더한 건 친구들이었다. 대학 시절 만난 다른 전공의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며 창작 활동에 열을 가했다. 그녀가 공연을 올릴 때면 첼로를 하는 친구가 무대에서 실황으로 연주를 더했고, 미대를 다니는 친구는 공연 의상을 만들어 선물했다. 그녀 역시 이들의 연주회와 전시회에서 퍼포먼스를 펼쳤다. 함께 어울린 다양한 전공의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창작 작업에 자극을 주는 이들이다.
1978년, 서른을 앞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박명숙댄스시어터를 창단했다. 그에 앞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무용단으로 기록되는 컨템포러리무용단의 창단 멤버로도 활약해 온 그녀는 쉼 없이 작품을 발표했다. 소품에서부터 장편 작품까지 지금까지 안무한 작품이 300여 편에 이르고, 그중 주요 레퍼토리는 수십 년 동안 재공연을 반복하고 있다.
“1993년에 소설 <혼자 눈뜨는 아침>을 바탕으로 안무한 작품을 발표했어요. 소설 속 주인공이 당시에 저와 같은 나이였는데, 마치 주인공이 내 안에 들어온 것 같았거든요. 당시 이 소설이 출간되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는데, 무용 작품으로 발표하면서 일반 대중에게 춤이 친근하게 다가가는 고마운 계기가 됐죠. 꽤 장기간 공연했어요.”
작품에 스며든 문학적 감성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대변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1980년에는 공간사랑에서 월례로 진행된 ‘현대무용의 밤’ 무대에 오르며 1980년대에 활발했던 소극장 운동에 힘을 더했고, 일반인들에게 현대무용을 알리는 데도 힘썼다.
“젊은 시절에는 항상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환상적이고 꿈에 나올 법한 이야기만 다룬다고 저를 ‘판타지 박’이라고 부르기도 했죠.(웃음) 특히 김영태 선생님의 시와 작품 제목을 두고 만든 작품이 많았어요. 30대까지 그랬고, 4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각이 많이 성숙해졌죠.”
고전적인 어머니상을 그려낸 <에미>(1996),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룬 <유랑>(1999)과 고구려 건국 신화 시리즈 <황조가>(1991) 등은 한층 확장된 그녀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여성으로서의 삶과 애환을 다룬 이 작품들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도 꾸준히 공연되며 근래 들어 변화해 온 우리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증조할머니서부터 저까지 서울에서 태어났거든요. 서울이라는 정원에서 여성이 살아온 흔적과 생각을 모아 만든 게 <에미>예요. 이 이야기는 해외에서 공연할 때도 반응이 너무나 열광적이었어요. 피부색이 달라도 생각하는 건 똑같더라고요. 1990년대에 탄생한 작품이 20년이 지나서도 유효한 건 우리네 어머니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꿈꾸는 생을 위한 ‘우리 삶의 예술’

무용가로서의 시간만큼 박명숙의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교육자로서의 시간이다. 1981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임용돼 2015년 정년 퇴임하기까지, 이전의 중·고등학교 교사 시절까지 합하면 어언 40년 넘게 후학을 양성해 왔다.
“저는 제자들에게 ‘이건 아니다’ ‘이건 하지 말아라’ 한 적이 없어요. 제 부모님 역시 제가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까요. 1981년, 교수가 될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모두 다 무용을 할 필요 없다. 무용과를 졸업한 학생 전부가 무대에서 춤을 춘다면 공연 기획은 누가 하겠어요. 그러니까 무용을 전공한 이들의 직업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물론 무용은 한다는 전제하에서. 공부를 잘하면 이론을 가르칠 수 있고, 봉사활동을 좋아하면 무용을 기반으로 힐링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겠죠. 무용을 깊이 들어가 보면 교육이 있고, 기술이 있고, 과학이 있어요. 무엇이든 가능하죠.”
무용을 중추로 삼되 다방면으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것이 교육자로서의 지향점이라면,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모두가 예술을 경험하고 가까워지도록 하는 것은 기획자이자 행정가로서의 목표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성남아트센터 대표이사를 지내며 시민들이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내놓았고, 클래식 음악에 기울어 있던 공연 역시 다원예술부터 연극·무용·어린이극까지 기획의 다양성을 보강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한 것은 어린이를 위한 예술교육이다. 접근해 보지도 않고 우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화예술의 가장 큰 장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용 공연에 관객이 없다고들 하죠. 대부분 무용이 특별한 부류나 관심을 갖는 것이지 나와는 관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티켓을 사서 공연을 보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해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움직여봐야 춤이 무엇인지 알고, 관심을 갖게 돼야 공연도 보러 오겠죠. 누구나 춤을 출 수 있어요. 춤을 춘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움직임을 만드는 건데, 그 움직임이 탄생하는 과정을 어릴 적부터 즐긴다면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예술이 스며들 수 있겠죠.”
그러곤 “일반인이 일상 속에서 직접 예술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나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그것을 예술로 받아들이는 ‘우리 삶의 예술’ 말이다.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이랄까요. 추함까지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자신만의 철학을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해요. 길가에 놓인 돌 하나에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죠. 모든 일상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1980~90년대에 그녀의 이름 앞에는 늘 ‘막달라 마리아’가 붙어 다녔다. 1974년 초연해 무려 40주년 기념 공연까지 연 육완순 안무의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에서 막달라 마리아 역할로 20년간 무대에서 서면서 얻게 된 별명이다. 그 후로도 수많은 수식어가 그녀와 함께했다. 정년을 지난 지금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을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무용 전도사’라고. 너무 종교적인 단어라 별로인데.(웃음) 일반인이 무용을 정말 사랑하게 만드는, 전 국민이 움직임을 사랑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100세가 되는 해에 그 사람들과 멋진 공연을 열고 싶어요.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생기 넘치게 춤추면 얼마나 멋질까요.”
끊임없이 쏟아지는 아이디어, 그리고 그 무대를 상상하는 말간 표정… 어릴 적 꿈 많은 소녀 박명숙의 얼굴이 교차했다.
“저는 매일매일 꿈을 꿔요. 이 나이에 꿈꾸는 사람 별로 없다고 하는데 말이죠. 2003년에 고관절 수술을 했어요. 그전까지 수천 개의 대바늘이 매일매일 온몸을 찌르는 듯 아팠는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니 살아 있는 매 순간이 감사하더라고요. 이후의 생은 선물로 받은 것 같아요. 매일매일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멋지게 연출할까 생각하죠.”
글 김태희_객원 편집위원, 무용평론가
사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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