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 아티스트, 컬러링북을 만나다
언젠가부터 카페에서 다 큰 어른들이 커피 한 잔을 옆에 놓아둔 채 색연필을 꺼내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몇몇이겠거니 했는데 그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어릴 때 문방구에서 팔던 ‘색칠놀이’와 비슷한 책을 펴놓고 있었다. 꼬맹이 시절, 몸집보다 큰 가방을 메고 친구들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꼭 들러 한참을 구경하곤 하던, 공책처럼 생긴
색칠놀이 말이다. 그 안에는 큰 눈망울에 물결치는 긴 머리의 공주님들 대신 유명하다는 프랑스 작가의 그림이 채워져있는 것, 그리고 ‘색칠놀이’라는 유치한 명칭 대신에 ‘컬러링북’이라는 좀 더 멋져 보이는 명칭으로 바뀌어 있는 것 말고는 똑같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편집자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블로그에서 내 작품을 보았다며 컬러링북으로 한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대학에서 섬유예술과를 졸업한 후 섬유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천과 여러 가지 재료를 종합해 작품을 만들어오던 활동과는 많이 달라서 거절하려던
찰나, 서랍장 속의 해묵은 도안들이 문득 생각났다. 수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섬유예술 작품을 만들기 전에는 늘
구상한 내용을 스케치로 남겨놓곤 했는데 때마침 내 서랍장
안에는 그런 도안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판형에 맞게 간단히
수정 작업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서랍장을 열어 예전에 그려둔 도안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니 하나의 스토리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패턴이나 풍경을 단순히 나열한 수많은 해외 컬러링북 사이에서 어쩌면 이것이 내 컬러링북의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정원>(북라이프, 2014)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
컬러링북
<세상의 모든 선물>
(앵글북스, 2015)
수록 작품 중
‘Hold On Tight’.
2
섬유예술 작품
컬러링북의 ‘스토리텔링’이라는 차별점
컬러링북으로 알려지기 전에 나는 섬유와 여러 가지 소재를 가지고 유년기의 동화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섬유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내 작품의 중심 테마는 ‘동심의 세계’다. 인간적인 따스함이 최대한 묻어나게끔 손바느질과 페인팅 등을 결합한 나만의 제작 기법으로 시각예술 작품을 완성했다.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도록
작은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목표다. 소소하지만 가슴 한 켠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나는 유년기의 추억들을 조심스레 꺼내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시각적인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나의 작품 세계에서 스토리텔링은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스토리를 그대로 옮겨온 <시간의 정원>이라는, 차별화된 콘셉트의 컬러링북은 곧바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게 되었다. 처음 출간한 책이 순식간에 서점 종합 베스트
순위에 오르는 믿기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차별점 덕에 주목받아 해외 진출의
길이 열렸고, 북미에서 국내 단행본 역사상 최고 금액으로
판권을 수출하는 일까지 생겼다. 지금은 중국, 일본 및 동남아 국가, 미국?영국?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 남미와 스페인 등 스페인어권 국가, 기타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과 이스라엘까지 거의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해외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서 이러한 기회와 행운이 찾아왔다는 것이 아직도
꿈같이 느껴질 뿐이다.
물론 작가의 길을 걷기까지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장 자신할 수 있는 일은 그림 그리는 것이었지만, 막상 꿈꾸던 일에 도전하기에는 이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무명의 신진 작가가 그림으로만 생활하기는 어려웠기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작품 활동에만 집중할 수 없는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 시기가 결코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나를 알아주고 응원해주는 소수의 컬렉터들, 그리고 이 길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행복한 작가였다.
3 섬유예술 작품<I Left My Heart in SF: Daria’s Chocolate Factory>(2012).
작품 속에서 성장하며 행복을 전하는 ‘소녀’처럼
돌이켜보면 내 작품 세계의 터닝포인트에는 언제나 우연인듯 필연적인 만남이 있었던 것 같다. 컬러링북과의 만남이 그러했고, 소녀와의 만남이 그러했다. 언제부터인가 내 작품 속에는 늘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관객이다. 그녀는 독자로 하여금 순수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작품 속 세상을 탐
험하며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 구실을 한다.
소녀는 또 ‘나’이기도 하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보낸 내 유년기가 그대로 투영된
존재다. 나는 성장했지만 내 마음속의 소녀는 여전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남아서 내가 어른이 되어도 소녀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준다. 그 소녀는 <시간의 정원>에서는 뻐꾸기 시계 속에서 태엽을 감는 붉은 머리 요정과 함께 환상의
시간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시간의 방>(북라이프, 2015)에서는 점차 어른이 되어가는 소녀가 동심을 잃지 않도록, 뻐꾸기 시계에서 현실 세계로 나온 붉은 머리 요정이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줄 마법의 도구들을 뿌려놓는다. 최근에 출간한 세 번째 컬러링북 <세상의 모든 선물>(앵글북스, 2015)에서는
‘행복을 전하는 소녀’가 되어 선물 꾸러미를 세상의 이웃과
나누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환상 여행이 펼쳐진다. 나는 이 책의 스토리 그대로, 세 번째 컬러링북의 국내 인세 전액을 승일희망재단을 통해 루게릭병원 건립에 기부하고 있다. 작가의 삶과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진실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소녀의 이야기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그리고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자리 잡고 앉아 색칠놀이에 열중하는 어른들을 보면 저들의 마음속에도 소녀가 있는 것은 아닐지, 따뜻한 꿈을 꾸게 된다.
- 글·사진 송지혜
-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섬유예술을 공부하고
섬유예술 아티스트,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다.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컬러링북 <시간의 정원>을 시작으로 <시간의 방> <세상의 모든 선물>을 내며 컬러링북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