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 서울 홍익대학교 정문에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를 의미하는 손가락을 표현한 대형 조각상이 설치됐다. 조각상이 설치된 이후 부적절한 상징물을 전시했다며 조각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급기야 6월 1일 새벽에는 한
20대 남성이 조각상을 직접 파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표현의 자유’ 논란이 시작됐다.
조각상의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편에서는 일베 조각상 자체에서
혐오감을 느꼈다며 이 작품은 ‘표현의 자유’ 논리를 적용할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목소리도 있었다.
1
지난 5월 30일
홍익대 정문에 설치된
일베 조각상.
2
조각상이 설치된 후
이를 본 학생과 시민이
다양한 의견을 남겼다.
3, 4
6월 1일 한 남성은
‘조각상 설치가
폭력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메시지(사진3)를
남기고 일베 조각상을
훼손했으며(사진4),
이는 표현의 자유
논란이 더욱 심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한국만의 ‘표현의 자유’ 허용 기준 필요
대한민국 헌법은 21조 1항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다만 4항에서 타인의 명예와 권리를 침해하거나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한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상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다. 홍대 앞 일베 조형물을 둘러싼 논란은 좁게 보면 이 조형물이 ‘표현의 자유의 예외에 들어가느냐 아니냐’로 볼 수 있다. 법학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대하는 미국과 독일의 차이를 통해 우리만의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선진국중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성조기를 공공장소에서 불태운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을 한 바 있다.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는 미국 국민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지만, 그 행위 자체가 물리적인 폭력 등 범죄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나치 지배의 경험이 있는 독일은 미국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좁게 해석하고 있다. 나치와 관련 있는 상징물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기만 해도 독일 형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 독일뿐 만 아니라 유럽연합 내 상당수 국가들은 나치를 찬양하거나 홀로 코스트를 부인하는 행위 자체를 범죄로 보고 있다. 지난해 유럽 의회에서는 나치식 경례를 한 의원 두 명이 열흘간 직무정지를 당한 예도 있다.
표현의 자유는 왜 보장되어야 할까
일베 조형물 문제가 불거지자 일각에서는 이 조형물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나치 깃발)나 일본의 욱일승천기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일베 조형물을 전시한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규제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다만 법학자들은 일베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독일의 나치와 동급으로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나치의 경우 한 때 독일의 집권 정당이었으며, 일련의 체계를 갖춘 조직이었다. 또한 일베 조형물의 작가가 일베를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형물을 만든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이런 조형물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어렵거니와, 섣불리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제도가 도입될 경우 정치적으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다는게 법학자들의 지적이다. 사회학자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틀뿐만 아니라 표현의 내용에 대한 사회적인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 여성학자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전했다. 애초 ‘표현의 자유’는 여성이나 장애인,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발언권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된 것인데, 인종차별, 성차별, 지역 차별에 해당하는 표현이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문제다. 일베 조각상도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소수자를 쉽게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벌어진 일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표현의 자유 논의에는 ‘소수자 혐오 표현 규제’가 전제돼야
표현의 자유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난 여러 전문가는 우리 사회에 소수자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감했다. 소수자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아무런 설명 없이 일베 상징 표현을 조각한 작품이 거리로 쉽게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애초에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전문가들은 소수자를 공격하는 ‘혐오 표현’에 대해 사회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주제로 소모적인 감정 싸움만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선진국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증오심, 폭력을 부추기는 표현까지 지켜주진 않는다. 해외에서는 혐오 표현의 구체적인 범위와 규제 수위를 정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일례로 영국의 시민단체 아티클 나인틴(Article 19)은 2009년 ‘표현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캄덴 원칙’을 발표했다. 이어 이들 단체는 ‘혐오 표현’의 구체적인 범위와 규제 수준에 대한 연구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 법학자들은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소수자의 발언권을 침해하는 ‘혐오 표현’은 규제돼야 한다고 봤다. 공영방송 이사가 공개 석상에서 “동성애자는 더럽다”고 말해도 이를 처벌할 수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통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잘못이라는 국가적인 선언이 있어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 글 백철
- 주간경향 기자
- 사진 YTN NEWS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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