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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4월호

전시 <백세청풍>과 <이중섭은 죽었다> 두 100세 화가의, 각자의 오늘
태어난 지 100년이 된 두 화가의 전시가 나란히 열린다. 한 사람은 신작을 통해 건재함을 알리는 김병기 화백,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일찍 신화가 되어버린 이중섭이다. 두 전시의 작품에서는 각 작가의 ‘현재’를 읽을 수 있다. 2016년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1950년대에 가족을 사랑하는 한 사내의 따뜻한 시선이다.

이중섭과 김병기. 똑같이 평양 지역에서 1916년 태어났다. 보통 학교 6년 내내 같은 반 ‘절친’이었다. 화가를 꿈꾼 것도 닮았다. 고교(고등보통학교)는 달랐으나 일본으로 유학 가 같은 미대를 다녔다. 1930년대 도쿄 문화학원에서 야수파, 추상, 초현실주의 등 아방가르드 미술의 세례를 받은 그들은 광복 이후 한국 화단을 이끌어가는 중추가 됐다.
그런데 우리는 이중섭은 알아도 김병기는 잘 모른다. 비슷한 길을 걸어온 두 사람. 생의 후반부는 극적일 만큼 다르다. 이중섭은 41세(1956년)에 요절했다. 그리고 신화가 됐다. 김병기는 지금 살아 있다. 오늘의 현실을 그리는 만 100세의 열정 작가로.
100세 작가가 신작 개인전을 여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있다. ‘~전해라’ 유행을 낳은 노래 ‘백세 인생’의 장수 로망을 넘어서는 장수 만세다.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김병기 화백의 <백세청풍(百世淸風)>전이 5월 1일까지 열린다.

강렬한 선으로 현실을 말하는 ‘오늘의 화가’
<백세청풍>전, 3. 25~5. 1, 가나아트센터

연관 일러스트 이미지김병기 작가의 <공간반응> (Oil on canvas, 145.3×97cm, 2015).

“100세 화가니, 이중섭이니 그런 거 다 떠나 제발 작품으로만 봐주세요.” 전시 개막(3. 25)을 앞두고 3월 16일 만난 그는 신신당부했다. 또 말했다. “이중섭, 이중섭 하지만 내 절반도 못 살았어요. 나는 중요한 작품을 하고 있는 오늘의 작가입니다.”
여기서 잠깐 설명이 필요하다. 김병기를 잘 모르는 건 그의 탓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미술사에서 ‘증발’된 사람이었다. 부친은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일본에 유학한 한국 세 번째 서양화가 김찬영이다. 평양 갑부 집안이다. 1960년대 화가로, 서울대 강사로, 비평가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갔다가 귀국하지 않고 미국 뉴욕 주의 시골 사라토가에 홀연히 남는다. 49세의 간단치 않은 나이. 오로지 작가로 살고 싶어 잠행을 결정했다. 수십 년 잊혔던 그를 한국 미술계에 소환한 이는 윤범모 가천대 교수다. 뉴욕에서 우연히 그의 소식을 전해 듣고 국내 전시를 주선했다. 1986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에는 지난해 4월부터 1년 가까이 국내에 체류하며 그려온 신작 15점을 포함해 총 50여 점 회화를 선보인다. 그의 그림에는 형상과 비형상이 공존하며, 이분법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1990년대에 그린 그림만 해도 형상성이 지금보다 강했다. 한국에 와서 그린 그림에선 생략이 한결 과감해진다. 면보다는 동양의 서예를 연상시키는 선이 화면을 장악하는 요소가 됐다.
반추상이면서 민중미술만큼이나 구체적으로 현실에 대해 발언한다. <공간반응>(2015년작)이 대표적이다. 전체를 검게 칠한 화면 양끝에 내리그은 붉은 선 두 가닥은 폭력적으로 비칠만큼 강렬하다. 사람과 빌딩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휘청거리듯 뭉그러져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반추상이다. <바람이 일어나다>(2016), <살아야 한다>(2016) 연작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 시구절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패러디했다. 공산 치하 평양에서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왔다는 노작가는 당시 현실이 지금 되풀이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가 터졌을 때 정부의 무능에 대한 무력감, 피난 시절을 보낸 부산에 지금은 초고층빌딩이 들어서 바다가 빌딩 사이로 ‘세로로 보였을 때’의 놀라움…. 그림의 주제는 그렇게 동시대에 대한 고민과 비판, 사유를 담고 있다. 전시는 무료다.

연관 일러스트 이미지이중섭 작가의 <황소>(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35.5×52cm, 1953년경).

신화를 걷어낸, ‘인간 이중섭’의 삶과 작품
<이중섭은 죽었다>, 3. 16~5. 29, 서울미술관

김병기 개인전을 본 뒤 인근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가보자. 이중섭의 죽음은 김 화백에게도 각별하다. 서울 적십자병원에 행려병자로 처리돼 있던 이중섭의 주검을 발견하고 장례를 치러준 이가 그였다. 이중섭은 경제적 곤궁함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을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전시가 성공하면 가족을 데려와 살겠다는 꿈으로 외로움을 버티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연 개인전은 성공했다. 그러나 수금에는 실패하면서 더 큰 절망에 빠졌다. 우울증에 시달린 그는 끝내 홀로 생을 마감한다. 이번 전시는 신화를 걷어내고, 가족을 지극히 사랑한 인간 이중섭을 부각했다. ‘이중섭은 죽었다’는 제목은 그래서 나왔다.
미술관 소장품만으로 꾸민 기획전시다. 여러 군데서 작품을 빌려오는 다른 전시에서처럼 대표작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의 호사는 없다. 대신 복제품과 각종 소품을 적극 활용해 이중섭의 삶을 간접 체험하게 하는 전시 방식이 대중에게 어필할 듯하다. 생의 매 시기를 10개의 구역으로 나눠 공간화했다. 유학 시절의 도쿄 문화학원, 가족과 함께라서 가장 행복했던 제주 서귀포읍의 피난지 단칸방, 6?25전쟁 후 예술인들과 어울렸던 부산 루네쌍스 다방, 창작 열정을 불태우던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시절, 첫 성공을 거뒀던 서울 미도파 화랑, 대구 개인전 때 머물렀던 경복여관 2층 9호실…. 공간별로 그 시기 제작한 작품을 걸어 이해를 돕는다. 5월 29일까지. 성인 9000원, 대학생 7000원, 초중고생 5000원, 어린이 3000원.문화+서울

글 손영옥
국민일보 문화부 미술담당 선임기자
사진 제공 가나아트센터, 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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