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서들의 풍경화 <신포니아>
<신포니아>의 씨앗이 뿌려진 건 2014년 11월이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시 대표 비보이단이던 갬블러크루와 서울문화재단이 김설진에게 안무를 의뢰하면서다. 작업은 지난해 9월까지 이어졌다.
“비보이에게 현대무용을 시키거나 현대무용에 비보잉을 재료로 쓰는 식은 절대 안 될 것 같았어요. 비보잉 자체가 춤 공연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비보잉만으로 어떻게 긴 시간 동안 음악을 표현할까에 초점을 맞췄어요. 아마 갬블러크루 친구들이 되게 힘들었을 거예요. 비보잉은 5~10분 정도 공연하거든요. 이 작품은 퇴장 없이 30분간 무대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단거리 선수에게 장거리 마라톤을 시킨 거나 마찬가지죠.”
<신포니아>는 지난해 가을 하이서울페스티벌과 안산 ‘ASAC몸짓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였다. 비발디 <사계>를 편집한 음악을 사용한다. 김설진은 “계절을 몸으로 담았다”며 “댄서들 자체가 풍경이 된, 약간 풍경화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비보이들이) 하고 나서 토하더라고요. 첫 공연하는 걸 보는데 눈물 났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까. 댄서란 직업이 쉽지 않아요. 남들은 재밌어서 한다 생각하지만, 힘들고 어려운데 계속하는 거예요. 그 얘기도 작품에 담고 싶어서 체력적으로도 힘들게 짰어요. 그걸 다 아니까 공연 보는데 ‘찡’ 하더라고요.”
무대에 오른 <신포니아>는 대체로 만족스러웠지만 ‘두 장면 정도와 의상, 조명은 조금 보완했으면’ 하고 느꼈다. 요즘 그는 공연 전 ‘이 부분은 별로다’ 싶어도 일부러 바꾸지 않는다. 최대한 다듬는 선에서 그친다. “계속 바꾸다 보면 자기 발전이 덜 될 것 같아서, 채찍도 맞고 깨져야지 순간을 모면하려 고치면 계속 그렇게밖에 못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정한 모토는 ‘잘되면 무용수 탓, 안 되면 안무가 탓’이다.
할수록 새로운, 모두 다 다른 춤
김설진과 비보잉의 인연은 1990년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 소년이던 그가 TV에서 현진영과 와와의 ‘슬픈 마네킹’을 보고 첫눈에 반한 건 유명한 얘기다. 그는 현진영보다 뒤에서 춤추는 댄서들에게 매료됐다. 바로 스트리트 댄스에 푹 빠졌다. 자연스럽게 비보잉도 접했다. 그는 “당시 이태원 문라이트 나이트클럽 뒤에 있던 옷가게에서 록 스테디 크루 같은 외국 유명 댄서의 비디오를 고가에 팔았다”며 “일본 댄서들이 문라이트에 오면서 하나씩 가져온 건데, 중학생 때 제주도에서 그 비디오를 공수해서 봤다”고 했다. 비디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추면 세계적이 될 줄 알았다. 이제 얼추 비슷하게 추는구나 싶을 때쯤 깨달았다. 이 비디오들이 10년 전 자료라는 사실을. 고등학교 2학년이 된 그는 아예 춤을 추기 위해 홀로 서울에 왔다. 친척집에 얹혀살았다. 방송댄스 팀인 ‘더 댄스’ ‘프렌즈’에 들어갔다. 재즈댄스, 탭 댄스, 힙합에 ‘귀여운 춤’까지 음악에 맞춰 춰야 했다.
“방송댄스할 때 비보이들이 잠깐 나와서 기술만 보이고 들어가곤 했어요. 안타까웠어요. 20초 나오기 위해 몇 시간씩 대기했죠. 비보이도 댄서인데, 비보잉만으로도 춤을 출 수 있을 텐데 싶었어요. 장르별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스트리트 댄스와 그의 인연은 여기에서 멈춘다. 20대 초반 그는 우연찮게 영화 <백야>를 봤다. 스크린에서 러시아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울면서 춤추고 있었다. 멋있었다. 사람들에게 무슨 춤인지 물었다. 현대무용이라고들 했다. 김설진은 “사실 영화 속 춤은 모던발레였다”며 “그때 발레라고 말해줬으면 발레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서울예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당시 내 체형이 스트리트 댄서처럼 돼 있었나 봐요. 목이 두꺼워지고 상체가 발달한 거죠. 선생님이 1년 동안 무용만 하라고 해서 열심히 했어요. 스트리트 댄스는 나중에 해도 전과 똑같이 될 줄 알았어요. 나중에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시, 산문, 소설이 다르듯 현대무용과 스트리트 댄스도 상이해요. 게다가 춤은 더 힘들어요. 장르 간에 알파벳 자체가 서로 다르거든요. 힙합은 쿵쿵쿵 내려가는 게 기본인데, 로킹(locking)에서는 쿵쿵 올라와요. 발레는 턴아웃인데 재즈는 턴인이 돼야 하고요. 로킹과 왁킹(waacking)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똑같이 팔 돌리는 춤 같지만, 움직임이 시작되는 지점들이 완전히 달라요.”
이후 그는 안성수 안무가를 만나며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진학했다. 졸업하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가 2008년 벨기에 피핑톰 무용단에 입단해 해외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비보잉의 세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1990년대에 제가 비보잉을 할 때는 정말 주먹구구였어요. ‘더 세게, 더 차, 더 돌아’ 이랬죠. 무조건 ‘더 버텨’ 하며 연습했어요. 이번에 작업해보니 예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체계가 잡혔더라고요. 역사 공부도 해요. 누가 이 스텝을 만들었고 어떤 배경인지요. 진지하게 춤에 임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반성도 많이 했고요. 과연 현대무용 하는 친구들은 이 동작이 왜 나왔는지 알까. 스트리트 댄스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하고 있어요. 수직으로 가고 있어요. 그런데 현대무용은 제가 보기에 ‘지잉’ 수평이에요. 100년 전에 현대무용이 시작된 어느 시점과 지금의 스트리트 댄스가 비슷한 거 같아요. 제도권에 들어와 체계가 잡히는 과도기죠.”
1 작품 <안녕>(2014).
2 작품 <안녕>(2014).
3 작품 < Sonata (in 서울역) >(2014).
4 지난해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신포니아>(2015). 김설진이 안무를 맡고 갬블러크루가 공연했다.
벨기에 ‘피핑톰’ 활동으로 배운 것
5 김설진이 동료들과 만든 창작집단 ‘Mover’의 연습실에서.
6 작품 <룸>(2013).
그는 요즘 다시 스트리트 댄스를 연습하고 있다. 이유는 “현대무용을 하니까, 알아야 하니까”다. 한동안 그는 ‘과연 현대무용이 뭘까’ 고민했다.
“현대무용이란 개념을 다시 정리하게 됐어요. 지금 한국 교육 체계 안에서 배우는 현대무용은 ‘현대무용이었던 춤’이죠. 과거에 그 시대에 추던 춤을 배우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현대무용은 현시대에 추는 자유로운 춤이에요. 그러니 지금 사람들이 추는 춤을 다양하게 알아야 해요. 물론 과거도 알아야 하고요.”
그는 춤 얘기라면 밤새워 해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보였다. 그의 말은 겸손하면서도 솔직하고 예리하다. 대충 얼버무리거나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자신을 깊이 파고든 끝에 몸짓으로 내보이기 때문인 듯했다. 생각이 곧 춤이 되기에, 눌변인 듯 달변이다. 국내 환경에 대한 비판도 그렇다. <신포니아>의 재공연 얘기가 나오자 그는 아쉬운 표정을 비쳤다. “국내에서는 정말 힘들게 신작을 만들어 4번쯤 공연하면 또 다른 작품을 만든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극장 시스템의 문제예요. 극장마다 신작을 원하니까요. 공연 하나 겨우겨우 할 정도로 지원해주면서 계속 신작을 원하니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죠. 외국 작품은 잘 사오고, 한국의 좋은 작품은 발굴하지 못하고.”
그가 속한 벨기에 ‘피핑톰’은 국내와 정반대로 소수의 작품을 오랫동안 공연한다. 피핑톰은 가브리엘라 카리조와 프랭크 샤르티에가 2000년 만든 단체다. 김설진은 춤과 연극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피핑톰이 자신의 이상형과 가까워 벨기에행을 택했다. 피핑톰은 창단 후 내놓은 작품이 6편에 불과하다. 이외에 안무가들이 외부 단체에 초청돼 만든 작품이 3, 4편이다. 김설진은 이 중 두 작품에 조안무가로 참여했다. 그는 “피핑톰에서는 한 작품을 만드는 데 1년이 걸린다”며 “그걸로 2년간 투어하며 수백 회 공연하니 작품이 좋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인이 세계적 현대무용단 피핑톰 단원이라 하면 일단 주목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인지 김설진은 일부러 자신을 ‘외국인 노동자’라고 표현한다. 벨기에서 보수 받고 일한 것뿐이라 목에 힘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국내에서 두각을 보인 것도 일부분은 “사대주의 때문인 것 같다”고 꼬집는다.
“만약 한국에 있었으면 절 이렇게 봤을까요. 외국에서 인정받고 오니…. 그전에 제가 뭘 해도 아무도 몰랐어요. 그래서 화도 나요. 저는 자신을 보는 눈이나 나름대로 냉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특출나거나 뛰어나지 않았는데 첫째 운이 좋았고, 타이밍이 맞았어요. 저보다 잘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아요.”
그에게는 자신을 향한 완벽주의와 외부를 향한 겸손함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낮추던 그도 해외 평가 얘기가 나오자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온 기사 중 제일 황당했던 게, 2011년과 2012년 프랑스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에서 공연할 때였어요. <아 루에>와 <반덴브란덴가 32번지>를 했어요. 현지 언론에서 저를 ‘찰리 채플린과 마르셀 마르소를 뛰어넘었다’고 표현하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정신을 놨나 했죠. 너무 좋죠. 채플린과 마르소라니요. ‘나는 댄서인데 이런 사람들과 비교하다니’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기분은 되게 좋았어요. 그전까지는 제가 일본인으로 잘못 나가기도 했는데 이후로 이름이 제대로 나갔어요. 네, 저 자랑한 거예요. 다들 자기 자랑을 하길래. 근데 부끄럽네요….”
벨기에에 가기 전 그가 한국에서 올린 작품 중 다른 이들도 봤으면 하는 게 세 편이 있다. 하나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카니발>이다.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전곡을 해석한 작품이다. 교육용 프로그램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깊이에의 강요>다. 공연 횟수가 네 번밖에 안 된다. 극장 측이 저작권을 갖고 있어서다. 그는 “그전까지는 움직임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 작품은 내가 하고자 하는게 뭘까 생각하며 만들었다”며 “진지하게 고민한 작품인데 정말 좋았다”고 소개했다. 나머지 하나는 <강제휴식>이다. 2004년쯤 올린 듀엣 작품이다.
“한 명은 무대 뒤에 가만히 서 있고, 저는 무대 앞까지 걸어 나오면 끝나요. 발걸음, 눈 감는 것, 숨 쉬는 것, 침 삼키는 것까지 다 컨트롤한 작품이에요. 눈은 두 번 감고, 침은 한 번도 안 삼키고, 박자에 맞춰 입으로 들이쉬고 코로 내뱉고, 반걸음을 떼기 위해 얼마를 셀지 일일이 정했어요. 숨 막히는 작품이에요. 무대 위에서 토하기도 해요. 호흡을 통제하니 자연스럽게 정확한 타이밍에 구토가 나오더라고요. 연습하면서 보니 계속 똑같은 부분에서 구토가 나오기에 그렇다면 색깔을 맞춰야겠다 했어요. 3일 동안 하얀색 음식만 먹었어요. 끝내고 일주일을 앓아누웠죠.”
사람을 이해하는 춤, 춤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삶
그 후로 지난 10년간 김설진의 춤은 얼마나 변했을까. 그는 가장 큰 변화로 몸 움직임에서 타인을 좀 더 이해하게 된 점을 꼽았다.
“전에는 춤 만들 때 사악했어요. (예시로 음료수를 움켜쥐며) 소품을 이렇게 잡으라고 했는데, 무용수가 그대로 안 해서 7시간 동안 연습한 적도 있어요. 2년 지나고 알았어요. 그 친구 손가락이 저보다 짧은 걸. 당연히 안 되는 건데 그 친구가 뭐가 다른지 몰랐던 거죠. 옛날에는 소품을 잡는 모습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이걸 왜 잡는지가 더 중요해졌어요.”
관객은 알아채지도 못할 작은 동작까지 신경 쓰는 데는 그가 움직임에 유달리 예민한 것도 한몫한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움직임을 포착하고 분석한다. 어릴 때부터 남의 동작을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 보통 ‘노인을표현하라’ 하면 구부정한 허리와 절룩이는 다리를 떠올린다. 김설진은 고개를 젓는다. 그는 “나이 많으신 분들은 사실 목을 가누기 힘들어하고 아기들도 마찬가지”라며 “유치원생들은 전체 조회 시간에 ‘차렷’ 하라고 하면 고개를 살짝 흔들흔들한다”고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도시, 날씨, 인종마다 걸음걸이도 다르다”고 덧붙였다.
“춤뿐 아니라 몸 움직임이 다 보여요. (춤) 움직임에서는 조금이라도 다른 게 너무 눈에 보여서 힘들었어요. 지금도 보이는데, 놔두죠. 그거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요. 움직임에서 심미적인 걸 보는 건 아니에요. 전 심미적이란 말 싫어해요. 굉장히 모호한 말이잖아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걷게 됐을까 생각해요. 직업은 뭐고, 성격은 어떨까, 그걸 무대에 가져오면 어떨까 생각하는 거죠.”
그는 “미에 대한 사람들 생각이 자꾸 기형적으로 가고 있다”며 “자기가 느낄 때 아름다운 게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했다. 이날 만난 장소는 그가 동료들과 만든 창작집단 ‘무버’의 연습실이었다. 무버는 “좋은 친구들과 재밌게 놀려고” 꾸린 단체다. 60분 분량의 솔로 작품으로 혼자 해외 투어를 다녀보니 “재미없고 미칠 것 같아 함께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한 게 계기가 됐다.
“우리는 무용단이라고 하지 않아요. 안무가, 무용수로 구분하지 않아서요. 다들 크리에이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연습실에서 건담 프라모델을 만들어도 아무 얘기 안 해요. 멤버들이 연습하다가 기타 치더니 건담을 만들고는 갑자기 쓱 가요. 옛날 같으면 ‘연습실에서 춤춰야지 무슨 짓이야’ 했을 거예요. 이제는 ‘저 메커니즘을 안무에 녹여낼 수 있지않을까’ 싶어요. 사실 모든 놀이가 작업이 될 수 있거든요.”
‘무버’를 만들 때 그는 무용가들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단체를 꿈꿨다. 그러려면 월급이 안정적으로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늘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다음 달에 어떡하지, 다다음 달에는. 이번 지원사업이 하나도 안 됐는데 어떡하지 해요.”
그가 한국과 벨기에의 차이점으로 꼽은 것도 “아무 생각 안 하고 춤만 춰도 먹고살 수 있는” 현실이다. 벨기에에서는 정부 지원은 물론 일상처럼 무용을 보는 관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피핑톰은 조직도 세분돼 있다. 기획?안무가 뿐 아니라 매니저, 드라마 투르그, 조명?음향 전문가, 트럭운전사까지 피핑톰 소속이다. 부러운 환경이다. 무버를 피핑톰처럼 만들고 싶지 않은지 궁금했다.
“아니요. 자존심 상하게. 무버처럼 만들어야지 왜 피핑톰처럼 만들어요.”
춤의 유한성을 벗어나기 위한 모색
올해 그는 한국에서 벌인 일이 많아 피핑톰의 제의를 거절했다. 피핑톰에서는 다시 ‘우리가 2020년에 이런 일을 하는데 네 일정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아직 답은 못 했다. 요즘 그의 머릿속은 다른 고민들로 가득하다. 그중 하나는 공연예술이 갖는 시공간의 제약과 유한성이다.
“과거 작품을 할 때 되게 힘들었고, 잘해내면 뭔가 될 줄 알았어요. 반응도 좋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없어져 버렸잖아요, 제 기억에만 있고. 춤은 할 때마다 새로 만들어야 하고, 할 때마다 사라져요.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고, 어떤 것으로도 남지 않아요. 그나마 영상이 있지만, 영상은 껍데기만 남는 거죠.”
이런 고민 때문일까. 그는 요즘 영상 작업에도 관심을 돌리고 있다. 앞으로 만들고 싶은 작품 중 하나가 ‘댄스 영화’다. 그는 “배우나 작가, 감독 어떤 형식으로든 가능하다”며 “춤을 소재로 한 기존 상업영화와 달리 춤만으로도 이야기가 흘러가는 작품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 글 송은아
- 세계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 사진 김창제
- 작품 사진 제공 김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