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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9월호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하는 커뮤니티 공간 ‘마을에숨어’ 동네가 선물한 기억이 숨지 않도록
둔촌주공아파트단지 초입 상가에 마련된 공간 ‘마을에숨어’는 독립매거진 프로젝트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이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워크샵과 작업은 모두 둔촌주공아파트를 기억하는 것을 공통분모로 한다.
곧 재개발로 사라질 동네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도시의 개발과 빈번한 변화 속에서 다른 의미의 실향민이 되어가는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준다.

둔촌종합상가 3층에 자리한 공간 ‘마을에숨어’예술치유 프로그램 이미지둔촌종합상가 3층에 자리한 공간 ‘마을에숨어’.

도시의 실향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아파트키드’라고 불리는 세대가 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중반에 태어나 아파트를 삶의 친근한 환경으로 기억하고 자란 세대다. 이들은 고향인 도시를 떠나 사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 잠재적 실향민이다. 재개발로 인해 오래된 동네의 흔적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기에 이들은 고향에 살더라도 돌아갈 곳을 잃는 셈이다.
어느 세대든 그들이 공유하는 삶과 문화와 추억이 있다. 성냥갑처럼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그들의 삶이 모두 같은 모습을 띄는 것은 아니다. 삶의 공간에서도 행간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집과 집을 잇는 복도, 아파트의 여러 동 사이에 공유되는 길, 놀이터 등에서 만나고 인사하고 서로의 삶을 이었다. 아파트는 그렇게 어떤 세대의 고향이 되었다.
독립매거진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는 아파트키드 세대의 유의미한 기록이다. 재개발이 예정된 둔촌주공아파트는 이 책을 만든 이인규 씨에게 어릴 적 가장 중요한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그는 동네가 허물어지는 것을 마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살던 둔촌주공아파트 집을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한 그의 작업은 ‘매거진’이라는 형태로 확장됐고, 아파트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인 기억을 성실히 담아 2호, 3호 발행을 이어가면서 둔촌주공아파트의 주민, 아파트에 대해 비슷한 기억을 지닌 20~30대의 넓은 공감을 얻었다. 사실 기획할 때부터 발행인 이 씨는 이 프로젝트가 끝나는 시점을 ‘둔촌주공 아파트가 철거될 때’까지로 정했는데, 매거진을 제작하면서 사진, 그림, 이야기를 보태며 아파트에 대한 기록을 함께 확장한 다양한 인연을 만났고, 프로젝트의 의미는 그의 삶의 한가운데로 옮겨왔다. 그리고 2호 매거진을 발행한 2014년 여름, 둔촌주공아파트 상가에 아예 오프라인 소통 공간을 마련했다. 둔촌(遁村, 숨을 둔·마을 촌)의 뜻을 풀어 쓴 이름 ‘마을에 숨어’를 달아서.

둔촌주공아파트의 기억과 이야기가 쌓이는 공간

“온라인에 모인 같은 마음의 사람들과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며 만나서 둔촌주공아파트를 기억하기 위한 무언가를 함께 해나갈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3호의 에필로그에는 공간 ‘마을에숨어’를 마련하게 된 취지에 대해 간략하게 적혀있다. 둔촌종합상가 3층에 마련된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아 ‘삼삼오오’ 모이기 딱 적당한 정도다. 공간을 오픈한 후 이인규 씨는 이곳에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이들과 함께 기타와 일러스트, 캘리그라피 등의 워크샵을 열었다. 동네가 재개발 된 후에 이곳이 그리우면 기타를 치며 향수를 달랠 노래 한 곡을 부른다거나, 동네를 그림으로 그려보거나, 이곳을 기억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제 손으로 적어보면 좋겠다는 취지였다. 이 공간의 아주 사소한 부분부터 둔촌주공아파트와 관련되지 않은 부분은 없다.
특히 이 곳이 제 역할을 한 때는 둔촌주공아파트 놀이터의 ‘기린미끄럼틀’ 철거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지난해 이 단지에 있던 12개의 놀이터들은 어린이시설 안전관리법 기준에 미달되는 ‘부적합 시설’로 인정돼 철거가 결정됐다. 그 중 이 씨를 비롯해 아파트 주민들에게 특별하게 각인된 ‘기린미끄럼틀’의 철거를 앞두고, 이 씨는 아무래도 작별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 ‘불꽃놀이’ 이벤트를 벌이기로 했다. 저녁에 이벤트를 벌이기로 하고 당일 아침에 SNS에 공지를 띄웠는데 스태프 10명이 금새 모이고, 당일 저녁에는 아파트 주민들이 다수 참여해 미끄럼틀과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보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하나 둘 공간에 모여 이벤트를 준비하고, 마치 오래 알았던 친구처럼 둔촌주공아파트와 놀이터, 미끄럼틀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것. ‘마 을에숨어’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과 기록이 쌓이는 것으로 충분한 공간이었다.

2 ‘마을에숨어’의 일러스트 워크숍은 거의 매번 마감된 인기 수업이라고. 3 둔촌주공아파트 놀이터의 기린미끄럼틀이 철거되기 전날, SNS 공지를 보고 ‘마을에숨어’로 찾아온 이들은 불꽃놀이를 함께 준비하고 미끄럼틀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2 ‘마을에숨어’의 일러스트 워크숍은 거의 매번 마감된 인기 수업이라고.
3 둔촌주공아파트 놀이터의 기린미끄럼틀이 철거되기 전날, SNS 공지를 보고 ‘마을에숨어’로 찾아온 이들은 불꽃놀이를 함께 준비하고 미끄럼틀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안녕? 오늘의 둔촌주공아파트

지난 8월 4일, 이 씨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페이스북 페이지에 ‘경축, 둔촌주공아파트 사업 시행 인가’ 라고 적힌 현수막 사진을 올렸다. 내년 이주를 목표로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는 소식에 그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이곳에 대해 담지 못한 것, 하지 못한 말들이 많기에 아쉬움이 앞선 터였다. 그러나 실제 철거까지 어림잡아 최소 2년 정도의 시간이 남았고, 그에겐 그 동안 더 바쁘게 움직일 아주 중요한 이유가 더해진 셈이기도 하다. 아파트 단지에 대해 건축적으로 접근해보고 싶고, 특히 주민들이 좋아하는 이 단지의 나무, 식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무엇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이곳의 아름다움을 갓 발견한 10대 청소년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많다고 이 씨는 전했다. 앞으로 4호, 5호 매거진을 꾸준히 발행하며,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삶이 계속되고 있는 둔촌주공아파트의 한 공간에서 이 동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아갈 것이다. 잠시 휴지기를 가졌던 공간은 8월 말 여행드로잉 워크숍을 재개하며 바지런한 활동을 알린 참이다.문화+서울

글 이아림
사진 제공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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