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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3월호

예술인 아카이브

오세린

시각예술
@ohserin
www.serinoh.com
2026 신당창작아케이드 입주작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오세린입니다. 금속과 흙을 주요 재료로 오브제를 만들고, 작업의 모티프가 된 현장을 바탕으로 영상을 제작하곤 합니다.

중학생 시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며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마침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예술고등학교가 있었고, 그곳에 가면 공부보다 미술을 더 많이 할 수 있다길래 뒤늦게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내 손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고, 작업이 막힐 때면 그때의 감각을 떠올립니다. 남들이 보면 좀 우스울 수 있지만, 지금도 저는 제가 만든 결과물을 바라보며 종종 감탄하곤 합니다.

올해 2월, THE THIRD에서 열린 오세린·장세희 2인전 《Neo-Animism》에서 신작 <불에서 나온 것들>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업은 지난여름 세 달간 머문 중국의 도자산업 도시 징더전景德?(경덕진)에서 시작합니다. 도시 외곽에는 거대한 도자기 공장단지가 있고, 명품 브랜드 식기부터 관광 기념품, 한국의 납골당에 놓일 유골함까지 정말 다양한 도자기들이 거대한 가마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었죠. 그런데 제 눈길을 끈 건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 소성 이후 검수 과정에서 폐기되는 도자기들이었습니다. 소성된 도자기는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불합격 판정을 받은 것들은 ‘도자기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옮겨진다고 하더군요. 깨진 도자기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그 풍경은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그동안 벼룩시장이나 저가 액세서리 숍에서 수집해온 싸구려 액세서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한때는 욕망의 대상으로 수많은 공정과 노동이 투입됐지만, 기준과 판정에 의해 끝내 쓰임으로 회수되지 못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닮았거든요.

이후 저는 이 사물들이 버려진 이후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전히 반짝이고 있지만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여겨진 것들, 기능과 효율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물들이 어떤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지 상상했습니다. 작업의 형태는 조선 시대 괴석도를 참조했어요. 기괴하거나 아름다운 돌을 수집하고 소유하려 했던 욕망이 지금의 소비 구조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형식적으로는 도자산업과 금속산업의 대표적인 대량 생산 기술인 슬립캐스팅Slip Casting과 왁스캐스팅Lost Wax Casting을 차용했습니다. 하지만 제 작업에서 이 기법은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작가의 노동을 통해 비효율적이면서 수공적인 과정을 반복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합니다. 석고 틀에 슬립(흙물)을 붓고, 고무 틀에 왁스(밀랍)을 부어 복제한 인공 보석 형태와 길거리에서 수집한 액세서리는 장식 요소로 결합하며, 버려진 사물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는 표면을 갖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기능과 쓸모로 사물을 판단하던 가치 체계는 느슨해지고, 감각과 장식이 사물을 인식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저는 제 손으로 직접 작업을 만드는, 비교적 노동 집약적인 공정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작업의 모티프는 의외로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통하는 공장과 시장 같은 장소에서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작 <모방과 속임수>2012-15는 남대문시장과 명동의 액세서리 가게에서 시작됐고, 영상 작업 <새들은 날기 위해 머리를 없앤다>2018는 중국 이우義烏의 소상품 도매시장에서 출발합니다. 개인전 《숲 온도 벙커》2022는 경북 봉화의 아연제련소를 계기로 작업하게 됐고요. 이런 장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주변의 사물이 특정 지역과 시대를 가로지르며 여러 욕망 사이에 얽혀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그 안에서 충돌하는 여러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 사이에 작가로서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하려고 합니다.

전전긍긍하며 전시를 준비하다 보면, 작년에 본 영화 <쇼잉 업>이 자주 떠오릅니다. 많은 영화가 예술가를 천재로 신화화하고 주변 인물들을 희생시키는 데 비해, 이 영화는 제 주변에 있을 법한 젊은 조각가 리지의 하루하루를 담담하게 따라갑니다. 개인전 오픈을 겨우 일주일 앞둔 리지는 낮에는 행정실 조교로 일하면서 밤에는 좁은 작업실에서 흙을 만집니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보일러 고장으로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고, 다친 비둘기를 떠맡게 되는 등 작업을 방해하는 사소한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이런 와중에도 일상과 작업의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는 주인공의 모습은 저 자신이나 주변 동료 작가들의 현실과 많이 닮아 있다고 느껴집니다.

올해는 가마를 스스로 다루는 데 익숙해지길 바라며, 흙과 좀 더 친해지고 싶습니다. ‘불에서 나온 것들’ 시리즈를 벽 작업으로도 몇 점 더 만들면 좋겠습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으면서요.

《Neo-Animism》 THE THIRD 전시 전경, 2026,
사진 이행진/THE TH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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