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술 시대, 후니다 킴의 사유법
“듣기란 이 세상을 탐색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감각 중 하나다.” “기술의 파도, 우리는 그 거대한 해안에 선 작은 대상.” 10월 17일 만난 작가 후니다 킴은 『초기술시대의 ‘듣기’를 위한 메모들』이라는 작은 책을 출판했다. 형태는 옛날 ‘껌 종이 만화’처럼 가로로 긴 판형으로, 그 비율 그대로 크기만 커진 모양이다. 쫙 펼치면 시야가 딱 가려질 만한 크기다. 그렇게 눈을 가린 채 문장들을 하나씩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낯선 감각과 질문이 뇌리에 새겨진다. “초기술시대. 그 안에서 내가 얻은 유연함, 그리고 굳어버린 감각의 단면은 무엇일까?”
2025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Prix Ars Electronica에서 인공생명 및 인공지능 부문 특별상 수상 소식과 더불어, 『초기술시대의 ‘듣기’를 위한 메모들』 출간 소식까지 반가운 근황이 잇따라 들려왔습니다. 먼저 책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일종의 사유집 같은 책이에요. 새로 써낸 책이 아니라 왜 이런 듣기가 필요한지에 대한 평소 메모를 모은 책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기보다는 책상 위나 침대 머리맡에 두고, 하루에 한 번씩 꺼내서 딱 1~2분만, 집중해서 읽고 그 문장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사유를 위한 문장도 있고 지시문 같은 문장도 있어요. 잠시 환기하는 역할도 하고, 독자가 머무는 곳의 소리를 좀 다르게 들어볼 수 있게 하는 거죠.
새삼 이렇게 작은 책을 손에 쥐고 있으니 작가님 작업이 양극단에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2021(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것처럼 어떤 감각의 경험을 위해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만들어진, “직접 몸에 장착implant해야 하는 사유체”들이 있어요. 반면 이렇게 유연한 책 속의 문장들도 있네요.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작가 중에는 기술을 깊게 파고들다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저도 그랬어요. 기술이 너무 빠르니까요. 예전엔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그걸 습득할 시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업데이트돼요. 정말 ‘초기술 시대’에요. 기술이 고정되지 않으니까, 그걸 따라가는 사람도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죠. 흔들리는 건 좋아요. 그건 유연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휩쓸리는 거예요. 그건 나를 잃는 거라서요. 그래서 저는 ‘흔들리되 휩쓸리지 않는 감각’을 말하고 싶었고, 그걸 위해 제가 만든 행동적 언어가 ‘스웨이 어튜닝sway attuning’이에요.
작업 <ATTUNE>2021(두산아트센터)과도 연결되는 것 같네요. 한창 팬데믹 당시 주변 대상과의 관계와 거리 감각을 계속해서 조율하는게 중요했어요. 이 작업뿐만 아니라 늘 중요시 해온 게 밸런스인데, 시대가 변할 때 그 사이의 간격을 계속 조율하는 일이 바로 제가 해온 일이더라고요. 무엇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 속에서 나의 감각이 어떻게 확장되기도 하고 퇴화되기도 하는지, 그 사이에서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고 어떤 상태인지, 멈춰서 그걸 계속 들여다보는 것.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온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직접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사유체를 만들기도 하고, 문장으로도 전하는 거죠.
후니다 킴, <무심한 귀를 위한 에피타이저 시리즈: 플레이어>, 2024 언폴드엑스 설치 전경
아티스트에게 늘 궁금한 것이기도 한데, 이 모든 작업의 동력은 무엇인가요? 기술에 둘러싸인 생활을 하다 보니, 거기에 휩쓸리는 나와 휩쓸리지 않으려는 나를 계속 보게 돼요.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져 있다가도 ‘이게 정말 내가 선택한 건가?’ 하는 반성적인 생각이 들고요. 기술은 너무 빨리 바뀌는데 인간의 감각이 그걸 흡수하는 속도는 그대로라, 그걸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점점 없어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하루에 1~2분이라도 멈춰서 ‘이게 내 생각인가?’ 하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잘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잘 안 되니까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라고 말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결국 ‘나의 감각’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네요. 장대한 아웃풋, 멋진 광경에 푹 빠지도록 만드는 작업도 있는데, 작가님 작업은 그 반대 지점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작업한 지 거의 25년이 됐는데,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2021 전까지는 ‘그만둘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코로나19 전후로 처음으로 정말 힘들다고 느꼈고, 계속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을 할 때 일이 더 잘 풀리는 순간들이 있었고, 그때부터 ‘이게 단지 내 일이 아니라, 일종의 책임일 수도 있겠다’는 감각이 생겼어요. 누구는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지만 예술 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어느 분야에서도 굳이 ‘잠깐 멈춰서 생각해보자’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모두가 효율을 위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태도를 바꾸는 일,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의 방향을 아주 조금이라도 바꾸는 일에 대해 사실은 큰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타인의 생각과 관점을 바꾸는 일… 그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거 아닐까요? 그러니까 제일 어려운 걸 하겠다고 지금 그러고 있는 거죠.(웃음) 그래서 힘든 것 같아요. 심지어 아무도 시키지 않았잖아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몇 년간 정말 왕성하게 신작에 매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국립현대미술관·두산아트센터 작업 이후에도 김승범 작가와 함께 ‘프로토룸’이라는 이름으로 프로덕트이자 악기인 <SmallBig_SØ>을 제작했고,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신작 <파인튜닝되는 신체감각>2023을 선보였죠. ‘네오 프로덕트’와 ‘네오 수석’ 시리즈도 있었고요.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신작보다 글쓰기에 시간을 더 많이 쓰고 계신 것 같았어요. 책도 내셨지만,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셨죠. 글쓰기 또한 창작이지만 호흡이 사뭇 달라졌다고 느끼는데, 이런 변화의 계기가 있나요? 여기저기 흩어둔 메모와 말이 안 되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었던 욕구가 컸는데, 작업이 몰리면 글 쓸 시간이 항상 부족했어요. 그래도 내 생각을 정리하려면 글을 써야 하고, 테크놀로지를 쓰는 작가들의 사유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현실에서 저도 이야기를 잘 풀면 좋겠다는 바람도 컸어요. 미술관에서의 인터랙션이 놀이기구처럼 소비되거나 너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나, 제가 쓰는 재료야말로 어쩌면 흙이나 물감보다 더 일상적인데 어떤 고정관념 때문에 마냥 새로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었고요. 그런 여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글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계속해서 어떤 매뉴얼을 써온 이유이기도 해요. 요즘은 사실 매뉴얼을 잘 읽지 않는 시대죠. 매뉴얼이 없다는 얘기는, 결국 너무나 쉽게 만들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습성과 크게 다르지 않게 컨트롤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특별히 생각하지 않고도 작동시킬 수 있는데 이걸 만드는 사람은 엄청난 생각을 해서 이걸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완전히 나뉘어요. 예전엔 집에 여러 공구를 갖추고 있고 간단한 건 정도는 고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극명하게 나눠지고 있어요. 지금은 나뉘는 정도지만 나중엔 이게 계급이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해요. 새로운 귀족 문화, 기술의 새로운 귀족이 생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가 지금 뭘 쓰고 있는지,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한 번쯤 그 좌푯값을 잡아볼 수 있는 상황을 계속 만들어주려고 해요. 그런 생각의 트리거를 마련하는 것까지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작가님이 써주실 글에서, 그런 트리거가 되는 문장을 만나는 동시에, 네오 프로덕트, 파인 튜닝, 초기술 시대, 아파라투스 등 개념어를 작가님은 어떤 관점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생깁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작업에서 다루는 이런 개념어들이 느슨한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가장 관심있는 맥락이 세 가지더라고요. 먼저 파인 튜닝되는 신체 감각. 기술이 너무 빨리 바뀌니까 우리 몸의 감각도 계속 파인 튜닝을 해야 하고, 그래서 ‘스웨이 어튜닝’, 흔들리되 휩쓸리지 않는 그 상태가 중요해지는 거죠. 또 하나는 사용하는 미술이에요. 작품을 사는 것도 그냥 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나에게 작용할 수 있는 차원에서, ‘네오 프로덕트’와 연결되는 관점을 더 확장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것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관심사인데, 사실 지금 시대에는 인터페이스가 너무 중요해요. 딱 하나만 고르라면 저는 인터페이스에요. 대상과 대상이 만나는 이 표면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시뮬레이션 같은 것 말고, 없던 감각을 제공해주는 것이거나 이 행위 자체가 의미 있게 다가오게 해주는 인터페이스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매끈하게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우리 감각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표면을 고민하고, 또 나아가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바꾸려 애쓴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이 모든 생각의 기저에는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고도 느껴져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최선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최선의 미래는 결국 기술이 아무리 빨리 변해도 우리가 그걸 계속 조율해가면서 밸런스를 찾아가는 거겠죠. 인간이 결국 조율하고 또 조율하면서 밸런스를 맞추고 업그레이드되고, 또 그 상황에서 뭔가 유지가 되는 것이 최선의 상황일 거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소수의 혁신가만이 아니라, 중간에 있는 사람들도 사유할 여유와 신체적 경험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하는 얘기들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한 게 아니면 말하지 못해요. 저의 장점이라면 그거밖에 없어요. 작업한 것도 가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실제인 경우, 나아가 그 프로세스 자체가 그냥 실제인 경우가 많아요. 그 경험이 정말 중요한 거죠.
계속해서 나의 관점, 나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되돌아보게 되네요. 앞으로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역할을 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싶은지요. 최근에 ‘발전 도상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딱 저 같았어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늘 계속 배우고, 계속 업데이트하고, 계속 의심하는 그런 ‘발전 도상 예술인’이고 싶어요.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보다, 끊임없이 질문을 이어가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트리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제 말이나 작업이 누군가에겐 잘 작동하고, 또 어떤 데는 엇나가고, 그럼 그 엇나간 부분에 대해 서로 얘기할 수 있고…. 그런 게 쌓여서 함께 다음을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글 신예슬 음악평론가 | 사진 Studio Ken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