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품 제국이 세운 미술관
7월 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론 뮤익》 전 열기가 뜨거웠던 상반기, 파리에도 그 못지않게 ‘핫’한 전시들이 화제였다.
먼저 현대미술관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의 《셀레스트 부르지에 무제노Celeste Boursier-Mougenot》
(6월 5일부터 9월 21일까지). 커다란 유리 돔 아래 설치된 <클리나멘Clinamen>은 지름 18미터의 거대한 하늘빛 수조 위 떠다니는
100여 개의 백자 그릇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그릇들은 불규칙하게 부딪혀 각기 다른 소리로 공명한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風磬이 우연성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
작가 셀레스트 부르지에 무제노는 이 작품을 “거대한 음악”이라 말했다.
돔을 둘러싼 프레스코화와 수조의 감각적인 컬러 대비, 명상적인 바이브는 소셜미디어를 타고 번졌다.
남성복 브랜드 생로랑 옴므는 지난 6월 이곳에서 2026 S/S 컬렉션을 선보였다. 쇼 좌석 맨 앞줄에는 영화감독 짐 자무시,
DJ 페기 구, 배우 차은우 등 여러 예술가와 스타들이 자리했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는 명품 패션 잡화 브랜드 그룹 케링KERING이 2021년 개관한 신생 미술관이다.
상반기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전시는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의
《데이비드 호크니 25David Hockney 25》(4월 9일부터 8월 31일까지)다.
지난 70년간의 호크니 작품 400점을 큐레이션한 최대 규모 회고전으로, 작가 자신도 큐레이션에 참여했다.
가장 유명한 <A Bigger Splash>,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를 포함해, 회화부터 아이패드 드로잉, 몰입형 오페라 작품을 망라했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린 과거 대규모 전시의 관람객은 1백만 명을 웃돌았는데, 재단 측은 지금까지의 반응으로
미루어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예측한다.
안도 다다오가 건축하고, 파리 초중심가에 위치한 부르스 드 코메르스
이쯤 되면 두 미술관의 공통점을 발견했을까. 모두 명품 그룹이 전략적으로 운영하는 사립 미술관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업계의 양대 산맥, 케링 그룹과 LVMH. 케링은 구찌·보테가 베네타·발렌시아가, LVMH는 루이
비통·디올·셀린느 등을 산하에 둔다. 파리의 미술관 하면 떠올릴 루브르와 오르세, 퐁피두 센터를 제치고 이러한 전시가 주목받는 것은 여러 시사점이 있다. ‘파리 미술관 산업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두 미술관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고전적 미술관의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퐁피두 센터마저 개관 50년이 되어가는 지금, 생긴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이러한 기업 미술관은 ‘지금, 현재’의 미술을 ‘새로운 공간’에서
보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니즈를 충족시킨다. 이 니즈를 간파한 LVMH와 케링은 미래 문화 사업으로서 미술관을 구상하며, 건축부터 대형 건축가—LVMH는 프랭크 게리, 케링은 안도 다다오—를 기용해 화력을 과시했다.
이곳에서 열린 화제의 전시 《셀레스트 부르지에 무제노》 전경 ⓒFlorent Michel/11h45/Pinault Collection
두 미술관의 운영 전략은 다소 다르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2014년 파리 서쪽 외곽의 불로뉴 숲에 대대적으로 개관했다.
초록빛 사이로 반짝이는 유리 외관은 공원 속의 거대한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11개 갤러리가 4층에 걸쳐 배치돼 있으며, 건물 중앙에는 콘서트홀도 있다. 바스키아&워홀》2023, 《마크 로스코》2024 등
유명 작가 중심의 대형 기획으로 대중성과 예술성을 함께 추구한다. 온전히 시간을 내어
찾아가는 미술관의 성격이 강하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는 루브르 박물관과 퐁피두 센터에서 멀지 않은 초중심가 파리 1구에 있다. 도심에서 감성적인 경험을 즐기고픈 이들이 타깃이다. 적당한 규모와 여유 있는 동선, 주제 중심의 현대미술 큐레이션을
선보인다. 건물은 파리시가 소유한 18세기 상업거래소 건물을 개보수한 것인데, 상징 격인 유리 돔과 프레스코화는 복원하고 나머지 부분은 안도 다다오가 개조했다. 일상 속 쉼을 선사하는 니치풍 미술관으로서 역할이
톡톡하다. 얼마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한 한국 작가 김수자의 전시 《To Breathe-Constellation》도 열린 바 있다.
파리 외곽 불로뉴 숲에 자리잡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Fondation Louis Vuitton
케링과 LVMH의 양강 구도 덕분에 파리 시민의 문화적 선택지가 넓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예술로 경쟁하는 것일까. 기본적인 출발은 창업주가 평생 모은 방대한 현대미술 컬렉션을 관리할 공간이 필요한 것, 두
번째는 상업으로 성장한 브랜드가 이제 ‘예술’과 ‘문화’로서 정체성을 관리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유형 자산’이 넘치는 요즘, 소비자는 제품을 사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무형 자산’ 즉,
브랜드가 가진 이미지를 구매하는 만족감이 더욱 중요하다. 이에 브랜드의 다양한 문화적 기획과 후원은 구매자에게 고가 제품을 더욱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느낌을 선사한다.
단기적으로는 아티스트와 협업한 전시 굿즈나 한정판 매출, VIP 고객 관리용 행사 기획 등 여러 시너지가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루이 비통과 구사마 야요이의 협업은 즉각적인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VIP를 위한
전시 특별 관람이나 작가와의 만남 등 프라이빗 행사를 기획하고, 케링의 생로랑 옴므 패션 위크처럼 대외 이벤트를 열기에도 용이하다. 국내에도 이처럼 유형적 가치를 무형으로 승화하는 눈에 띄는 행보가 있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갤러리처럼 꾸민 젠틀몬스터나 팝업 스토어 대신 현대 오페라 공연을 기획한 탬버린즈 등이다. 《론 뮤익》 전 역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후원으로 이뤄졌다.
작가가 직접 참여한 《데이비드 호크니 25》 ⓒFondation Louis Vuitton
21세기 파리의 문화 구도는 20세기 뉴욕을 떠올리게 한다. 구겐하임 가문과 록펠러 가문이 각각 구겐하임 미술관·뉴욕현대미술관MoMA를 세우고 경쟁하며 영감을 선사했듯, 케링과 LVMH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관건이라면 기존에 파리에 넘치는 문화유산과 새 미술관을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다. 올 상반기 경향으로 미루어, 무제노 전이나 호크니 전에서는 잠시 멈춰 여유를 가지고 작품과 장소에 몸을 맡기기를 권한다. 초 단위로 흘러가는 현대, 인구가 밀집된 수도에서 미술관만이 선사할 수 있는 시적인 정적. 커다란 홀의 하늘빛 수조와 초록 숲속으로 찾아가는 길. 세계에서 가장 큰 이 두 명품 제국은 역시 현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순간을 소비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글 전윤혜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