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태국 영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다
람캄행 왕의 비문 ⓒThe National Museum Bangkok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인류의 다양한 기억을 보호하고 세계인이 공유하지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지난 4월 17일 유네스코는 2025년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Register에 74건의 기록물을 새롭게 등재했는데, 이 중 태국의 기록물이 3건 게재돼 태국의 역사·문학·외교적 중요성이 다시 한번 국제 사회에서 강조됐다. 태국 정부는 “이번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태국의 문학, 불교, 예술 및 문화가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 기여를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우리는 이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승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난토빠난타숫캄루앙 필사본 ⓒThe Fine Arts Department, Ministry of Culture, Thailand
2025년 6월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전 세계 72개국과 국가 간 기구 4곳의 목록 총 570건이 등재돼 있다. 태국은 2003년에 등재된 ‘람캄행 왕의 비문’을 비롯해 올해 3개 목록, 즉 ‘난토빠난타숫캄루앙 필사본The Manuscript of Nanthopananthasut Kamlaung’, 영화 <백상白象 왕>과 관련 문서The King of the White Elephant and the archival documents, 그리고 태국이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와 공동으로 등재를 추진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설립 문서The Birth of the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 Nations (ASEAN)가 추가로 등재돼 총 9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이 가운데 태국의 정체성과 인류 공동의 유산 가치를 확인받아 제작된 지 85년 만에 등재된 영화 <백상 왕The King of the White Elephant>1940을 소개하고자 한다.
<백상 왕>의 한 장면
<백상 왕>은 1940년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쁘리디 파놈용Pridi Banomyong, 1900-1983(태국의 정치인·법률가·사회운동가이며, 탐마삿대학교를 설립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타이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이 자신이 쓴 동명의 영어 소설을 각색해 제작한 장편 영화다. 쁘리디 파놈용이 제작 및 각본을 맡고 순 와수타라Sunh Vasudhara 감독이 연출한 35mm 흑백 영화로, 동시 녹음으로 제작됐다. 이 영화는 1941년 4월 4일 싱가포르·뉴욕에서 같은 날짜에 동시에 공개됐으며, 정의로운 아유타야의 왕인 짝끄라 왕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미얀마의 홍사 왕이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짝끄라 왕의 백상을 강제로 요구하자 짝끄라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워 승리하고, 미얀마인을 자유롭게 풀어줌으로써평화를 이룩한다는 내용이다.
<백상 왕> 관련 문서 ⓒThe Fine Arts Department, Ministry of Culture, Thailand
이 영화는 영어로 제작된 최초의 태국 영화로, 제작자가 이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한 의도를 반영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에 태국의 평화주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달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영화를 통해 국제
사회에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고 반전 세력의 정치적 의지를 표명하고자 했다. 기록 보관 측면에서 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에 제작돼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태국 영화로, 당시 최고의 인기 오락물로
꼽히던 대중매체인 영화를 보여주며 태국 전통 공연 방식과 서구 영화 기법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라는 이상을 강력하게 선포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영화 <백상 왕>의 핵심은 제작자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부도덕한 통치와 지배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의도는 영화의 서두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자막이 흘러가며 시작한다.
<백상 왕> 50주년 기념 포스터
“이것은 400년 전 아요타야를 다스렸던 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의 검으로 왕국을 지켰고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코끼리가 풍부한 이 땅에서 흰 코끼리는 가장 고귀하게 여겨졌고, 백성들은 그들의 기사도적인 군주를 ‘백상 왕’이라 칭송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짝끄라였습니다. 그는 궁정의 허영을 사랑하지 않았고, 국가의 안녕을 위해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평화를 사랑했고, 이 이야기는 평화를 위해 헌정됐습니다.”
이어서 영화 제작 당시 태국 방콕의 모습을 보여준 뒤, 1540년의 아요타야Kingdom of Ayodhya로 시공간을 이동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코끼리는 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특히 흰 코끼리, 즉 백상은 희귀한 존재이며, 그 자체로 신성시됐기에 실제로 역사 내에서 전쟁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평화의 상징으로서 ‘백상 왕’이라 불린 짝끄라 왕을 이상적인 군주로 설정하고, 16세기에 일명 ‘백상 전쟁’으로 불린
태국(아유타야 왕국)과 미얀마(버마)의 역사적 배경을 빌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쁘리디 파놈용의 평화관을 세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영화가 개봉된 후 불과 8개월 후인 1941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은 태국으로 확산됐는데,
당시 태국은 쁘리디 파놈용이 이끈 자유 타이 운동(제2차 세계대전 기간 태국의 지하 항일 운동) 덕분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태국은 20세기 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아시아의 유일한 국가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백상 왕>은 1940년에 당시 최신 기술인 35mm 흑백 필름과 동시 녹음이라는 획기적인 제작 방식으로 만든 장편 영화다.
아울러 반전 영화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태국의 중요한 역사적 증거이자 인류의 주요 근간인 평화 문제를 제기해 1930~40년대
태국의 영화 및 외교사에 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현재의 사람들은 영화라는 매체로 기록된 백상 왕의 이야기를
경험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태국과 태국의 외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할 새로운 방법을 찾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기록유산으로서 이 영화가 태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기여하는 점일 것이다.
<백상 왕>은 단순히 태국의 영화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의 일부로서 인류의 공동 유산으로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다.
이 영화를 보존하고 있는 태국 국립영화기록소에서 유튜브를 통해 영화를 공개했으니, 기회가 된다면 감상해보시기를 바란다.
글 신근혜 한국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