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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7월호

책, 숏폼으로 뒤덮인 세계의 마지막 보루

우리는 ‘읽기’를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세계 자체가 거대한 텍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 세계가 숏폼과 알고리즘으로 뒤덮였다. 앞으로 무엇을 읽을 것인가. 책은 마지막 ‘믿을 구석The Last Resort’이 될 수 있는가. 6월 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 동안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된 2025 서울국제도서전이 던진 물음이다. 부스마다 펼쳐진 장사진을 보며 ‘정말 이 많은 사람이 책을 읽을까’ 하는 의문이 피어오른다. 그것은 결국 ‘그렇다면 문학·출판 시장은 왜 어려운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도서전은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킨 동시에 출판계가 풀어야 할 적지 않은 과제도 남겼다.

책은 도서전이 끝끝내 지켜야 할 명분일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책보다는 ‘굿즈’가 우선인 듯했다. 한정판 굿즈를 챙기기 위한 발걸음이 분주했고,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게시물이 소셜미디어에서 관심을 얻었다. 굿즈는 원래 미끼 상품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상품으로 독자의 눈을 끌어들인 뒤 궁극적으로는 책을 사게끔 만드는 것이 굿즈의 목적이다. 본말이 다소 바뀌었다. “도서전을 찾은 분들은 거의 굿즈만 찾으시거든요. 남들 다 만드는데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죠.” 한 출판사 홍보마케팅 부서 직원의 말이다. 출판사들은 저마다 재치 있는 굿즈를 내놨다. 유독 줄이 긴 곳은 책갈피 등을 판매하는 오이뮤OIMU였다.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와 협업한 한정판 굿즈를 선보였다고 한다.

물론 출판사가 굿즈 숍은 아니다. 그들도 이곳에 고작 굿즈를 판매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도서전을 찾은 많은 이가 결국 ‘독자’가 돼 오래오래 책을 읽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창비·문학동네 부스에서 눈길을 끈 장면이 있었다. 계산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손에 시집이 여럿 들려 있었던 것. 세 곳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선을 내는 출판사다. 시는 어렵고 난해하다. 하지만 그래서 ‘힙’하다. 젊은 층, 특히 ‘젠지GenZ’로 명명되는 1020 세대 사이에서 시집의 인기는 상당하다. 도서전은 지난해부터 문학·출판계에 불고 있는 ‘텍스트힙’ 열풍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텍스트힙’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출판사들이 찾은 활로는 ‘개인화된 독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민음사의 ‘상상독서단’, 온라인 서점 예스24의 ‘독서 유형 인바디’ 등 몇 가지 설문조사로 독서 유형을 분석한 뒤 책을 추천해주는 체험형 부스도 많았다.

이번 도서전이 큰 성공을 거둔 것엔 ‘셀러브리티’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판사 무제를 설립하며 문학·출판계에 혜성처럼 뛰어든 배우 박정민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김금희의 소설 『첫 여름, 완주』를 펴낸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출판인으로 거듭난 박정민은 도서전 현장에서 직접 책을 판매하고 북토크를 비롯한 여러 일정을 소화하며 독자와 소통했다. 거의 모든 부스에 사람이 많았지만, 무제에 유독 사람이 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결국 무제 입장을 기다리는 인원을 위해 별도의 대기 공간까지 마련되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평산책방도 올해 처음으로 도서전에 참가하며 관람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책방지기로 활동하며 퇴임 이후 삶을 꾸려가고 있는 문 전 대통령은 김정숙 여사와 함께 18일과 19일 도서전 현장에 참석했다. 18일에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책’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해 “책으로 축적한 지식의 힘으로 대한민국은 근대화됐고 경제와 민주주의의 성장을 이뤘다”고 축사를 전했다.

이 밖에도 국내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의 첫 책 『생명의 과실』1925 출간 1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기 위해 『애인의 선물』을 비롯한 작가의 대표작을 복각한 출판사 ‘핀드’,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시어로 독자를 사로잡은 김언희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미술가 이미래의 책을 가지고 온 ‘읻다’ 등 작은 출판사들의 활약도 인상적이었다. 이수지를 비롯해 신동준·정진호·노인경 등 한국의 대표적인 그림책 작가 18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 ‘바캉스 프로젝트’는 플립 북·아코디언 북 등 물성을 가진 그림책의 한계를 실험하는 독창적인 책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30대 학원강사 박모 씨는 인스타그램으로 살피던 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부스에서 책을 사고 사인도 직접 받았다. 박씨는 “10년 전쯤 왔던 도서전과는 너무 딴판”이라며 “사람이 너무 많아 힘들기는 하지만, 예쁜 책과 다양한 프로그램 덕분에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도서전 3일 차를 맞은 지난 20일. 수많은 인파에 ‘기가 빨려’ 잠시 코엑스 안에 있는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쉬고 있었을 때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성의 대화에 귀가 쏠렸다. “오늘 고선경 시인 사인회 한다는데? 좀 이따 여기 가볼래?” “그러자. 그런데 있잖아, 요즘 허세로 책 읽는다고들 하잖아. 나는 아니거든. ‘도파민’ 터져서 본단 말이야….” 뒷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즐길 거리가 책밖에 없던 시절에 책은 정말로 ‘도파민’ 가득한 오락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알고리즘이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매분, 매초 맞춤형으로 떠다 먹여주는 시대. 아주 길어야 1분이면 완성된 콘텐츠 하나를 소비할 수 있게 된 시대. 진득하게 앉아 몇 시간, 몇 날을 붙잡아야 한 권을 다 읽어낼 수 있는 책은 독자에게 어떤 효용을 줄 것인가. 책을 만드는 이는 고민해야 한다. 유튜브가, 넷플릭스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책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그럴 때라야 비로소 책은 인간의 마지막 보루, ‘믿을 구석’이 될 것이다.

글 오경진 서울신문 문화체육부 기자 | 일러스트 slowreci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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