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본다는 것,
함께한다는 것,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
서울희곡상
수상자 하수민
지난 11월 8일, 서울문화재단은 제2회 서울희곡상 수상작으로 하수민 작가의 ‘엔드 월End Wall-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를 선정했다. 응모 자격과 소재, 분량에 제한을 두지 않은 이번 공모에 미발표 창작희곡 158편이 접수됐다. 수상자는 상금 2천만 원을 받게 되며, 작품은 향후 대학로극장 쿼드 제작공연으로 무대에 오른다. 하수민 작가 겸 연출가는 <슈미>2021, <새들의 무덤>2020, <떠돔 3부작-Good day Today, 무라, 찰칵>2014-20, <육쌍둥이>2014 등을 극작·연출했다.
‘엔드 월-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로 제2회 서울희곡상을 받았습니다. 상반기에는 <새들의 무덤>으로 서울연극제 대상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2024년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저는 연극을 늦게 시작해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년 평균 세 작품씩 공연했어요. 그런 과정에 있다보니 수상 소식은 정말 감사하지만, 이 상이 앞으로 제게 어떻게 소화가 될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요.
‘엔드 월’은 산업재해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요?
2021년에 벌어진 평택항 산재 사망 사고를 간단하게만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죽었다’ 정도로요. 20대 때는 현장에서 일을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였는지 어느 순간 그 사건에서 제 20대가 떠오르더라고요. ‘나는 어떻게 살아왔지?’ 저도 위험한 장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보니 관련한 내용을 리서치하게 됐어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파고 들어가니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더군요. 시스템도 문제지만, 너무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에 간 그 친구의 꿈은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하며 써 내려갔습니다.
<육쌍둥이>에서 용산 참사를, <새들의 무덤>에서 세월호 참사를 다뤘습니다. 사회적 참사를 이야기할 때면 비당사자인 창작자의 태도를 고민하게 되는데요. 무엇을 경계했나요?
사회 문제에서 모티프를 갖고 작품으로 확장하고 있지만, 작품을 보는 모두가 모티프가 된 사건을 알 수 있어요. 무엇보다 유가족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고 불안한 부분이 있죠. 한번은 <새들의 무덤>에 극단 노란리본 분들을 모신 적이 있어요. 저는 그분들이 공연을 보고 모두 우실 줄 알았는데, 웃으시더라고요. 그리곤 서로에게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얘기했어요. 참사를 잊을 수 없지만, 유가족 대부분이 동시대를 살아가고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비당사자인 우리가 참사가 일어난 그 시점에 머물러 있으면서 너무 조심스러워하지 않았나. 지금 상황에 맞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게 고귀해 보였어요. 그때 알았죠. 작품으로서 예의는 갖춰야 하지만, 과감하게 알려야 할 부분은 더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새들의 무덤> 초연에서는 유가족인 오루가 딸을 기억하기 위해 바다에 갔다면, 2024년 공연에서는 오루가 극장에 일하러 왔다가 불현듯 기억이 떠오르는 방식으로 수정했어요.
평택항 사고의 경우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는 중에 사고가 발생했지만, 그 외에도 쓰고 연출한 많은 작품이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연극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발견한 것 중 하나가, 제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이었어요. 어린 시절 호숫가 근처에 살았는데 그때의 저는 어딘가에 고정되거나 안정돼 있지 않았어요. 불안하고 두려웠던 요소들도 있고…. 20대에 서울에 올라와서는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떠돌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돼요. 저의 떠도는 감각이 자연스레 작품에 묻어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동시에 결국 집, ‘홈home’이라는 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욕망도 내재하고 있나 봐요. 저에게 가족은 해결되지 못한 숙제 같아요. ‘엔드 월’에는 다른 산재 사고를 겪은 아성과 무명이 등장하는데, 아성이는 아버지와 친밀한 사이지만 무명이는 그렇지 못한 면이 있어요. 떠돌고 싶은 마음과 다시 잘 봉합해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서 자꾸 가족 이야기가 작품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결국 정착하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정착하게 될까요?
죽겠죠.(웃음) 저에게는 연극을 만드는 것도 기쁨이지만, 떠도는 것 역시 연극 못지않은 기쁨이라서 계속 떠돌 것 같습니다.
건축을 전공하고, 영화 미술 작업을 오래 하다 늦게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연극을 하기로 결심하게 했나요?
동시대적 감각이요. 저는 살면서 ‘동시대’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공간 연출’이 중요했는데, 2005년에 그리스 연출가 미하일 마르마리노스Michail Marmarinos의 <아가멤논>을 보고 한 대 맞은 거죠.(웃음) 살아 있는 인간이 객석에도 무대에도 있다는 점에서, 연극이 동시대의 최전선에 있는 예술로 느껴졌어요. 이후 미하일 마르마리노스의 <애국가>2017에 참여하게 됐고, 다큐멘터리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동시대성을 탑재하고 있다보니 멋있고 재밌었어요.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렇게 시작했어요. 하지만 희곡 쓰기를 배운 게 아니라 제 식대로 쓰다 보니 2014년에 처음 쓴 ‘육쌍둥이’는 다들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당시 공연에 출연한 강애심 선배님은 사람이 좋아서 했지, 글만 보면 (작품에 출연) 안 했을 거라고 하시거든요.(웃음) 지금 보면 이걸 어떻게 썼나 싶지만, 객관적이지 않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작품이라 좀 사랑스럽기도 해요. 저는 완성이 아닌, 계속 동시대에 반응하는 작품을 하기를 원해요. 지금에 반응하는 작품이 동시대에 반응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엔드 월’을 막 끝냈을 때 제가 조금 확장됐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쁘더라고요.
공간 연출에 관한 감각은 희곡을 쓰고 연출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나요?
희곡을 문학으로 접근하는 분들이 있다면, 저는 공연을 위한 스크립트로 여겨요. ‘엔드 월’도 연습실에 가면 모두 해체될 거예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공간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영화 미술을 했기 때문에 일단 세트를 세울 것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시각적인 예민함이 있다 보니 연출할 때는 ‘꼭 필요한 것인가’를 가장 많이 고민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리예요. 시각적으로 비어 있어도 소리가 채워지면 공간과 상황을 상상할 수 있어요. 특히 연극은 배우가 핵심이기 때문에, 배우들이 가진 소리와 태도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엔드 월’에 수없이 반복되는 “쿵”이라는 단어도 연출가로서의 방향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네요.
작품을 준비하며 실제 평택항에 가봤어요. 계속 쿵쿵대는 소리가 들려요. 과연
이 소리에 익숙해질 수 있는 건가 싶더라고요. 그저 담담하게 받아낼 뿐이지…. 그럼에도 사람들은 노동하고 있다는 게 제게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동시대성을 깃발 삼아 10여 년의 시간을 달려왔습니다. ‘동시대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소화하고 있나요?
어떤 주제나 형식으로서의 동시대성을 말하기도 하죠. 그런데 저에게 동시대성은 살아 있음의 확인 같아요. 연극이 동시대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객석과 무대의 사람들이 같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게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고요. 무대는 허구고 아래는 현실이지만, 서로 마주 본다는 건 함께하는 것이고 함께한다는 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에요. 마주 보고 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동시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길 위에서 벌어지는 ‘떠돔 시리즈’, 현대사의 비극을 담은 ‘현대 시리즈’로 하수민의 세계를 보여줬습니다. 이후의 작품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앞으로는 제가 감각하는 공간성과 희곡의 언어를 잘 섞어보고 싶어요. 12월에 공연할 설치 연극 <Don’t Take Me Home: 나를 집에 데려가지마>(12월 10일부터 15일까지 서울예술인지원센터 프로젝트룸)가 소박한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 공간에 영화의 영상과 사운드, 난민 활동가의 말, 오브제가 있어요. 관객에게 어떤 극이라기보다는 설치물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어요. 퍼포먼스도 설치일 수 있으니까요. 아직은 텍스트 위주의 연극이 많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죠. 저도 그게 궁금해서 시작했고 재미를 느끼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는 저만의 연극 만들기를 다시 꺼내려고 해요. 다른 감각으로 동시대를 전달하는 연극을 하고 싶어요.
타 공모에 당선되거나 발표되지 않은 창작희곡이라면 어떤 작품이든 응모할 수 있다. 원고와 작품 개요서, 지원신청서 등 서류를 갖춰 접수하면 전문가 서류 심의와 토론 심의를 거쳐 당선작을 발표한다. 우수한 희곡을 시상하는 것만 아니라 프로덕션 과정을 염두에 두기에 희곡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무대화 가능성과 제작 실현성 등을 함께 검토한다.
2023년 서울희곡상에 178편의 후보작이 몰렸고, 2024년 두 번째 공모 역시 158편이 접수되는 등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공모 기간을 45일 연장해 더 많은 이들이 문턱 없이 지원할 수 있도록 했으며, 꾸준히 동시대와 호흡하는 창작희곡을 발굴하고자 나아갈 계획이다.
제2회 수상작 | 하수민 ‘엔드 월(End Wall)-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글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