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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9월호

뮤지컬 배우 김호영, 예술적 환상 이면의 진심

뮤지컬 배우 김호영이 열정적으로만 연기하고 산다는 건 거의 오해다. 열정은 열정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냉정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는 걸, 그가 보여준다. 김호영은 무대 위에서 뜨겁게 연기하지만, 애드리브 거의 없이 철저한 계산으로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연기에 대한 ‘진심’이 제 길을 갈 때, 열정과 냉정은 그렇게 궁극에서 조우한다. 8월의 뜨거운 여름날 대학로에서 만난 김호영은 청량했다. “제가 무대 위에서 되게 뜨거워 보이기는 하나 의외로 굉장히 차갑게 식어 있을 때가 더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순간순간 잘 인지하는 것 같아요.”

이런 장기가 발휘된 작품 중 하나가 뮤지컬 <광화문연가>의 ‘월하’ 캐릭터였다. 주인공 명우의 시간여행 안내자이자 극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미스터리 캐릭터다. “월하 같은 캐릭터를 맡을 때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성적인 걸 많이 끄집어내려고 했어요.” 물론 뮤지컬 <킹키부츠>의 ‘찰리’, <렌트>의 ‘엔젤’을 연기할 때도 감성적으로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나 혼자 좋아서 끝내는 공연으로 가면 안 되니까”라는 이성적 판단 때문이다.

9월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여섯 번째 시즌의 막을 올리는 <킹키부츠>는 김호영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2002년 <렌트>로 데뷔해 2016년 이 뮤지컬의 재공연에 출연하기 전까지 김호영은 공연계에서 중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편이었다. 뮤지컬 <갬블러>, <라카지>, <프리실라>와 연극 <이爾>에 여장남자로 출연, 한때 ‘여장남자 전문 배우’로 불렸다.

이로 인해 ‘연기 좀 한다’는 세간의 평이 묻혔다. 하지만 사실은 언젠가 고개를 내민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의 섬세한 ‘몰리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코믹 연기 정점을 선보인 ‘산초’, 그리고 작심하고 이미지 변신을 위해 선택한 <킹키부츠>에서 성장 드라마를 보여준 구두 회사 사장 ‘찰리’ 등은 김호영이 아니면 내면을 끄집어내기 힘든 캐릭터였다.

“찰리는 오디션에 응시할 때부터 남다른 각오가 있었어요. 저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과 편견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때였거든요. 그런 점이 운 좋게 캐릭터랑 잘 맞아떨어졌어요. 2022년에 부상을 입은 배우를 대신해 갑자기 <킹키부츠>에 투입됐을 때도 혼자 연습해서 차질 없이 공연할 정도로 아끼는 작품이죠. 연습할 때 별명이 ‘인간 바이블’이었어요. 제가 맞춰보지 않아도 잘할 거라고 배우들 모두 믿었다네요. 하하.”

김호영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따라오는 에너지는 건강한 밝음이다. 애칭 ‘호이Hoy’를 따서 누구든 무장 해제시키는 에너지를 ‘호이스럽다’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각종 TV 예능, 홈쇼핑 등에서 보여준 생기발랄한 표현력도 그런 이미지에 한몫했다. 그런 에너지 덕에 작품에서 김호영만 보인다는 얘기도 일부에서 나왔다.

한 발 앞선 트렌드 리더, 두 발 앞선 김호영

하지만, 이 역시 오해다. 그의 활달한 에너지는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을 고르는 선구안으로 치환된다. 대표적인 예가 2010년 국내 초연한 음악극 <베로나의 두 신사>. 김호영은 이 작품에서 정의감에 넘치는 베로나의 로맨틱 가이 ‘밸런타인’ 역을 맡았다. ‘어른들의 동화’로 통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온갖 작품의 특징이 녹아든, 기상천외한 유머 감각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황당할 만큼 코믹 요소를 갖고 있는 작품인데, 최근 대학로에서 인기를 누린 뮤지컬 <난쟁이들>의 기법을 그 당시 이미 선보였던 거예요.” 2009년 동성 간 사랑이 정상인 가상의 세상을 소재로 한 뮤지컬 <자나, 돈트>에서 맡았던 ‘자나’ 역시 진보적인 캐릭터였다.

“사람이 한 발 혹은 반 발만 앞서면 리더가 되는데, 두 발 세 발 앞서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제가 후자인 경우예요. 한 발만 앞서가면 되게 리더 같고 ‘저 사람 굉장히 트렌디하다’고 인정받지만, 두 발 세 발 앞서가면 사람들이 기억도 못 해요.”

다양한 분야에서 김호영이 앞서가는 경험이 반복되다보니 그의 주변에서는 이런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호영아 너 지금 뭐 하고 싶니? 그걸 2년 뒤에 하면 대박이 날 거 같다!”

김호영은 또 앞서간 한류 뮤지컬 배우이기도 했다. 그가 여장남자 쇼걸 ‘지지’를 맡은 뮤지컬 <갬블러>가 2005년 한 달 동안 일본 9개 도시 투어를 돌며 큰 호응을 얻은 것. 당시 공연은 일본어로 진행했다. 극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지지 덕에 매번 공연장의 수은주는 가파르게 올라갔다.

“우리도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듯이 일본 역시 지역마다 억양이 달라요. 통역하는 분한테 계속 해서 뉘앙스를 물어보고 지역마다 다르게 시도했어요. 현지 관객분들이 너무 좋아하셔서 소름까지 돋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쇼적인 이미지에는 물론 양가적인 면이 있다. 김호영이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텐션이 올라와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다보니 업계 내에선 배우로서 그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대신 김호영의 상업적 가치를 인정하는 예능 프로그램, MC, 홈쇼핑, 유튜브 등 플랫폼에서 그를 찾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드라마·영화에서도 극을 환기할 수 있는 카메오 출연 제안을 많이 한다. “사실 카메오는 제가 하지 않아도 되는 역이잖아요. 대중 사이에서 인지도가 있는 어떤 누군가가 해도 되는 역할이죠.”

하지만 현 상황을 답답해하기보다 객관화하는 게 또 김호영의 장기다.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저에 대한 이미지가 아무래도 어느 한쪽으로 많이 쏠려 있어서 찾아주시는 게 어렵지 않을까 사실 느껴요. 저를 편견 없이 봐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예를 들어 <햄릿>의 햄릿, <갈매기>의 코스차로 절 섭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제작자들이 많지는 않겠죠. 이런 상황을 제가 너무 잘 알고 있다 보니까, 그래서 항상 ‘저는 교차로에 서 있다’고 얘기해요.”

자신의 좌표를 명확하게 하는 이는 진짜 현명한 사람이다. 김호영은 “현명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제가 갖고 있는 무기와 장기를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요. 그러다보니까 배우로서 혹은 방송인으로서, 쇼호스트로서 혹은 예능인으로서 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죠. 그래야 제가 더 일을 생산적으로 잘할 수 있거든요.”

뮤지컬 배우, 단단한 나의 뿌리

하지만 김호영의 뿌리가 배우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그는 배우 중에서도 ‘뮤지컬 배우’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김호영은 뮤지컬 배우로서 다진 끼와 능력으로, 다른 영역의 재능에 흥미롭게 도달한다. 뮤지컬이라는 장르 본체가 갖고 있는 다양성의 특질이 어떤 영역과도 접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제가 어디 가서 노래를 부른다고 해요. 팝pop한 노래든, 클래식한 노래든, 트로트든 장르 구분 없이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맞다. 저 사람 원래 뮤지컬 배우지’라는 인식이 박혀 있어서예요.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저는 스스로를 ‘뮤지컬 배우 김호영입니다’라고 소개해요.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해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함의가 생긴다고 할까요. 제 중심이 분명히 뿌리내려 잡혀 있으니까, 뭘 해도 중화되는 효과가 있는 거 같아요.”

뮤지컬로 인한 파생 효과는 이뿐만 아니다. 홈쇼핑에서 클렌저 같은 화장품을 소개해도 20년 넘는 뮤지컬 배우 경력이 믿음을 준다. “제가 뮤지컬 배우로서 무대에 수차례 오르며 얼마나 많은 두꺼운 화장을 해 봤겠어요. 화장 지우는 것에 얼마나 도가 텄겠냐 말이죠. 그러니까 보시는 분들이 다 납득이 되는 거죠.”

패션에서도 마찬가지다. 뮤지컬 배우들은 누구보다 화려한 의상을 소화해야 한다. 특히 성별을 가로지르는 독특한 캐릭터를 많이 맡은 김호영은 기상천외한 스타일의 옷을 다수 입어봤다. “패션 쪽으로 굉장히 이해가 깊다”는 것이다.

뮤지컬 배우로서 역량은 방송가도 자연스럽게 주름 잡는다. 라디오 DJ를 맡았을 때는 정확한 발성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 MBC TV 예능 프로그램 <심야괴담회>에선 사연을 구연동화처럼 전해야 하는데, 뮤지컬 배우는 상황을 극대화해서 실감 나게 전달하는 데 최적화된 이들 아닌가.

“뮤지컬 배우로 일을 시작했고 뮤지컬 배우로서 어떤 걸 계속 놓치지 않고 있는 점이 지금 제가 하는 여러 가지 일에 많은 도움을 주고, 시너지를 내고 있죠.”

김호영은 이런 예술의 힘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심어주고 있다. 2021년부터 예술 후원금을 모으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나무’ 캠페인을 돕고 있다. 학창 시절 각종 청소년 연극제에 나가서 좋은 경험을 쌓은 김호영은 또 작년엔 제8회 청소년을 위한 공연예술축제 홍보대사로 활약했다. 한편으론 절친한 연출가 이태린이 9월 무대에 올리는 연극 <시뮬라시옹>이 더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관객과의 대화 사회자를 자청하기도 했다.

“제 친구인 걸 떠나서 좋은 예술가들이 더 소개됐으면 해요. 일단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현장에 오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그림은 갤러리에 가서 봐야 진가를 알 수 있고, 공연 역시 공연장에 와야 그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미력하나마 제가 예술을 알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최대한 많은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관객들과 직접 만나는 현장도 찾는다. 9월 25일 열리는 서울스테이지 2024 ‘김호영의 호이쇼’도 그중 하나다. 폭넓은 예술·연예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예술가로서 김호영의 목표와 삶을 들을 수 있는 자리다. 무엇보다 그가 품어온 ‘예술가의 진심’을 꺼내놓는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기반 삼아 현실적인 얘기를 많이 하지 않을까 했다. 예술가 혹은 창작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다들 알 거라는 생각에서다.

“‘나 배우가 되고 싶어’, ‘예술인이 될 거야’라는 건 꿈이었고 환상적인 일이었지만, 실제로 프로 무대에 데뷔해서 공연을 올리고 계속 일하는 건 현실이에요. 현실은 곧 ‘생계’와 같은 말이죠. 그렇다면 ‘나는 예술가로서 어떻게 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부분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단순히 예술가가 멋져 보여서, 내지는 한 번쯤 해 볼까 싶어 뛰어들 만한 일은 아니라는 얘기죠. 그런 현실적인 얘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요.” 예술가도 무엇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얘기다.

항상 밝고 쾌활하며 환상 속에 살아가는 듯한 김호영은 이처럼 예술의 겉이 아닌 이면의 진심을 들여다볼 줄 안다. 예술은 관객을 감동하게 하지만, 때론 현실을 얼어붙게 한다. 그걸 녹이는 건 냉철한 판단과 함께 예술을 도구가 아닌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진심이다. 그 예술의 진심이 또 유연하다는 걸 김호영은 누구보다 잘 안다.

“제 말의 전제는, 제가 다 맞다는 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삶이 다르고, 경우의 수가 많으니까요. 제 경험은 이러하니,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몇몇 분이라도 제 이야기로 인해 자신을 재점검한다면, 그때만큼 진심이 통하는 순간도 없겠죠.”

  • 서울스테이지 2024 ‘김호영의 호이쇼’

    9월 25일 정오 | 청년예술청



이재훈 뉴시스 기자
사진 Studio K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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