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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6월호

예술인 아카이브

안희연

문학/시
b.1986
연희문학창작촌 2022~2023년 운영위원
서울시민예술학교 2024년 봄 시즌 ‘시를 낭독하는 저녁’

시 쓰는 안희연입니다.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2015,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2019,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2020과 산문집 『단어의 집』2021,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2023 등을 썼습니다.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기 위해, 슬픔의 결과 겹을 더 잘 헤아리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오늘도 읽고 쓰는 삶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대학 재학 시절 잡지 ‘대학내일’의 문화팀 학생 리포터로 활동했습니다. 1년간 휴학하고 신간 영화 리뷰, 영화제 취재, 인터뷰 등을 맡아서 했어요. 혼자 쓰고 혼자 보는 글이 아닌, 공적 자리에서의 글쓰기를 연습하는 계기가 된 시기였습니다. 자연스레 읽기와 쓰기에 대한 감각이 제 안에 자리 잡았고, 제 이름으로 된 책을 갖고 싶다는 열망도 품게 됐고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글쓰기의 복판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020년 출간한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첫 시집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하는 예술의 물성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책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것이었고, 제가 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더군요. 시집의 독자께서 소회를 공유해 주실 때마다 수신자가 있다는 것, 그 수신자는 보이지 않는 유령이 아니라 형태와 목소리를 가진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독자에게 ‘눈eyes’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제가 쓰는 글의 중요성과 책임감을 느껴요.

저의 시는 인간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태어납니다. ‘세계의 소멸과 존재의 몰락이 진행되는 가장 어두운 세계를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자의 통증을 쓰는 시인’(문학평론가 김수이)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살아 있다는 이유로 경험하게 되는 존재론적 고독의 풍경을 포착하는 시인이고, 무딘 상태에서는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인간 내면의 미세한 균열과 파동을 섬세하게 언어화하고자 노력합니다. 특히 최근에는 이전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창작에 임하게 되는데요. 가까운 이들의 연이은 죽음을 경험하며, 어떻게든 죽음에서 삶으로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한 시를 씁니다. 어쩌면 저에게 시는 ‘함부로 죽지 말아 달라는 간청’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산문집 『단어의 집』 표지

영감은 온갖 곳에서 찾아옵니다. 주로 버스나 기차 같은 이동 수단에서 메모할 때가 많은데 그렇게 두서없이 적어둔 단어나 문장, 생각의 편린이 재료가 돼 한 편의 시로 태어나곤 해요. 특히 저는 단어를 가지고 사유하는 습성이 강해 단어 메모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혹은 언어화되기 이전의 이미지, 특히 사진이나 회화 작품을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시가 잘 나아가지 않을 땐 사진집을 뒤적이거나 필히 몸을 움직여 전시를 보러 가요. 언어화되지는 않았으나 말을 걸어오는 장면 앞에 섰을 때 자연스레 제 안에서 생성되는 언어들이 있어요. 그 순간과의 만남이 정말 즐겁고 기다려집니다.

가장 최근에 낸 산문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엄유정 작가의 드로잉과 페인팅을 좋아합니다. 가장 최근에는 갤러리 forever☆에서 열린 개인전 《눈에서 돌From snow to stones》에 다녀왔는데, 문을 열고 갤러리로 들어서는 순간 이전과 다른 시간성을 경험했어요. 밖은 차가 분주히 오가는 봄날의 도로변인데 갤러리 안은 적막이 흐르는 겨울의 복판이었거든요. 돌 혹은 나무 위에 눈이 쌓인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었는데요. 우리가 무언가를 쌓으려면 쌓을 수 있는 바탕, 토대가 있어야 하잖아요. 아마 순서상으로는 바탕을 먼저 그린 뒤 그 위에 눈을 쌓았을 텐데, 전시의 제목은 그와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작가가 ‘돌에서 눈’이 아니라 ‘눈에서 돌’로 흐르는 방향을 제시한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게 됐고요. 저에게 그것은 어떤 본질에 관한 물음으로 읽혔습니다. 작가가 눈을 그리는 마음과 돌을 그리는 마음이 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다르다면 왜 달랐을까, 어떻게 달랐을까, 제 안에서 여러 질문이 생성되더군요. 저를 이토록 많은 질문 속에 데려다 놓았으니 좋은 전시가 아닐 수 없겠지요.

6월 안에 새 시집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4년 만에 선보이는 신간이라 떨리는 마음이에요. 한참 걷는 동안에는 알 수 없지만 문득 뒤돌아볼 때 알아차리고 마는 것들이 있지요. 생각하기도 전에 이해돼버리는 것들이요. 저는 계속 그것을 시로 구현해내고 싶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관한 탐구를 멈추지 않으면서요. 잔존하는 반딧불 같은 시, 끊어지기 직전의 필라멘트 같은 시, 그러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시를 계속 써보겠습니다.

정리 [문화+서울] 편집위원 전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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