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을 감수하는 창작의 자유를 위하여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공동창작워크숍 결과 전시
송상원, <보이세요? 저도 안 보여요>, 2024,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130.3×162.2cm
공동창작워크숍을 기획하기로 했다. 서울문화재단 창작공간에서 함께할 창작자를 모집했다.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작가들과 공동창작워크숍에 참여할 분을 찾습니다.’ 그렇게 함께하게 된 참여자들은 장애에 대한 경험이 있거나, 없는 와중에도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는 장애 담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경력과 연령대는 모두 달랐다. ‘어떤 기획을 해야 하지?’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입주작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공동창작워크숍의 목표는 지속해서 교류할 수 있는 동료를 만드는 데 두었다. 이동이 어렵거나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한정된 사회적 관계를 벗겨내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결과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됐다. 나는 작가들이 더 많이 만나고 부딪힐 수 있게 하기 위해 공동창작워크숍에 ‘포럼’이라는 가면을 씌웠다. 더 많이 질문하고 더 많이 싸우세요.
공동창작워크숍을 기획하는 당시의 나는 ‘실패의 기회를 빼앗기는 부당함’이라는 장애 담론에 꽂혀 있었다. 오랜 기간 신경 다양성 작가들과 함께 활동하며 느낀 것은, 취약한 장애인이라는 전제와 그렇기 때문에 보다 나은 사람이 앞서 배려한다는 다소 폭력적인 상황들을 마주하는 지겨움이었다. 일상에서도 실패를 빼앗기는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창작의 영역에서는 창작 주체 자신도 타인의 선제적 배려에 익숙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한참이 지나 깨닫게 되었을 때, 관계적 불균형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나는 이러한 것이 위험으로 느껴졌다. 창작이 ‘나다움’의 축을 세우고 회전하는 일이라면, 공동 창작을 위해서는 자신을 찾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먼저였다. 공동 창작이라는 사업화된 결과물에 목적을 두지 않고, 과정 자체와 모둠에서 맺어지는 관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공동창작워크숍의 표제를 ‘위험 포럼’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포럼을 진행하는 데 규칙이 될 ‘위험 원칙’을 세웠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을 때 앞선 배려에서 자유롭고, 솔직하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 서로 더 많이 부대낄 조건을 마련하고 싶었다.
<살아있는 병신들의 밤>과 <목비밀걸계번호이곡> 촬영 현장
‘위험 원칙’은 ➊ (될 수 있으면) 안 해 본 방법을 선택하기 ➋ 하기 어려운 질문 해 보기 ➌ 대답하기 어려우면 중얼거리기 ➍ (어려워도) 숨겨둔 것 꺼내기 ➎ 더 낯설고, 더 불안한 것 즐기기 ➏ 작업에 대한 비판적 태도 유지하기였다. 이 원칙들은 그 당시 기획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나는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작가들에게 ‘자발적 워크숍’을 운영할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자발적’이라고 제시된 워크숍에 작가들이 당황했다. 몇 번을 만나야 하는지, 얼마만큼을 만들어내야 하는지 반복적으로 물었다. 사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작가들이 창작이라는 자유를 창작지원 제도에 빼앗긴 것만 같아 슬프기도 했다. 작가들은 모둠의 궁합에 맞는 방법, 이야기하는 방법, 작업하는 방법을 만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위험 원칙’은 때로는 변명할 수 있는, 때로는 의지할 수 있는 틀이 됐다.
‘자발적 워크숍’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장애에 대한 일부 인식이 다소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장애를 경험하며 작가들은 장애를 정의하고자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장애를 찾는 것은 무색해지고 장애는 소통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유려한 말이나 문장을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려 깊은 관찰과 교감하려는 의지로서의 소통 말이다. 소통의 관점에서 보면 장애는 장애인에게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었다.
창작을 위해 작가들끼리 교신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혁명가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동료들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보듬기도 하고, 배우려는 자세로 임하기도 하면서 모둠에서의 자기 모습을 찾아갔다. 피할 수 없는 갈등은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를 할애해 남을 배려하기도 하고, 내 영역에 침범하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지켜보기도 했다. ‘자발적 워크숍’에서 작가들은 워크숍을 기획해 서로의 장르를 경험해 보기도 하고 예술과는 상관없는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나와 다른 예술의 방법을 탐구하는 동료와의 차이를 체감했다. 부대낌의 괴로움을 감내하는 과정은 일정 시간이 지나자 작가들에게 안정감이 됐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존재,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존재가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활동 이력만으로 증명할 수 있는 예술가의 정체성은 사회에서 늘 불안하지만 동료와 함께 하는 시간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위험 재앙! 그것이 바로 우리다》는 결국 나를 찾는 방법과 그 여정을 보여준다. 장애?비장애 예술가 20명이 지난 6개월간의 공동 창작으로 5개 섹션의 전시를 구성했다. ‘곤란포럼’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친구의 의미에 대해서 탐구했다. 장애와는 무관하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 어렵다는 데에 모두가 공감했다. ‘이노유와 림’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 공동의 세계에서 자신을 분명하게 지키면서도 서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애정의 형태를 찾았다. ‘풍질노도’는 같은 키워드, 같은 상황과 조건 속에서 각자가 작업을 진행하며 여기에서 나온 아주 다른 개인의 차이 그 자체를 즐겼다. 사소한 일상을 자연스럽게 나누면서 뜻하지 않게 발견한 균열로부터 서로를 이해하는 단서를 찾았다. ‘썬더볼트’는 공동 창작에서 재확인한 자신의 한계와 해방을 개별 작업으로 녹여냈다. 신을 향하거나, 아이를 키우거나, 아픈 몸을 치유하거나,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마음이 기우는 방향의 순응과 염원으로 발전시켜 갔다. ‘좀비’는 장애를 좀비에 비유하여 세계관을 일구었다. 공존을 위해 모둠원은 좀비의 언어를 번역하는 방법을 찾았고 Q레이터가 ‘나는 좀비다’라는 매니페스토를 작성하는 것으로 귀결했다. 지금까지 공동창작워크숍의 과정을 함께 하며 작가들이 몰두한 것은 장애나 소통보다도 나를 향하려는 노력이었다. 그 어떤 장애도 무색한 관계적 방법을 찾는 것 역시 나를 아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남준을 오마주한 우리의 선언과도 공명한다. 위험 재앙! 그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위험 재앙! 그것이 바로 우리다》
5월 3일부터 1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월요일 휴관)
노들섬 노들갤러리 1
*음성 해설 및 점자 안내, 수어 해설, 큰 글자 자료 제공
글 문화매개실천연구소 대표 이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