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로’는 왜
법정에 서게 됐나
3월 개봉한 안 퐁텐 감독의 영화 <볼레로>
3월 7일은 프랑스 국민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의 탄생일이었다. 라벨은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이끌었으며 근대 관현악의 기법을 다진 작곡가다. 1928년 초연된 그의 대표작 ‘볼레로Bolero’는 오랫동안 클래식 음악 세계 저작권 순위 1위를 지킨 작품이자,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관현악 작품 중 하나다. “‘볼레로’는 전 세계적으로 10분마다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작품이 17분 동안 이어지니, 언제 어디서나 연주되고 있는 것이죠.” 프랑스 작가·작곡가·음악출판사협회SACEM의 전 대표 로랑 프티지라르Laurent Petitgirard가 말한 것처럼. 그래서인지 라벨의 소개에는 늘 ‘볼레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올해에도 그의 생일을 기해 어김없이 ‘볼레로’ 관련 소식이 들린다. 안 퐁텐Anne Fontaine 감독의 영화 <볼레로>가 3월 6일 개봉했고, 프랑스 클래식 음악 전문지 ‘디아파종Diapason’은 ‘볼레로’ 특집호를 냈다.
그로부터 한 달 전 ‘볼레로’는 또 다른 이슈로 떠들썩했다. 바로 ‘볼레로’의 저작권을 둘러싼 공방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볼레로’의 공동 저작을 주장하는 예술가의 후손들이 SACEM을 상대로 저작권 등록을 요구하고 유효 기간을 늘려달라는 소송이 법정에 오른 것이다.
‘볼레로’는 2016년 5월 1일, 저작권 시효가 만료돼 공개 저작물로 전환됐다. 저작권은 통상 저작자 사후 70년까지 유효하다. 그러나 다음 날, 화가이자 ‘볼레로’의 발레 무대를 디자인한 알렉산드르 브누아Alexandre Benois, 1870-1960의 후손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볼레로’는 발레 모음곡과 관현악곡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이들은 브누아가 발레 모음곡 ‘볼레로’의 공동 저작자이며, 그의 사망일을 기준으로 저작권이 2039년까지 연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저작권 소송이 걸린 ‘볼레로’는 공개 저작물이 되지 못하고 보류 상태로 남았다.
여기서 잠깐, 프랑스의 저작권 제도를 살펴보자. 프랑스는 158년 전인 1866년, 저작권 보호 기간을 저작자 사후 50년으로 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쟁 기간만큼인 8년 120일 연장됐다. 1985년 7월에는 저작권 보호 기간이 사후 70년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볼레로’의 저작권은 라벨이 사망한 1937년 12월 28일로부터 78년 120일 후인 2016년 4월 30일까지 유지된 것이다.
SACEM은 ‘볼레로’의 저작권 시효가 만료되자마자 접수된 새 저작권자 요청을 거부했다. 브누아의 공동 창작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다. 후손들은 2018년 초연 당시 파리 오페라 사무총장이 브누아를 ‘저자’라고 표기한 문서를 법원에 제출한 뒤, SACEM을 상대로 책임 소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송에 대한 첫 소환이 올 2월에 이뤄졌다. 만약 브누아 후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볼레로’ 저작권은 2039년까지 연장된다. SACEM 측은 “‘볼레로’는 전 세계적으로 즉각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브누아가 공동 저작자였다면 그의 생전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적 공방의 동기는 금전적 이익이며, 이는 (라벨과 브누아) 두 사람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볼레로’ 첫 다섯 마디가 기록된 라벨의 악보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
1960년부터 현재까지 ‘볼레로’의 권리 보유자와 출판사에 지급된 저작권료 총액은 약 5천만 유로(한화 약 720억 원)에 이른다. 그런 데다 라벨이 미혼으로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나 상속 문제에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1937년, 라벨의 사후 그의 저작권은 형제 에두아르 라벨Edouard Ravel, 1878-1960에게 넘어갔고, 에두아르마저 사망한 후 그의 간호사와 간호사의 남편, 흑심을 품고 접근한 SACEM의 법률이사까지 저작권을 차지하기 위한 시도들이 계속됐다. 법률이사는 유령출판사를 차려 전속 악보 출판사인 뒤랑Durand 출판사와 공방 끝에 출판 저작료의 지분 50%도 확보했다. 파리 근교의 라벨 생가는 보수할 돈이 없어 천장이 갈라지고 물이 새는데, 천문학적인 라벨의 저작권료는 정작 라벨을 위해 쓰이지 않고 있다.
SACEM과 브누아 가의 소송 결과는 6월 24일에 나올 예정이다. 이번 소송이 중요한 이유는 협회의 역할에 대한 판례를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협회가 저작권 신청자의 요청을 처리하는 단순한 등록 대행 단체가 될지, 아니면 저작권의 시비를 가리는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아직도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2-1974, 프랑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 1899-1963, 페데리코 몸포우Federico Mompou, 1893-1987 등 20세기를 풍미한 클래식 음악 작곡가 가운데 저작권이 유효한 이들이 꽤 많은 상황에, 공개 저작물로 이롭게 쓰일 작품의 저작권을 악용해 수익 창구로 활용할 ‘빌런’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볼레로’ 특집호를 발행한 ‘디아파종’ 2024년 3월호 표지
라벨이 예술가로서 정점에 올랐던 50대 시절, 스페인풍 작품을 원한 발레 뤼스Ballet Russes의 무용수 이다 루빈시테인Ida Rubinstein의 의뢰로 작곡했다. 라벨은 안달루시아 전통춤인 볼레로의 리듬을 스네어 드럼으로 반복하며, 하나의 악기로 시작해 점차 악기를 하나씩 겹쳐나간다. 셈여림은 pp(피아니시모)로 시작해 ff(포르티시모)로 끝나는 하나의 크레셴도로, 음악이 점차 풍부해지고 고조된 피날레로 끝난다. 단순한 구조에 무아지경에 이르는 파격적인 형태는 당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발레 버전은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의 1961년 안무작이 잘 알려져 있다.
글 음악평론가 전윤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