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신파를 하는 이유
<신파의 세기>에 관한 대화
대학로극장 쿼드는 올해 마지막 제작 공연으로 정진새 작·연출 <신파의 세기>를 무대에 올린다. 드라마에만 있고 현실에는 없는, 우리가 20세기에 두고 온 그것, ‘신파’를 꺼내 오늘날의 신파란 무엇인지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K-스러운 신파를 펼쳐낸다. 대학로극장 쿼드 5층 연습실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연출가 정진새, 드라마터그 양근애, 그리고 배우 김준우·전선우가 함께했다.
서로가 생각하는 신파의 이미지와 그에 관한 생각이 달랐을 텐데, 신파를 어떻게 정의하고 시작했나?
정진새 신작을 제안받은 2021년은 코로나19 시기여서 연극 자체에 관한 질문과 각성이 있었다. 한국 연극이 가진 특징이자 맹점이 ‘신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합의한 신파성은 서사가 빈약하고 논리가 억지스러운데 감정 과잉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부정적인 인상이었고, 이것을 어떻게 주제화할 것인지를 주로 논의했다. 전선우 주제는 흥미로웠지만 광범위하기도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 그런데 이야기하다 보니 정서 차원에서 보면 트로트도 신파의 한 종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게 신파 아닐까. 양근애 신파에 대한 내 안의 모순이 있다. 신파 장면을 싫어하지만, 근대극 연구자로서는 사람들의 욕망과 필요를 짚어내게 돼서 흥미로운 거다. <신파의 세기>는 한국 연극에 관한 질문을 신파로 통과한다는 의미, 양가감정 사이를 오가며 만들어내는 재미가 있다. 김준우 지금의 10대, 20대가 신파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나에게 신파는 감정 과잉이고 흔한 방식이라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신파에 속절없이 무너질 때가 있더라. 정진새 워크숍 중 울음참기대회가 있었다. 젊은 청년이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할 때 시민들이 막아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국의 가족을 만나는 장면, 반려동물과 보호자가 오랜만에 마주하는 영상 등을 보면서 울지 않는 것이었는데, 준우 배우가 1등을 했다. 참관자였던 안무 선생님이 폭풍 오열하시던 게 웃기기도, 공감되기도 했다. 나이, 세대, 젠더처럼 개인의 정체성과 입장에 따라 무너지는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있었나
정진새 연출가로서 신파 콘텐츠를 보니 그 연출이 의외로 정교하더라. 중심이 되는 배우의 연기 주위로 카메라의 시점, 음악, 자막, 내레이션 등이 포진해 있다. 이런 빌드업에다 감정의 출구까지도 잘 만들어놓았더라. 장면을 끌어내기 위한 신파 협업이 있고, 한국 창작자들이 신파 만들기에 관해 설정한 기본값이 높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슬픔이라는 취약한 감정을 제작진이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양근애 <신파의 세기> 안에도 신파 장면이 꽤 나오는데, 그 장면만 떼놓고 보면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전후 사정을 보면 이해가 되고 일정 부분 필요한 정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파를 무턱대고 낡고 과잉이라고 얘기하기보다는, 어떤 순간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잘 포착하는 게 중요했다. 전선우 양가감정을 느꼈다. 나를 어떤 감정에 강압적으로 넣으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오히려 확 멀어지게 하는데, 작품에 그런 게 없으면 또 너무 건조하고 재미도 없다. 감정을 시원하게 표현했을 때 나 역시도 그 안으로 확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 있다. 신파라고 불리는 것들을 완전히 거부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연기에 있어서 정교한 조절이 필요했다.
가상의 국가 치르치르스탄에 투영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양근애 우리 사회는 예술과 문화를 정치·사회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이중 잣대를 적용한다. 이런 문제 제기를 위해 필요하고도 매력적인 설정이 신생 자립국이었다. 공간을 한국으로 설정하면 어떤 시대이더라도 정치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가상 국가를 설정해 한국을 벗어남으로써 자유가 생겼지만, 동시에 마리 클리셰 공주가 지키려는 것에서 계속 기시감이 느껴졌다. 정진새 클리셰’라는 단어를 통해 정권 차원에서 만들려 했던 국민 문화의 아주 많은 부분이 이해됐다. 이를테면 박정희 시대에 이순신 동상을 왜 광화문광장에 세우려고 했는지, 전두환 시대에 3S가 왜 필요했는지. 지도자를 클리셰 관점에서 보니까 분열된 국민을 모을 수 있는 건 그런 문화인 거다. 이게 신파만의 문제가 아니라 K-팝도 그렇게 보이더라. 국가에 의해 전유되는 예술은 위험하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이를 당연히 비판하고 그 시대를 끝내야 한다.
배우 전선우·김준우
가상으로 설정한 공간이지만, 중앙아시아에 관한 높은 이해가 필요했을 것 같다.
정진새 중앙아시아를 타자화한 부분 때문에 대대적인 대본 수정이 있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스탄’ 국가들을 일본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로 바라본 면이 있었다. 우리나라 신파극은 1910년대에 시작됐다. 신파의 기원이나 신파성 자체가 나라 잃은 민족의 현실에서 비롯했고, 그것이 세계 보편성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라를 잃은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일원으로 오히려 강대국인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뜨거움의 방식으로 중앙아시아를 이해하면 무례에 가까운 오해를 낳게 된다. 제3세계 식민지도 저마다 국민이 단합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며 지내왔다. 삼바가 그렇다. 라틴 원주민의 전통 음악과 남미를 지배한 유럽 귀족의 클래식 음악,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 사람들의 리듬감이 잘 조합된 게 브라질의 삼바다. 신파는 의견이 분분한 것에 비해, 삼바는 국가가 장난치지도 않고 국민들이 진정으로 즐기는 문화다. 이 작업을 통해 정진새라는 인간, 작가가 가진 문화의 틀이 아주 좁다는 걸 알게 됐다. 양근애 중앙아시아 워크숍을 통해 민족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없는 갈등도 촘촘히 만들어내는데, 중앙아시아는 단위가 크다. 우리에게 ‘옛것’이 30년이라면 거기는 100년 단위고, 그래서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 작품의 출발은 한국 연극이었는데, 문화 전반의 이야기로 확장된 셈이다.
‘미스터케이’, ‘마리 클리셰’, ‘디아스포라’ 등의 작명에서도 작품이 가진 자조적인 면이 엿보인다.
정진새 준우 배우는 똑똑해 보이지만 찌질한 면도 있고, 찌질하면서도 그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독특함이 있다. 그런 게 시대가 발견하지 못한 좋은 얼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대표성으로 ‘미스터케이’, ‘김민식’이라는 가장 평범한 이름을 줬다. 그런데 준우 배우가 연습 중에 ‘백성 민에 먹을 식’이라고 스스로 설정하길래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나아가는구나 싶었다.(웃음) ‘클리셰’라는 단어에는 힘이 있다. 뭔가를 만들다가도 ‘그거 클리셰야’라고 하면 다 엎고 안 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오히려 그런 이름을 전유해보고 싶었다. 선우 배우는 기품은 있는데 나사가 빠진 듯한 인물을 잘 표현해서 ‘마리 클리셰’를 연기하게 됐다. 마리 클리셰나 김민식 모두 극단문이 가진 일종의 스타일이다. 거창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결국 허세고 뭔가를 비판하기 위한 상징성만 있는 이름. 같이 작업한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그런 이름을 잘 갖고 노는 편이다. 김준우 신파라는 주제를 떠나서 연출님의 작품은 전형성을 벗어나 있어 그런 인물을 어떻게 더 개성 있게 만들고 표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항상 있다.
연출가 정진새·드라마터그 양근애
마리 클리셰 공주는 K-신파를 치르치르스탄에 이식해 왕위를 계승하려 한다. “신파극이 아닌 K-신파”라는 대사가 있는데, 여기서 ‘K’란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진새 ‘K’는 정부나 비즈니스 차원에서 붙여지고, 창작자들은 붙여진 K에 대한 일종의 역반응 비판의 용도로 사용한다. 2020년에 공연한 <2021 대학수학능력시험 통합사회탐구 영역>에 “K-공교육에서는 그러지 않습니다”라는 대사가 있었다. 본질적인 문제를 K-공교육에서는 내지 않는다는 의미였는데, 어떤 표현을 만들다가 막혔을 때 K를 붙이니까 오히려 문제의 핵심에 다가간다는 걸 발견한 거다. 본질은 빼놓고 허울 좋은 것을 ‘K’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 시민으로서는 ‘국가가 너를 보고 있어, 국위선양이 기본값이 되어야 해’라고 옥죄는 말 같다. 고유성과 개별성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거다. 양근애 한국이라는 도장을 찍어서 마치 한국적인 문화가 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신파만큼이나 비판이 필요하다.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게 실재가 없는데 ‘K’라는 말로 규정하는 게 아닐까. ‘한류’가 ‘K’로 바뀌면서 긍정적인 무언가처럼 이야기된다. 긍정적 의미라면 경제적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포장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자본 없이 예술을 할 수 없으니 정말로 ‘K’를 하려면 국가에서 한국 문화에 투자하고 예술인 지원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얘기는 못 들어본 것 같다. 김준우 작품 준비하면서 K-연극을 고민하게 됐다. 동양극장에 대한 인터뷰 자료를 보게 됐는데, 1930년대가 지금보다 배우들의 월급도 더 많고 시스템도 더 좋더라. 미투 이후 한국 연극이 변했다고 하지만, 허울만 좋아진 것이지 내실은 못 따라가는 느낌이다. 그게 지금의 K-연극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우리를 대입하는 다른 시공간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가?
정진새 신파에 담긴 맥락을 알고 즐기는 게 중요하다. 역사·맥락적 의미일 수도 있고 그것을 만드는 노동자의 생활, 신파를 만들기 위한 훈련 같은 것들이다. 관객들이 지금 즐기는 신파에 이런 면이 있으니, 앞으로 잘 새기고 21세기나 22세기에는 신파의 비중을 줄이거나 적절히 쓰는 데 동참하면 어떨까요, 정도의 제안일 거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신파의 가능성이다. 신파는 약한 여성을 괴롭히는 이야기고, 막장은 강한 여성을 괴롭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약한 존재를 돌보는 쪽으로의 신파, 이를테면 퀴어 신파, 동물 신파, 비인간 신파처럼 신파의 수혜를 전복해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예술가·관객에게 하고 싶다. 전선우 일단은 재밌게 봐주면 좋겠다. 재미가 있어야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 기울여 들어주실 테니까. 관객들도 신파의 감정에 휩싸이기보다는 의도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준우 신파를 잘 즐기는 분들이 계실 거다. 신파가 왜 나빠? 왜 즐기면 안 돼? 그 이면에 무조건 즐길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 혹은 잘못된 방향으로 제시되는 신파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양근애 지금의 관객들은 모든 걸 키치적으로 소비하니 연극을 즐기는 방식도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지금 신파가 오히려 새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의 것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맥락에 맞게 재구성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 신파를 하는 건 그 이유에서다.
11월 28일부터 12월 17일까지(월 공연 없음) | 대학로극장 쿼드
글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 |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