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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1월호

생활의 골목을 찾아
떠나는 산책
독산동

여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가을이 왔다 싶었는데 며칠째 오락가락하는 날씨가 기어이 비를 뿌리는 날이다. 마치 초겨울처럼 쌀쌀해진 기온이 여름의 끝자락을 본 지 며칠 만에 다시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독산역 1번 출구로 나와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겨우 가려가며 금천예술공장으로 향한다. 2022년 금천예술공장의 13기 입주작가 16인의 작업실을 시민에게 공개하는 오픈스튜디오 행사를 보기 위해서다.

금천예술공장, 독산동의 새로운 활력

1975년 지어져 50년 가까이 된 인쇄공장을 리모델링해 2009년 문을 연 금천예술공장은 매해 공모를 통해 시각예술 분야의 예술가를 선발하며 1년간 창작공간을 제공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장의 정문으로 들어서니 오른쪽 창고동의 지붕에 파이프로 만든 거대한 로봇 조형물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올해 오픈스튜디오 행사는 10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느슨한 포옹’이라는 주제로 ‘예술가의 방’을 오픈하는 것과 동시에 ‘실험 프로젝트’ ‘아티스트 토크’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층으로 들어서니 비가 오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스튜디오를 방문해 예술가의 작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오픈스튜디오 기간만큼은 각각의 작업실이 작가의 개인전보다도 풍성한 이야기를 전한다. 예술가의 작업은 결과물로 대중과 만나지만 그 결과물에는 그것을 만들기 위한 치열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 과정이 드러나는 작업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전시장이기도 하다. 3층의 전시장인 PS333에서 진행되는 ‘아티스트 토크’도 흥미로웠다. 이날은 ‘모험인가, 보험인가: 미술 활동에 대한 몇 가지 입장’이라는 주제로 3명의 작가와 관객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동 작업장인 창고동에서 입주작가 16인의 소개 영상을 흥미롭게 관람했는데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작가를 직접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금천예술공장의 오픈스튜디오를 관람하고 나올 때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지만 독산동의 공기에는 예전 구로공단이었을 때의 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국가의 수출산업을 책임지던 구로공단의 역사가 지나간 페이지로 넘어간 독산동에 금천예술공장이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첫 장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까운 가산동과 구로동이 가산디지털단지와 구로디지털단지라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첨단의 이름을 얻었을 때도 독산동은 여전히 독산동 준공업지역이다.
독산동의 인상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워 보였다. 오래된 작은 공장과 사무실, 아파트와 빌라, 요즘 지은 것처럼 보이는 깨끗한 신축 오피스텔과 아파트형 공장이 경계 없이 모여 있다. 오래된 시간과 새로운 시간이 뒤섞여 있고, 낡은 집과 새집이 마주 보고 있고,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 비가 내리는 일요일, 독산동의 공장은 정문을 걸어 잠그고 짧은 휴식에 들어갔다. 길가에 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어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끝끝내 변하지 않는 삶의 의지가 가득한 동네

문래동과 성수동의 준공업지역이 젊은 세대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힙한’ 장소로 다시 태어나는 동안에도 독산동의 준공업지역은 구로공단의 마지막 지문처럼 남아 있다. 여전히 독산동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어린 여공이 ‘공순이’라는 멸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세월이 변하면 거리도 변하기 마련이다. 2022년 가을의 독산동 골목에서는 그 시절의 ‘공순이’를 더는 찾을 수 없고, 어린 누나가 가족의 생계와 동생의 학비를 책임질 일도 없다. 가끔 편한 복장의 동네 주민과 말끔하게 차려입은 방문객이 지나갈 뿐이다.
조금씩 잦아드는 10월의 가을비 아래 우산을 받쳐 들고 독산동 거리를 지나 금천뮤지컬센터로 향했다. 금천뮤지컬센터는 2021년 11월에 개관했다. 공연장, 연습실, 강의실, 창작공간 등이 갖춰진 전국 최초의 뮤지컬 특화 공간이다. 청소년을 포함해 지역 주민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창작 뮤지컬 제작과 공연에 힘쓰고 있다. 가산중학교의 학생 수 감소로 생긴 빈 교실의 일부를 재단장해 개관했다. 삭막할 듯한 독산동의 준공업지역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독산동의 일부 지역은 재개발돼 제법 도시계획적 면모를 갖추고 아파트 단지와 공원이 조성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예전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독산동은 특별한 것 없는 삶의 골목으로 채워져 있다. 성수동이나 문래동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예쁜 길도, 눈길을 끄는 독특한 느낌의 가게도 별로 없지만 그 대신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생활의 시간이 가득하다. 그것은 세상의 밑바탕을 이루는 치열한 생산의 본거지이자 험한 세상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 같은 생활의 골목이다. 이 골목 속에는 변해 버린 세상과 삶의 방식 속에서도 끝끝내 변하지 않는 삶의 의지가 가득하다.
골목을 나와 독산역 쪽으로 향하다가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다. ‘ART GALLERY·ART STUDIO·ART MOMENT’라는 큰 글자 아래 ‘예술의 시간’이라는 작은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인 영일프레시젼에서 운영하는 갤러리다. 원래 공장의 기숙사였던 곳을 고쳐 갤러리와 분위기 있는 카페로 만들었다고 한다. 독산동이 점점 흥미로운 곳으로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갤러리에서는 실연을 소재로 한 박혜수 작가의 〈모노포비아-외로움 공포증〉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3층의 카페에서 한창 북토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다음에 꼭 한번 들러봐야겠다. 독산동 산책을 마치고 독산역으로 가는 길. 지하철역 앞길의 이름이 ‘벚꽃길’이다. 매해 봄이면 이곳에 피는 벚꽃이 멋지다고 들었다.독산동을 다시 방문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글·그림 정연석_《서울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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