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을, 관객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대학로극장 쿼드 개관 페스티벌
잠깐 극장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보통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극장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프로시니엄Proscenium 형태의 극장일 것이다. 관객이 객석에 앉아 정면의 무대를 바라보는 가장 일반적 형태의 극장이다. 객석에서 무대가 액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액자형 무대’라고도 한다. 프로시니엄이 가장 전통적 형태의 극장이라면, 최근 몇 년 새 블랙박스Black box 극장이 공연계의 새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블랙박스 극장은 문자 그대로 검은색 상자처럼 생긴 공연장을 말한다. 비어 있는 공간에서 무대와 객석을 자유자재로 배치해 다양한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공간 자체에 이런 가능성이 내재하기 때문에 창작자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도화지 같은 공간이자 관객에게는 무대에 대한 거리감 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대학로극장 쿼드의 블랙박스 극장
한때 서울 대학로의 상징과도 같았던 옛 동숭아트센터 자리에 새로운 공공극장 ‘대학로극장 쿼드’가 7월 20일 문을 열었다. 약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프로시니엄 형태였던 옛 동숭홀이 가변형 블랙박스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최대 258석 규모의 쿼드는 창작 초연 중심의 ‘1차 제작·유통극장’을 표방한다. 7월 21일부터 8월 28일까지 6주간 이어진 쿼드의 개관 페스티벌은 블랙박스가 지닌 무한한 확장성을 보여주듯 클래식부터 재즈, 국악, 무용, 연극, 탈춤극, 다원예술 등 11개 장르, 12개 공연으로 채워졌다. 극장과 관객이 나누는 ‘첫인사’와 같은 개관 페스티벌에서 상연된 작품을 소개한다.
따로 또 함께 빚어낸 하모니
퓨전 국악 〈바람불다〉
정적이 흐르던 공연장이 다이내믹한 북소리로 가득 찬다. 흥겨운 리듬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어린이 관객.
아이들이 먼저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조금씩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던 다른 관객도 이내 다 같이
박수로 장단을 맞췄다. 8월 11일 쿼드에서 열린 〈전통한류 ‘바람불다’〉는 타악주자 이승호의 모둠북 협주곡으로
문을 열었다. 연주자와 관객이 호흡을 주고받으며 박수로 장단을 맞추고 추임새로 화답하며 어우러지는 것은 국악
공연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매력일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연 관람 시 경직될 수밖에 없었던 관객은 모처럼
축제에 참여한 듯 공연 속에 어우러졌다.
〈전통한류 ‘바람불다’〉는 2018년 창립한 사회적협동조합 놀터에 소속된 예술단체 ‘실크로드 뮤직 프렌즈
Silkroad Music Friends’가 선보인 공연이다. ‘실크로드’가 붙은 그룹명이 알려주는 것처럼 한국을 비롯해
몽골·우즈베키스탄·베트남 등 여러 아시아 국가의 연주자와 전통악기가 함께한다.
시원한 모둠북 연주로 문을 연 공연의 다음 주자는 섬세한 선율의 베트남 전통음악. 독특한 점은 베트남 연주자가
한국의 전통 타악기 ‘운라’로 베트남 음악 ‘망부望夫’를 들려줬다는 것이다. 우리 전통 소리에 매력을 느껴
한국에서 국악을 배우고 있는 베트남 연주자 양바오칸이 직접 운라를 개량해 베트남 남도선법으로 곡을 썼다고 한다.
독주 악기로는 잘 쓰이지 않던 음율 타악기 운라의 맑은 음색이 베트남 전통음악과 잘 어우러졌다.
이날 공연은 한 줄의 현으로 다양한 음정과 음색을 구현하는 베트남 악기 단보우를 비롯해 뿔피리·야탁·림베 등
몽골 전통악기, 도이라·루밥 등 우즈베키스탄 전통악기 소리를 한자리에서 접하는 기회였다. 한국 관객에게 생소한 아시아
전통악기로 ‘찔레꽃’ ‘도라지’ ‘아리랑’ 등 익숙한 선율을 들려줬다. 각 나라의 장단과 선율이 따로 또 함께 호흡하고
어우러지며 독특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실크로드 뮤직 프렌즈의 〈전통한류 ‘바람불다’〉 공연 현장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이강물)
마당과 극장의 경계를 허물다
탈춤극 〈아가멤논〉
8월 19~21일 쿼드 무대에 오른 〈풍편에 넌즞 들은 ‘아가멤논’〉은 블랙박스 극장의 확장성을 십분 활용한 탈춤극이다.
관객이 극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런웨이를 연상시키는 긴 사각의 무대다. 공연장 한가운데 들어선 무대 양쪽으로
객석이 서로 마주 보며 배치됐다. 구경꾼이 연희자를 둘러싼 채 진행되는 마당극의 ‘극장판’을 구현한 것 같은 무대 배치다.
가로 13m, 세로 4m의 직사각형 무대 한쪽 끝에는 흰 병풍이, 다른 한쪽에는 악단이 자리했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아가멤논〉은 그리스비극 ‘오레스테스 3부작’을 탈춤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웃음과 해학의 예술이라 할 수
있는 탈춤과 그리스비극의 만남은 어떨까. 〈아가멤논〉은 그리스비극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이 죽는 처참한 이야기다. 공연은 가족 간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욕망에 무릎 꿇는 이기심을 탈춤 특유의 해학과 넉살로 풀어내며 인간 존재의 허약함을 풍자한다.
탈춤꾼의 재담과 춤사위 등 ‘보는 즐거움’ 못지않게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음악그룹 ‘나무’가 들려주는 음악이다. 북과 대금, 피리 등
우리 전통악기부터 멜로디언과 더블베이스, 일렉트로닉 기타와 드럼까지 동서양 악기가 어우러져 독특한 사운드를 빚어냈다.
극의 초반 공포스러우면서도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슴 사냥’ 장면부터 아가멤논의 출항, 이어지는 복수 장면까지 음악은 극적
요소마다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탄탄하게 극을 떠받쳤다.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니아가 제물로 바쳐져 죽는 장면에선 소리꾼이 등장해
한국적 정서를 한껏 살린 판소리를 들려줬다.
이 공연은 관객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전 회차 배리어프리Barrier Free로 진행됐다. 수어통역과 문자 통역, 실시간
현장 음성해설이 제공됐다. 객석 맞은편에 자막 스크린과 수어통역사를 위한 별도의 무대가 배치됐는데 관객이 무대와 자막·수어통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효과적 배치였다. 네 명의 수어통역사는 배우 못지않는 열정적 연기로 큰 박수를 받았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풍편에 넌즞 들은 ‘아가멤논’〉 공연 현장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이강물)
‘신대학로 시대’ 공공극장의 역할 기대
6주간의 개관 페스티벌로 첫 출항을 마친 쿼드는 내년 정식 운영에 앞서 프리오픈Pre-Open 시즌으로 극장의 가능성을 시험할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문화재단은 쿼드 개관과 함께 “신新대학로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35개의 소극장이 모여 있는
대학로는 세계 최대의 소극장 밀집 지역이자 한국 공연예술의 산실 역할을 해왔지만, 과도한 상업화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위기를 맞았다.
대학로는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많은 공연장이 가동되는 장소지만, 많은 예술가가 대관료 상승으로 이곳을 떠났고, 진행되는 공연도 상업극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예술가의 활력보다 상업성이 짙어진 대학로에 ‘공공극장’의 존재와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대학로극장 쿼드가 예술가에게는 무한한
상상력과 새로운 실험의 기회를, 관객에게는 동시대 문화예술의 최전선을 만나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글 선명수_《경향신문》 기자 | 사진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