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고 싶은
친구 같은, 연희동
연희문학창작촌
여름 장마로 날씨가 며칠째 오락가락했다. 연희문학창작촌을 방문한 날에도 아침부터 심상치 않더니 기어코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연희문학창작촌은 연희동의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골목 안쪽에 있다. 몇 년 전에 이곳 정문까지 왔다가 되돌아간 적이 있다. 글 쓰는 작가들이 입주해 작업하는 공간임을 알고는 내부로 들어갈 용기를 내기가 힘들었다. 나에게 작가의 글방은 왠지 산사에서 수행하는 승려의 요사채처럼 외부인 출입 금지의 구역, 뭔가 신성한 공간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시 최초의 문학 전문 창작공간
그러고 보니 연희문학창작촌은 산사의 조용한 선방을 닮았다.
띄엄띄엄 위치한 네 채의 아담한 벽돌집 사이에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가 이룬 숲은 이곳이 연희동의 주택가 안쪽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촉촉이 젖은 소나무 숲은 집들로 빼곡한 연희동이라는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한 오아시스 같았다.
이곳은 마을 주민의 조용한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연희문학창작촌은 2009년 옛 시사편찬위원회 건물을 리모델링해 탄생한 서울시 최초의 문학 전문 창작공간이다.
글을 쓰고 향유하는 작가와 시민이 함께 다양한 문학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끌림’ ‘홀림’ ‘울림’ ‘들림’ 총 4개 동에 19개의 집필실과 야외무대, 문학미디어랩(책다방연희) 등의 공간
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는 17명의 작가가 입주해 창작에 매진하고 있다.
야외무대에서는 북토크 등 작가와 시민이 함께할 수 있는 문학 관련 행사를 진행하며 ‘울림’ 지하에는 작가와 시민 모두에게 개방한 ‘책다방연희’가 있다.
이곳에서는 문학·예술 관련 도서를 열람할 수 있고, 낭독회, 문학 교실, 작가 세미나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무인 카페로도 운영되며, 커피값은 천 원이다.
지금은 연희동을 자주 찾지 않지만 나에게 연희동은 꽤 친숙한 동네다.
예전에 연남동에 있는 화실에서 그림을 가르칠 때, 종종 그림을 그릴 때,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기 위해 연희동 굴다리 밑을 드나들곤 했다.
사실 연남동도 원래는 연희동이었다. 1975년 연희동에서 분리되면서 연남동이 됐다. 연남동은 연희동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몇 년 전 연희동의 마을 행사에서 연희동을 주제로 드로잉 강습을 하고 전시를 진행할 때, 두 번째 책에 연희동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취재하러 다닐 때 연희동을 자주 방문했다.
아직도 연희동 구석구석 못 가본 곳이 더 많지만 연희동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 같다. 바쁘게 살면서 잊고 지내다가도 가끔 보고 싶은 친구 같은 동네다.
작은 안산과 궁동산 너머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연희동
연희문학창작촌을 벗어나 4번 마을버스 종점 방향을 따라 오른쪽 골목으로 향한다.
예전에 그림으로 그렸던 연희궁아파트와 연희상가아파트 등 오래된 아파트를 지나 궁동근린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을 걷기 위해서다.
연희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증가로 위쪽 차도육교에 서면 연희동의 북쪽과 남쪽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안산도시자연공원과 홍제천 사이에 몇 년 전 공사가 한창이던 재개발 아파트가 그새 완성돼 연희동의 풍광을 바꾸고 있었다.
잠시 비가 그치니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작은 안산과 궁동산은 연희동의 서북쪽에 있다. 이 산은 인왕산에서 시작된 산자락이 안산을 거쳐 남서쪽으로 내려와 연희동을 지나면서 만들어졌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희동의 모습은 방송과 뉴스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연희동을 유명한 전직 대통령이 살았던 높은 담 아래 경찰의 경비가 삼엄한 곳, 맛있는 식당과 분위기 있는 카페가 모여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것이 모여 언젠가부터 연희동은 맛집이 많은 부자 동네처럼 인식됐다. 하지만 연희동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희동에 대한 생각은 작은 안산과 궁동산만 넘어가도 바뀐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좁고 가파른 계단길이 작은 집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가는 연희동이 있다.
궁동산의 허리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길. 4번 마을버스가 다니는 좁은 도로를 따라 걷는다.
조금씩 내리는 비 때문인지 길에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어 답답한 마스크를 잠시 벗고 신선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비로 씻겨진 공기가 폐 속까지 깨끗하게 하는 느낌이다. 이 길은 도로 오른쪽으로 정자와 벤치가 잘 갖춰진 작은 공원이 군데군데 있어 걷다 힘들면 쉬어가기도 좋다.
밤새 내린 비 덕에 촉촉하게 젖은 궁동산의 나무는 더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다.
궁동근린공원은 2010년에 조성됐다. 원래 이곳에는 지어진 지 약 40년 가까이 되는 연희시범아파트 10개 동이 병풍처럼 들어서 있었다.
궁동근린공원 산책길을 걸어 궁동산체육관을 지나면 연희동의 전경이 멀리서 잘 보이는 데크 전망대 몇 곳을 만난다.
나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연희동 풍경을 좋아한다. 멀리 안산 너머로 남산의 서울타워가 보이고 그 아래로 연희동의 낮은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그 집들 위로 눈에 보일 듯 말 듯 가는 여름비가 내리고 있다.
궁동근린공원 입구 작은 로터리에서 오늘의 산책을 마무리한다.
4번 마을버스가 잠시 쉬어가는 곳에서 나의 다리도 잠시 쉬기로 한다.
근린공원 산책길을 오르내리면서 비인지 땀인지 모를 것으로 젖은 옷을 정자 아래 벤치에서 잠시 말린다. 선선하게 부는 바
람이 기분 좋게 젖은 몸을 스쳐 지나간다. 자동차가 회차할 수 있는 로터리 너머로 키 작은 건물이 어깨를 맞댄 채 다닥다닥 붙어 있다.
눈앞의 단층 상가건물의 이마에 붙은 ‘둘리비디오’ 간판은 몇 년 전과 변함없다.
별것 아닌 그 오래된 간판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괜스레 반갑게 느껴진다.
비디오가게는 문을 닫은 지 오래지만 간판은 여전히 ‘둘리비디오’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글·그림 정연석_《서울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