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정수장의
추억을 찾아가는 길, 신월동
서서울예술교육센터
2010년대 초반에 2년간 지하철 5호선 까치산역 근처에서 살았다. 그때 주말이면 산책 삼아 자주 가던 곳이 있었다. 예전 정수장이었던 곳을 고쳐 만든 동네 근린공원이었는데 오래된 정수장의 구조물을 활용한 공원 시설 중앙의 넓은 호수가 좋아서 자주 찾았다. 지금은 서서울예술교육센터로 바뀐 가압장 시설이 공원의 진입부에 있다. 그곳을 보면서 늘 궁금했다. 그때의 가압장 시설은 가동을 멈춰 비어 있는 공간이었기에 왠지 이곳을 잘 활용하면 멋진 문화공간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달 취재 장소가 서서울예술교육센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치 헤어진 친구의 소식을 듣는 것처럼 괜히 반가웠다.
재생 공간에서 탄생하는 문화와 예술
2016년 개관한 서서울예술교육센터는 어린이·청소년 대상의 국내 최초 예술교육 전용 공간으로 김포가압장을 리모델링해 조성됐다. 어린이·청소년의 ‘예술적 놀 권리’ 구현을 위해 차별화된 예술놀이 콘텐츠를 연구·개발해 서울 서남권 학교와 지역에 제공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에 총 3개의 교육 스튜디오, 예술놀이 연구실, 전시·체험 공간인 미디어랩 등이 있다. 김포가압장은 1979년 신축돼 2003년까지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에 수돗물을 공급했다. 원래 물이 가득 담겨 있던 지하 1층의 외부 수조 공간은 교육이나 행사가 없을 때 동네 어린이의 훌륭한 놀이터가 된다. 서서울예술교육센터는 어린이·청소년의 예술교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어린이·청소년 대상의 교육 프로그램을 실험하고 실행하는 예술가를 위한 다양한 사업도 운영하고 있다.
서서울예술교육센터를 나온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서서울호수공원으로 향한다. 7월의 열기가 뜨거운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공원은 한적했다. 양천구 신월동에 위치한 서서울호수공원은 규모와 시설 면에서 서울에서도 손에 꼽히는 공원이자 인근 주민의 소중한 산책 공간이다. 이날도 산책 나온 동네 주민들이 시원한 호수와 주변의 나무 그늘이 짙은 산책로를 따라 느긋한 평일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서서울호수공원 주변 능골산의 숲과 낮은 등산로를 넘어가면 부천시다.
서서울호수공원은 2009년 개장했다. 이곳은 선유도공원처럼 용도 폐기된 옛 정수장을 고쳐 만든 공원이다. 1959년 김포정수장으로 문을 연 후 2003년 가동을 멈출 때까지 강서 지역의 수돗물 공급을 담당해 온 신월정수장을 ‘물’과 ‘재생’을 테마로 한 근사한 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오랫동안 시민들의 삶에 꼭 필요한 수돗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장소였던 정수장의 흔적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멋진 공원으로 만든 것이다. 중앙호수도 당시 정수장에 있던 모습 그대로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생명이 공존하는 곳
서서울호수공원의 명물은 축구장 2.5배 넓이의 중앙호수에 설치된 41개의 소리분수다. 김포공항과 가까운 신월동은 늘 비행기 소음으로 시끄럽지만 이 공원에서만큼은 그 비행기의 소음을 기다리게 된다. 바로 이 소리분수 때문인데, 공원 상공을 지나가는 80db 이상의 비행기 소리를 감지하면 분수가 작동한다. 비행기가 상공을 지날 때마다 하얀 분수가 시원하게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더운 여름에는 일부러 찾아가 비행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다.
서서울호수공원에는 옛 공원 시설을 적극적으로 재사용한 시설물도 눈에 띈다. 공원의 벤치와 자전거 보관대 등에 사용된 붉게 녹슨 송수관은 이곳이 과거 정수장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과 같다. 옛 정수장의 흔적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중앙호수 옆의 몬드리안정원은 옛 정수장의 침전조를 부분적으로 남겨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도록 한다. 옛 침전조의 낡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새로운 시설물과 어우러져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멋진 공원이 완성됐다.
과거 정수장의 흔적은 콘크리트 기둥을 이용해 파고라 구조물을 만든 옥상정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군데군데 부서져 낡은 콘크리트 기둥, 노출된 철근 주변에 자라는 푸른 담쟁이덩굴과 등나무는 이 오래되고 녹슨 구조물에 새로운 생명과 시간을 부여한다. 콘크리트는 생명이 없지만 이 푸른 식물들은 이 오래된 구조물을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이게 만든다.
옥상정원에서 다시 몬드리안정원의 상부를 가로질러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하늘길에 올라서면 몬드리안정원과 서서울호수공원이 더 잘 보인다. 이 하늘길은 공원을 더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과거의 흔적을 멀리서 조망하게 한다. 하늘길에서 내려와 호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문화데크 광장으로 향한다. 예전 주말마다 서서울호수공원을 찾았을 때 산책은 늘 이 데크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무리하곤 했다. 이곳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시간이 당시에는 그렇게 소중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받은 일주일간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가끔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김밥이나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기도 했는데 여기서 먹는 김밥은 당연히 더 맛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예전만큼 자주 이곳을 찾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1년에 몇 번씩 이 공원을 찾는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주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외로 사람들이 이곳을 잘 모른다는 사실에 가끔 놀란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르는 이곳을 더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몰래 숨겨두고 나만 조용히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에게 이곳은 버려진 정수장의 시간과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시간이 합쳐진 특별한 추억의 장소다.
글·그림 정연석_《서울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