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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월호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안무가 김보람 모두가 춤으로 말하는 세상을 꿈꾼다

요즘 가장 ‘힙’하고 ‘핫’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김보람 안무가에게 여러 성과에 대한 비결을 물을 때마다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운이 참 좋았어요.” <범 내려온다>를 비롯해 이날치와 함께한 유튜브 영상이 세계의 눈길을 끌고 인기 록 그룹 콜드플레이와의 협업, 명품 브랜드 구찌 광고까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성공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즐겁게 춤을 출 수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그는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전남 완도에서 자란 덕분이에요”

김보람 안무가가 춤을 사랑하는 마음을 얻을 수 있던 ‘운’은 그의 고향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초등학생 때부터 춤이 좋아서 춤을 시작했던 그 마음이 지금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는 게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면서다. 아무리 갈망하던 꿈이라도 그것이 일이 되면 또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그 스스로도 “나이가 들고 고된 세상을 살다 보면 나를 지키기 위해 마음이 변하기 마련”이라면서도 “다행히 춤을 계속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 서울에서 춤을 췄으면 뭐든 가깝게 접했겠지만 저는 먼 시골에서 텔레비전으로 서태지나 현진영 춤을 봤기 때문에 ‘춤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것보다 ‘내가 이렇게 춤을 따라 하는 것만도 재미있고 좋다’고 생각했어요. 겸손함을 같이 배웠기 때문에 지금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멀리서 춤을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지 않았나 해요.” 한결같은 마음은 엄청난 인기에도 굳게 자리했다. 비주류로 여겨진 현대무용을 대중과 가까이 만나게 했고, 그 덕에 이전보다 훨씬 바쁜 시간을 보내며 인기를 실감하고 있다. 그렇지만 연습실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더 아쉬워했다. 약간의 금전적 여유 외에는 애써 큰 차이를 느끼지 않으려는 듯도 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그에게 무엇보다 춤과 무대 자체가 중요했다. “지금이 조금 더 바쁘긴 한데 전 예전에도 바빴어요. 지금은 연습하고 미팅하고 공연하느라 바쁘다면 예전엔 매일 연습실에서 연습하느라 바빴거든요. 워낙 가만히 있기를 잘못하고 몸은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엔 늘 많은 생각을 했으니 연습실에서도 바빴어요. 그렇게 많은 연습이 지금을 위한 트레이닝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저 브라운관에서 움직이는 춤만 바라봐도 좋던 ‘학생 김보람’은 불현듯 서울로 발길을 넓혔다. “원래는 고등학교 빨리 졸업하고 장사하려고 했어요. 배 타고 일해서 먹고 살 길을 마련하고 그래도 좋아하는 춤은 계속 추면서 살아야겠다고만 생각”했던 그를 사로잡은 건 1998년 어느 날 롯데월드에 놀러 갔다 우연히 만난 그룹 피플 크루의 공연이었다. 놀이기구도 안타고 무대 앞에서 기다리며 만난, 눈앞에서 펼쳐진 힙합 댄스는 놀라움 자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제 춤을 보니 정말 멋있었어요. 완도로 돌아가면서 무작정 ‘난 서울에 가야겠다’ 다짐했고 그 다음부터는 그냥 갈 방법만 계속 찾았어요.”
그는 부모님을 속였다. “서울에 있는 댄스팀에 합격했고 1년만 있으면 텔레비전에 나온다”며 거짓말했지만, 바로 다음 학기에 정말 서울로 전학했다. 당시 아들을 타지에 보내야 하는 불안감에 휩싸인 어머니께서 스님을 불러 관상을 봐달라 했고, “큰 물고기는 큰물에 가야 하니 보내시오”라는 확답을 듣고 흔쾌히 허락했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일화지만 어쨌든 그의 도전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방송댄스팀 프렌즈에 합류했고, 백댄서로 활동하며 상경한 지 1년 만에 무대 센터 자리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됐다. 부모님께 한 거짓말도 실제로는 지킨 셈이다.
그가 거듭 “운이 좋다”고 말하는 데엔 스스로에게 큰 자양분이 된 모든 선택이 사실은 그렇게 거창한 목표나 구체적 실행 계획을 갖고 이뤄진 것이 아닌 이유가 크다. 백댄서를 하다 대학에 진학해 현대무용가로 거듭나게 된 과정도 그렇다. 엄정화·이정현·코요태 등 인기 가수의 백댄서로 무대를 누비던 그는 ‘마돈나 백댄서’가 되고 싶다며 미국 유학을 꿈꿨다. 그러나 학생 비자가 없어서 어려웠고 비자를 얻기 위해 서울예대 무용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갔더니 뒤에서 몰래 따라 하거나 비디오를 보며 익히기만 하던 춤을 선생님이 직접 가르치는 것을 처음 알았고,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과목과 상관없이 몸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마냥 좋았어요. 한국무용·현대무용 전부 재미있게 배웠죠.” 특히 그의 스승인 고 김기인 교수와의 만남이 그 재미를 키워줬다. “교수님의 동양철학, 어떻게 보면 저랑 정반대 정신의 춤을 배우는 것이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졸업을 했고 미국 가는 꿈은 못 이뤘죠. 아마 그때 미국에 갔다면 마돈나 백댄서를 하긴 했을 거예요.(웃음)”

몸은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엔 늘 많은 생각을 했으니
연습실에서도 바빴어요. 그렇게 많은 연습이
지금을 위한 트레이닝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FEVER> ⓒgunu kim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다

백댄서에서 현대무용가로 살짝 발길을 옮긴 그의 선택은 지금까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보여준 춤과도 맥이 닿아 있다. 팀 이름대로 ‘애매모호한’ 이들의 춤은 늘 새롭고 재미있다. 김보람은 “일부러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그들의 춤에 대해 설명했다. “앰비규어스 스타일이라고 말한다면 ‘질문을 잘 던지는’ 것 같아요. 쉽게 얘기해서 여기(홍익대 인근 인터뷰 장소)에서 홍대입구역까지 걸어가는 길 중에 제일 빠른 길이 있잖아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누구든 그 길을 알려 줄 거고. 그런데 저희는 그 길로만 가고 싶지 않은 거죠. 너무 당연한 것에 자꾸 질문을 던지고 그대로 안 따라가고 싶은 마음 이랄까요. 특별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대로만 하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재미없겠다 싶으면 우선 피하는 거죠.” 물론 정해진 틀에 맞춘 춤을 추는 백댄서 생활도 그에겐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춤의 재미만큼 처음 넓은 무대에 와서 ‘청년 김보람’이 느낀 좌절감도 컸다. “춤을 제일 잘 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세상에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프로 댄서를 하면서도 매일 연습을 해도 훨씬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내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많은 사실이 그땐 상처로 다가온 것 같아요. 그래서 춤이 싫어졌고, 그러면서도 매일 출근하고 방송하고 내가 없는 느낌으로 춤을 추니 재미가 없어졌어요. 어떤 날은 매일 울기도 했죠.”
그때 그가 찾은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눈을 넓힌 것이다. “그렇게 다 잘하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았다”며 생각을 넓히니 매일 5시간, 10시간씩 연습해도 열패감을 느끼게 했던 춤이 한두 시간만 바짝 해도 즐거움을 줬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그는 당시 열여덟 살이었다. 열여덟 살이 어떻게 그렇게 길을 찾아갈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다시 웃으면서 답했다. “완도에 살았기 때문이에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서울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죠.”
그에게 춤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막연한 물음에 또 담담하게 말했다. “심장이 뛰는 것과 비슷하죠. 작품이 어떤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연 모든 것에 존재하는 패턴과 리듬. 우리가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는 3박자를 이루듯 삶과 모든 자연에 기반하는 패턴이 춤이에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춤을, 특히 현대 무용을 유독 어렵다고 느끼는 것에 “감정이 들어갔거나 우리가 배운 교육 아래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도 지적했다. “아무런 감정 없이 모든 삶의 패턴, 지구가 도는 것까지 모든 자연의 리듬을 이야기하는 데 춤이 언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마흔이 된 지금까지, 오로지 춤에 매달리며 뜨거운 마음을 유지하는 것도 결국은 ‘춤이 언어가 된다’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글 같은 정해진 틀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즉흥적 감각의 리듬을 서로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날, 말로 하기 어려운 표현을 몸으로 했을 때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있는 때. 가야 할 길이 있기에 김보람의 춤은 여전히 뜨겁고 강렬하다.

특별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대로만 하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재미없겠다 싶으면 우선 피하는 거죠.

춤의 언어로 소통하기

대중적 인기를 실감하면서도 “흔들리지 말자”며 팀원을 다독이는 것도 인기가 궁극적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어서다. 매체에 자주 나와 유명해지고, 공연이 조금 더 많아져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에 분명 좋은 일이지만 김보람은 “이런 날도 오는구나, 이보다 더 좋은 날도 있으려나? 더 나쁜 날은 어떤 거지?”라는 고민도 한다고 했다. “더 좋은 날이든 더 나쁜 날이든 이 작업을 재미있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뭐지?”라는 생각도 꼬리를 문다. 그리고 여전히 극장에서, 관객들과 마주하며 춤을 춘다. “지금은 상업적 작업과 인기에 대한 부분이 잘된 거지, 저희가 극장에서 춤을 보여주는 건 똑같아요. 많은 분이 다음 컬래버레이션을 궁금해하는데 그것보다 다음 작업(작품), 극장에서 하는 공연까지 더 많은 관심을 받으면 그때, ‘아, 잘됐다’ 할 것 같아요. 연습 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이 짧은 시간에도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수련의 기회 같고요.”
늘 해오던 작업이 이날치와의 협업으로 그야말로 ‘빵’ 터진 것도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그다. “전통을 재해석한다는 의미와 의상이 잘 맞았다”면서다. 그리고 “대중의 목을 잠깐 축일 수 있던 일일 뿐”이라면서 “앰비규어스가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순수예술이고 이걸로 오랫동안 대중의 목을 축여주는 게 저희가 중심을 갖고 해야 할 일”이라는 강조도 빼놓지 않았다. “농구를 하면 슛을 계속 쏴야 들어가는데, 득점 말고 슛을 쏘는 행위에 목적이 있으면 더 잘 들어간다고 본다”는 설명에 그가 춤을 대하는 자세도 다시 엿볼 수 있다.
“다음은 BTS와의 협업인가”를 비롯해 다음은 무엇을 발표할지 관심이 집중될 때 김보람은 일론 머스크를 언급하기도 한다. “화성에서 공연을 한다거나 화성과 연관된 춤이나 우주에 관련된 사업을 한다면 저희 성격과 잘 맞을 것 같아요. 다른 세계, 완전히 다른 차원과 소통하기 위한 매체를 춤으로 하는 작업은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다. 아니면 지브리 스튜디오와 협업해 모두에게 친숙한 애니메이션에 앰비규어스 춤을 입혀 ‘국민체조’처럼 통용할 수 있는 춤의 언어를 만드는 것도 그의 꿈 중 하나다. 확실히 그의 춤은 더 넓은 차원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2021년에 MBC 라디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속 노동요와 자연의 소리에 맞춰 춤을 춘 국립현대무용단과의 <춤이나 춤이나>나 광명시민회관 상주단체로 광명시민들과 함께한 <광명 찾은 춤>, 고양문화재단 주최로 고양·천안·춘천·포항의 문화재단이 공동 제작한 <얼이 섞다> 등 바쁘게 신작을 선보인 앰비규어스는 새해 독특한 작품을 내놓는다. 춤에 관심을 둔 일반인을 모아 2월에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올리는 ‘마이 리틀 앰비규어스’ 프로젝트다. 한마디로 아티스트와 관객이 ‘주객전도’ 된 공연이다. “계속 거리에서 영상 작업 등을 하며 다양한 사람과 만나다가 이제는 일반인이 작품을 짤 때가 왔다, 더는 예술가와 일반인의 경계를 둬선 안 된 다 생각했죠. 그걸 무너뜨려 보자는 취지로 기획했고 모두가 예술이라는 형태를 낱낱이 파헤쳐 보자는 생각이었죠.” 단순하게 일반 관객이 직접 예술을 만드는 경험을 제공하자고 시작한 판이 점점 커져 참가자들의 아이디어만으로 무대와 조명·안무·음악·무용수까지 모든 것이 좌우된다.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는데 그렇다면 어디 한번 진짜 산으로 가보자는 아이디어의 작품 제목은 <홀라당!>이다. 홀로 있거나, 전체 Whole가 함께하거나 어떤 것이든 좋고 감사하다는 뜻을 담은 작품이 어떤 재미있는 산으로 모험을 떠날지, 그들의 춤처럼 새로운 궁금함을 부른다. 그리고 이 궁금증과 질문은 앞으로도 앰비규어스와 김보람, 그리고 우리 모두를 뜨겁게 할 것으로 보인다.

허백윤 | 사진 공간느루 | 사진 제공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국립현대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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