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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8월호

책 《시선으로부터,》와 《화이트 호스》기억해야 할 어떤 계보, 단단하게 나아가는 여성의 이야기
여기 두 가족의 제사 이야기가 있다. 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하와이를 찾은 한 가족의 이야기이자, 녹록지 않은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낸 한 여성의 이야기다. 강화길의 신작 《화이트 호스》에 수록된 단편소설 <음복>은 흔한 제사 풍경 속 젠더 권력을 내보이며 가족 안 ‘여성의 자리’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현 시기 한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소설가 2명이 들려주는, 단단하고 예리한 여성의 이야기.

20세기를 살아낸 여성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10년 전 세상을 뜬 할머니를 깨워, 날마다의 모멸감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떻게 가슴이 터져 죽지 않고 웃으면서 일흔아홉까지 살 수 있었느냐고.”
소설은 한 여성의 가계도로 시작한다. 화가이자 작가이며, 세상을 향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여성 심시선이 두 번의 결혼으로 만들어낸 ‘모계 중심’의 가계도다. 소설가 정세랑이 4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책 제목처럼 ‘쉽사리 희미해지지 않는 사람’ 심시선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다.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그의 가족 12명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심시선은 생전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며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 당부를 충실히 이행해 온 가족들은 10주기에는 조금 특별하게 그들의 어머니거나 할머니인 심시선을 기억하려 한다.
“이 소설은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정세랑은 난폭한 세계에서 꼿꼿하게 생존하고 사랑한 여성의 이야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꺼내 보인다. 6·25 전쟁 당시 가족이 몰살당한 기억, 여성을 분풀이 대상이자 장식품으로 취급한 남성 중심 지식인 사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그를 ‘문제적 여성’으로 만든 사람들의 시선. 심시선은 그 모든 난폭한 것들 속에서도 글 쓰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날마다의 모멸감’을 견디며 살아남았다. 그의 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웬만한 헛디딤에는 눈 깜짝하지 않는 사람”으로.
정세랑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그의 ‘계보’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많은 여성이 기억해야 할 ‘우리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 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무지라는 ‘안온한 권력’ 《화이트 호스》 |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이 단호하고 서늘한 한마디로 소설은 시작된다. 결혼 후 처음 맞는 남편 가족의 제삿날, 화자인 ‘세나’는 집안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단번에 감지한다. 제사가 진행되는 단 몇 시간 안에 이 집안 갈등의 역사와 숨겨진 비밀, 막후에 진행된 가족 간의 은밀한 협약 같은 것들을 눈치챈다. 이 집에서 수십 년을 장손으로 사랑받으며 살아온 남편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느긋하다. 그리고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이 평범한 가족의 관계 뒷면에 있는 차별과 희생 강요, 서로에게 품은 뒤틀린 애정과 미움을 알아야 할 이유도,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중략)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소설가 강화길의 단편소설 <음복>은 가부장제에서 ‘무지가 곧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아내이자 며느리인 세나의 시선을 통해 드러내 보인다. 재빠르게 눈치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의 ‘앎’과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이들의 ‘모름’. 인지관계의 통상적 권력 구조를 역전하며 소설은 평범한 한 가족, 일상적인 제사 풍경을 스릴러의 문법으로 전개한다. 강화길은 이 소설 <음복>으로 올해 제11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을 포함해 단편 7편이 수록된 그의 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 호스》가 최근 출간됐다.
강화길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그로 인한 여성의 불안과 공포를 다양하게 변주한 소설을 발표하며 ‘한국 여성 스릴러’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았다. 작가는 책 속 여성 인물들을 ‘모든 것을 아는 화자’의 자리로 위치시켰다. 홀로 세계의 기이함을 눈치챈 여성들이 등장하며 그들에게 가해지는 교묘한 폭력과 억압을 드러낸다. 소설가 편혜영은 “강화길은 어디에나 있는 여자들 이야기로 어디에도 없는 장르에 이르렀다”고 평했다.

글 선명수_《경향신문》 기자
사진 제공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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