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 유지’ 결론이 나온 배경
MMCA는 국내외 전문가 40명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 중에는 독일 카를스루에에 있는 예술과 매체기술 센터(ZKM),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 관계자, 이숙경 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 김홍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이지호 전 이응노미술관장,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 등이 포함됐다. 결과는 ‘LED 등 신기술로 교체’(23명), ‘CRT 유지’(12명), ‘기타’(5명) 순이었다. ‘소멸하도록 두자’거나 ‘완전히 해체, 보관하자’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신기술로 교체하자는 것이 우세했지만, MMCA는 CRT 유지를 택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작고한 작가의 작품을 복원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원형 유지’이며 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술관의 임무다. 작품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대성을 반영한다. <다다익선>의 CRT 모니터는 20세기 대표 매체로 미래에 20세기를 기억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에 CRT를 최대한 복원해 작품의 시대적 의미와 원본성 유지에 노력할 것이다.”그러면서 MMCA는 동일 기종 중고품을 구하거나 수리하고, CRT 재생기술 연구를 도모하겠다고 했다. 이런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경우 LCD(LED), OLED, Micro LED 등 최신 기술을 부분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2022년 전시 재개를 목표로 2020년부터 3개년 중장기 복원 프로젝트가 가동될 예정이다. 추정 예산은 30억 원, 모니터의 예상 수명은 10~15년이다.
<다다익선>의 원형은 브라운관인가, 영상인가
MMCA는 브라운관 보존을 ‘원형 유지’라고 밝혔지만, 예술 작품의 속성을 따져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다다익선>이 단순한 조각 작품이라면 브라운관이 ‘원형’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영상과 작동 소프트웨어가 주인공인 ‘미디어아트’다. 통상 예술작품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관의 의사가 아닌 ‘작가의 의도’다. 작고 작가의 경우 유족이나 저작권자의 의견을 듣는다. <한겨레>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MMCA 측은 저작권자인 켄 백 하쿠타(백남준의 장조카)에게 가장 먼저 접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자문 요청을 받은 미국 큐레이터들이 켄 백에게 ‘내가 답해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두 달이 지나서야 공문을 받은 켄 백은 잘못된 순서에 불쾌함을 느껴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MMCA는 저작권자의 답 없이 자체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저작권자와 접촉이 어려웠다면 그다음엔 최소한 작가의 의도를 먼저 고려했어야 한다.
백남준은 이미 1988년 <다다익선>을 설치할 때부터 이 작품의 수명이 10년을 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교체해도 좋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으며, 심지어 서울시립미술관에 설치된 <서울랩소디>를 작업할 때는 LCD 모니터를 사용했다. 또 2003년에는 <다다익선> 설치 과정을 함께한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에게 “after service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친필을 팩스로 남겼다. 이 대표는 평소 “백남준 작품의 핵심은 곡면 브라운관이 아닌 영상”이라고 밝혀온 바 있다. 그런데 미술관이 임의로 ‘CRT도 시대성을 반영한다’고 결정 내린 것이다. 이 대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관 유지는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몇 년 뒤에 시한이 다할 바보 같은 짓을 왜 계속하는지 모르겠다. 더 큰 문제는 작품이 고장 나고 수리하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미디어아트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베른하르트 제렉스 전 ZKM 수석큐레이터도 “1988년의 TV가 보존되지 않았는데, 맞지 않는 기술에 고군분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단기적 해결책이자 헛된 절차”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1 1987년 <다다익선> 설치를 구상하는 백남준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 1988년 일반 공개 당시 <다다익선>의 모습. 이때도 백남준은 작품의 수명이 시한부임을 알고 있었고, 시한이 다하면 새 기술을 사용해도 좋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현대미술관답지 않은 보수성 아쉬워
MMCA는 왜 작가의 의도와 다수 전문가의 조언을 뒤로한 채 ‘브라운관 유지’를 발표해야 했을까? 그 선택에서 느껴지는 건 변화를 피하려는 극도의 보수성이다. 먼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절반 이상을 LCD로 교체하겠다는 발표를 한 뒤 후폭풍을 감당하기보다, 최대한 현상을 유지하고자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전문가 의견 중 보수적인 의견을 취사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가장 유연한 모습으로 사회에 영감을 주는 것이 현대미술관의 역할임을 고려하면 무척이나 아쉬운 모습이다. 예술을 향유할 먼 미래의 국민까지 고려하는 거시적인 시각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다익선>과 백남준의 예술성을 감당하기엔 아직 우리 사회가 준비가 안 된 걸지도 모르겠다.
- 글 김민_동아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