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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9월호

피아니스트 조성진 1%의 만족스러운 연주를 위하여
조성진은 베를린 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런던 심포니, 뉴욕 필, 부다페스트, 산타 체칠리아 등 해외 유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물론 카네기홀, BBC 프롬스 등의 전 세계 주요 무대를 숨 가쁘게 넘나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9월 22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피아노 연주와 지휘를 겸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으로 처음으로 지휘하는 모습을 청중들에게 선보일 그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음악가이자 동시에 음악 자체를 지극히 즐기고 사랑하는 청중의 한 사람이다. 여러 인터뷰이들 중 가장 예고 없이 자주 마주쳤던 이 역시 조성진이다. 늘 살 플레옐(파리의 공연장)의 로비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일주일에 서너 번 넘게 마주치기도 했다. 표를 구하기 힘들 때는 마지막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음악을 실황으로 듣는 그 자체에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다. 팬이라는 지휘자와 오스트라의 파리 공연이 있던 날에는 손꼽아 기다렸다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엄청난 연주를 들은 날에는 상기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로부터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조성진은 바로 그 지휘자와 함께하며 협연자로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렀다.
통영에서는 이제 지휘도 하게 되었습니다.
지휘라고 하기는 부끄럽고 그냥 지휘자 없이 하는 거죠. 지휘에 나선 혹은 지휘자 없이 연주를 선보이는 걸로 홍보가 되는 것 같은데 저는 지휘자가 아니라서요. 그냥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 모차르트 협주곡은 지휘자 없이도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이니 조금씩 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간 협연자로서 거장들을 여럿 만났는데 당연히 지휘자들의 능력을 흡수하지 않았을까, 기대됩니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지금은 전혀 지휘를 겸한다거나 배울 생각은 없어요. 피아니스트로서 지휘자 없이 하는 연주의 연장선에 가깝죠. 제 성격이 지휘자와 맞지도 않으니까요. 저는 피아노 치는게 가장 좋고 저답다고 생각해요. 다만 앞으로 유럽에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할 수 있는 콘체르토를 하려고요. 하지만 제가 전적으로 지휘를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새로운 모습 정도로 기대하면 되겠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대는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간 함께했던 지휘자들에 비해 별로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겸손한 게 아니라 그냥 사실만 이야기해요. 물론 저도 자신감이 있을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잘 알거든요. 피아니스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선보이는 지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난 6월 이반 피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의 베토벤 콘체르토 전곡 공연은 대성공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유럽에서도 전곡 투어로 이어진다고요.
이반 피셔는 제가 작년 12월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들었던 연주 가운데 가장 좋았던 연주 중 하나였어요. 그때 처음으로 직접 만났죠. 그전에는 인터뷰나 동영상만 보았고 파리에서 그의 말러 5번을 들은 적이 있었고요. 다양한 음악가가 있잖아요. 이반 피셔는 천재가 아닐까 싶어요.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많고, 그 아이디어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음악적이면서 절대로 지루하지도 않고 균형감이 좋은 해석을 하거든요. 그런 경지는 아무나 가능하지 않아요.
굉장히 수월하고 쉽고 자연스러운, 균형감 좋은 연주는 본인의 강점 아닌가요?
과한 칭찬이에요. 저는 멀었죠. 내후년에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유럽 투어를 하는데, 앞으로도 같이 연주를 많이 하고 싶어요. 제가 많이 배우고 성장하거든요.
그간 협연자로서 함께했던 지휘자들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세요.
모두 대단한 분들이고 탁월한 음악적 경험이라 제가 딱히 더 할 말이 없어요. 제가 감히 평가하는 게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저는 지휘자의 리허설을 유심히 봐요. 정명훈 선생님과 가장 많이 같이했는데, 선생님은 전체적인 그림을 무척 중요시하는 분이세요. 큰 그림을 보면서 동시에 디테일도 무척 좋죠. 표현력도 빼어나세요.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할 때 선생님이 “이 곡은 사자 같다. 그런데 사자가 소리를 생쥐처럼 내겠느냐. 피아니시모에서도 맹수의 느낌을 내야 한다”라고 하셨어요. 아주 선명하게 전체적인 이미지를 주는, “사자의 피아니시모”라는 표현에 정말 감탄했어요.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경우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를 굉장히 중요시해요. 어떤 레퍼토리든 곡에 맞는 사운드를 내야 하고, 그걸 굉장히 잘 이끌어내는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어요. 또 에사 페카 살로넨, 로린 마젤, 이분들은 정말 설명할 길이 없는데 천재 같아요. 악보가 핏속에 새겨져서 들어가 있나 봐요. 음표, 쉼표뿐만 아니라 모든 지시 사항, 음악적 느낌이 그들의 일부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워요. 야닉 네제세겐은 정말 민감한 지휘자예요. 음감이 예민하고 반응속도가 빠르고, 제가 뭔가를 하면 바로 반응하기 때문에 같이 연주하기 정말 편해요. 안토니오 파파노, 지안드레아 노세다 이런 분들은 함께 만들어나가는 음악이 살아 있으면서도 에너지와 열정이 많은 느낌이었어요. 마리스 얀손스는 제가 워낙 팬이기도 한데, 그분에게는 신비로운 마법의 순간이 있어요. 리허설에서는 못 느끼는, 실황에서만 가능한 연금술이 일어나고요. 사이먼 래틀 역시 음악을 체화한 듯한 사람이고, 진짜 모든 걸 다 할 수 있죠. 음악적인 능력이 엄청나요. 폭넓은 레퍼토리도 정말 인상 깊고요. 얍 판 츠베덴, 만프레드호넥 등도 정말 훌륭하시죠. 제가 이런 분들과 모두 함께하다니...운이 정말 좋아요.

1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와의 리허설 모습.
2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는 조성진. (뉴욕 필하모닉 제공)

운으로만 이루어진 커리어라고 하기에는 쇼팽 콩쿠르 이후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제가 운이 좋아요.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제가 해야 할 것들만 집중할 수 있거든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무엇을 하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 그걸 빨리 파악하는 게 중요하더군요.
그렇다면 ‘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제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마음이 내키지 않고 하기 싫은데 이유가 있어서 넌 이걸 해야 해, 라고 강요받지 않는 거요. 강요받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죠. 꼭 개런티나 홀과 오케스트라의 유명세만은 아니에요. 다른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어요. 자세히 말하기 복잡한데 하면 안 좋은 연주들도 분명히 있거든요. 제가 흔히 말하는 중요한 무대, 큰 무대를 많이 서기 시작했는데요. 그렇다고 제가 와달라는 곳에 다 설 수는 없어요. 올해에는 연주 횟수도 줄이고 있고, 양보다는 퀄리티와 음악성에 대해 더 고민하고 있어요. 그만큼 더 신중하게 선택하고 걸러내야 하는 거죠. 저는 새로운 레퍼토리를 늘리면서 개인적으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요. 그게 제 음악을 더 풍성하고 깊게 만드니까요. 제 음악적인 능력, 표현력이랄까. 책이나 영화에서도 영감을 받을 수 있어요. 최근에 영화 <기생충>을 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또 그림을 보거나 여행을 가서 그 도시의 풍경과 분위기를 느끼고, 맛있는 음식을 통해 그 맛에서도 영감을 얻을 수 있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걸 경험하려면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처음에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 라는 말처럼 무작정 열심히 했지만 이제는 횟수를 줄일 생각이에요. 작년에는 무려 120회를 연주했더라고요. 그건 좀 많았고요. 1년에 80회에서 90회 정도가 좋을 것 같아요. 그게 저한테 딱 맞는 횟수라고 생각해요.

유명한 악단, 좋은 홀, 지휘자 이런 것만이 선택의 기준은 아니라는 이야기군요?
절대 아니에요. 저에게 의미가 있는 게 더 중요해요. 대단한 지휘자, 오케스트라를 만나면 ‘우와, 이런 사운드를 내는구나’ 싶어 영감을 받고 감탄을 하지만 저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 연주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것도 좋지만요. 지금까지는 많이 못했는데, 피아노로 의미 있는 일도 해보고 싶어요. 음악을 많이 접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도 해보고 싶은 게 많아요. 아직 음악을 낯설게 여기는 분들이 많잖아요. 서울 인구가 1,000만 명인데 그중에는 예술의전당을 태어나서 한 번도 안 가본이들도 많을 거고요. 제가 매개가 되어 소개해주는 역할이랄까.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그 문을 열어주고 싶어요. 아직 시간 여유가 없어서 그럴 기회가 없었는데, 기회만 생긴다면 하고 싶어요.
청중들에 대해서, 실황 공연에서 그들과 주고받는 에너지에 대해서 도시마다 다른 점이 있다면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관객들이 있어요. 저는 런던 청중을 좋아하고 또 독일에서 연주하는 게 좋아요. 마음이 편하거든요. 흔히 다른 연주자들은 독일 사람들은 차갑고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독일 관객들이 굉장히 정직한 것 같아요. 좋으면 좋다, 아니면 아니다, 반응이 굉장히 정직해서 그게 좋아요. 또 독일은 음악가들을 존중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베를린으로 터전을 옮기고 살아보니까 프랑스보다 훨씬 음악과 연주자들을 존경심을 갖고 대하더라고요. 런던도 독일과 좀 비슷하게 정직한 면이 있어요. 객석의 반응이 진실되었다고 해야 하나. 미국이나 일본은 좀 헷갈려요. 미국은 반응이 엄청 좋거든요. 브라보 소리가 쏟아지면서 기립박수도 많이 해주고요. 반대로 일본 관객은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를 정도로 차분해요. 반면 런던이나 독일은 잘하면 좋아하고, 못하면 싫어하고 이런 게 보여서 마음이 편해요. 해가 갈수록 타인의 시선이나 외부에서 들려오는 평가에 대해 신경을 덜 쓰게 되더군요. 마이 웨이랄까. 저는 하던 대로 제 갈 길을 가면 되니까요. 예를 들면 레스토랑이 하나 있는데 단골이 꽤 많아요. 그렇지만 취향이 맞지 않아서 그 레스토랑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만약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맛을 바꾸고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한다면 단골을 잃게 되잖아요. 맛이 없으면 안 가면 그만이고 맛있으면 가는 거니까. 저는 제 음악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요.
레스토랑에서도 영감을 받는다고 했잖아요. 어떤 음식을 좋아하나요?
솔직히 화려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보다 편한 식당이 저한테는 더 맞아요. 물론 최고의 실력을 지닌 셰프가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파인다이닝을 먹고 나면 ‘이게 예술의 경지구나’ 싶지만, 이탈리아 가정식 같은 소박한 음식도 참 좋더라고요. 편안하면서도 기교 부리지 않고 화려하게 치장하지도 않고, 재료의 본래 맛이 살아 있는 그런 음식에서 감동이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쇼팽 콩쿠르로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모차르트, 드뷔시, 베토벤 등 다른 레퍼토리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다양한 레퍼토리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일전에 인터뷰 도중 브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체구도 더 커지고 힘이 더 생기면, 브람스를 선보이겠다고 말했던 기억도 나네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독일 음악을 좋아했어요. 사실 러시아 음악도 좋고 프랑스 음악도 다 좋고 특징이 있거든요. 독일 음악은 작곡가마다 다르지만 베토벤 같은 경우 특히 후기 소나타 속에서 우는 느낌, 뭔가 사람 마음을 찡하게 하면서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느낌이 있어요. 또 드뷔시는 얼핏 웃고 있는데, 막상 얼굴을 보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고요. 저는 피아니스트가 흉내 낼 수 없는 브루크너 교향곡을 실황으로 듣는 걸 정말 좋아해요.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 가서 직접 들을 때마다 이제 우리 동네에 이런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있구나 싶죠. 콘서트고어로서 참 감사한 일이에요. 베토벤은 한없이 유머러스하다가도 또 한없이 서정적일 수 있는 사람이죠. 물론 지금 20대 중반의 제가 치는 베토벤과 인생을 다살고 60대에 치는 베토벤은 해석이 다를 거예요. 지금도 홀과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만 바뀌어도 제 연주가 달라지니까요. 저는 나이 들어가면서 더 달라질 거예요. 지금 저는 악보에 쓰여 있는 작곡가가 원하는 것, 표현하려고 하는 걸 최대한 다 표현해보려고 하죠. 베토벤은 극단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 같고, 모차르트의 곡은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모든 멜로디가 너무 아름답고 결이 곱거든요. 더 시간을 들여서 작곡가를 깊이 이해하고 소리로 재현해내고 싶어요. 아마도 평생 걸리겠죠. 브람스의 소품들은 이미 연주하고 있어요. 모든 음이 다 소중하고, 무척 드넓고 우주적인, 확장된 세계 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이에요. 또 레코딩으로 리스트의 소나타를 준비 중인데, 브람스와 리스트는 참 상반된 세계를 가진 작곡가다 싶어요.
이따금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도 있나요?
당연하죠. 마음에 안 드는 연주가 대부분이에요. 취재로 늘 좋은 연주를 할 때만 와서 들으셔서 그래요. 저는 마음에 드는데 관객이 싫어할 수도 있고 저는 마음에 안 드는데 관객이 좋아할 수도 있는데…. 얀손스와 함께한 뮌헨에서의 연주는 사실 자주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도 놀랍고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만족하는 게 제일 중요한데, 그런 연주가 사실 별로 없어요. 매년 12월쯤 그해에 제일 좋았던 연주 5개 정도를 꼽아보려고 해요. 총 90회쯤 연주했는데 5번 정도는 좋았다 싶으면 그건 굉장히 높은 수치예요. 저는 제 연주 중 1%만 마음에 들거든요. 올해도 독주회와 협연 합쳐서 만족스러웠던 연주가 아직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해요. 제 기준이 좀 높은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사실 항상 불만족스럽거든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연주는 다 빼어난 것 같은데, 제가 치는 건 다 별로인 것 같아요. 나는 왜 이렇게 안 되지?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나 레코딩을 들으면 좌절감도 들고, 저는 아직 한참 먼 것 같기만 해요.
스스로에게 무척 엄격한 것 같아요.
엄격한지는 잘 모르겠고, 제가 만족할 만한 연주를 하면 그 희열감이 오래가요. 그 음악적 순간들을 내내 곱씹어보죠. 며칠 동안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다시 기억하려고 하고요. 그런 연주를 하고 나면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와요. 노래도 진짜 못하고 평상시 절대로 하지 않는데도 말이에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주를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감, 중독성이 있어요. 무대 위로 올라가면서 어쩌면 오늘이 그날일까, 기대하고요. 그전에 늘 열심히 준비하는 것도 그런 기대감 때문이죠. 사실 아닌 날이 99%니까. 1%의 만족하는 연주, 그걸 위해서 계속 연주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그런 연주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글 김나희_공연·전시평론가
사진 제공 Solea 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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