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악기 제작가 정가왕.
2. 정가왕의 작업대.
나는 원래부터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탓에 혼자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도 좋았지만 혼자 무언가 집중해서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때의 기억이 남았던 걸까? 대학교 입학 전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선생님으로부터 바이올린 제작가라는 직업을 듣고 흥미를 느꼈다. 그 직업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영상을 찾아봤다. 그 영상에는 아늑한 공방에서 혼자 나무를 다듬어 바이올린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어릴 적 혼자 몰입하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놀았던 추억이 떠올랐고 바이올린 제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올린 제작이라는 생소한 일을 배우기 위해 다니던 대학교를 휴학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서초동 악기 공방에 찾아가 바이올린 제작을 배웠다. 그곳에서 기초적인 작업을 연습한 후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넓은 세계를 느끼고 싶어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고향인 이탈리아 크레모나로 유학을 떠났다. 크레모나 국제 현악기 제작 학교에서 3년간 다양한 악기 제작 방법을 배웠고 졸업 후 현재는 프란체스코 토토 마에스트로 공방에서 일하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현악기는 없다
현악기 제작가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6세기부터 이탈리아 크레모나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오래된 직업이다. 현재 크레모나에는 약 300명의 현악기 제작가가 활동 중이다. 4차 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시대지만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작업한다. 수십 년간 건조된 가문비나무와 단풍나무를 손으로 다듬고 거기에 천연안료를 섞어 색을 입힌다. 마지막으로 악기마다 특유의 음색을 넣어주면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가 완성된다. 5세기가 지났지만 크레모나의 현악기 제작 방식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악기에 사용되는 파트별 나무 재료는 70여 가지인데 제작가의 제작 방식에 따라 같은 현악기라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음색을 낸다. 때문에 똑같은 현악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악기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료 선택과 제작 방식이다. 사람마다 외형과 성향이 다르듯 나무도 각각의 외형과 특성이 있다. 좋은 재료를 선택하는 일은 좋은 악기 제작의 밑바탕이다. 마찬가지로 악기 제작은 수십 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이 부분이 모여 악기가 완성되고 그것이 곧 소리에 영향을 미친다. 즉 모든 부분들이 소리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섬세한 작업을 통해 이 수많은 과정들을 통일감 있게 완성하는 것, 또 이 과정들을 통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악기 제작의 매력이자 핵심이다.
꿈의 무대를 나의 무대로
세계적인 권위의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제작 트리엔날레 콩쿠르는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3년마다 열린다. 현악기 제작가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꿈의 무대이다.
2012년 처음 크레모나에 유학을 왔을 당시 제13회 콩쿠르가 개최됐다. 전시된 우승작들을 구경하면서 나도 언젠가 그들과 견줄 수 있는 악기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동안 많은 것들을 배웠다. 특히 프란체스코 토토 마에스트로 공방에서 마에스트로의 제작 방식을 배운 것은 큰 도움이 됐다. 2018년에는 제15회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제작 트리엔날레 콩쿠르가 개최됐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현재 나의 위치가 궁금했기에 1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첼로로 콩쿠르에 참가했다.
콩쿠르에는 40개국 331명의 제작가가 431대의 악기를 출품했다. 심사위원은 다양한 국적의 바이올린 제작가 5명,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의 연주자 5명 등 총 10명으로 구성된다. 1차 제작 심사에서 500점 만점 중 300점 이상을 획득한 작품이 2차 소리 심사로 넘어가고 2차에서 연주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합해 결선에 올린다. 결선에 올라간 21대의 악기는 블라인드 소리 테스트를 받고, 여기서 10명의 심사위원들이 각자 추가 점수를 매겨 순위를 결정한다.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 콩쿠르였고 세계적인 제작가들이 참가하기에 수상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작 심사위원과 연주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첼로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다. 나의 우승 첼로는 주최 측인 크레모나 바이올린 박물관(Museo del Violino)이 2만 4,000유로에 구입해 박물관에 영구 전시된다. 더욱 의미 있는 점은 한국인이 만든 악기가 스트라디바리, 아마티, 과르네리 등 수많은 명기들과 함께 전시되어 전 세계 관람객들에게 선보인다는 점이다.
이번 콩쿠르를 통해 현악기 제작가로서 더 많은 것을 꿈꿀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고 생각한다. 젊은 나이인 만큼 그 기회를 잘 활용해 스트라디바리처럼 세월이 지날수록 더 값진 악기를 만들고 싶다.
3. 첼로 헤드 작업 모습.
4,5. 제15회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제작 트리엔날레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정가왕의 작품.
- 글·사진 제공 정가왕 현악기 제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