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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2월호

영화 <국가부도의 날>과 <뷰티풀 데이즈>여자는 용감했다
오랜만에 여성이 이끌어가는 두 편의 영화가 도착했다.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IMF 협상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위기의 순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의 분투를 그린다. <뷰티풀 데이즈>는 중국에 두고 온 아들과 만나게 된 한 탈북 여성의 이야기다. 온갖 차별적인 상황에서도 한시현의 소신 있는 발언을 전달하는 <국가부도의 날>의 배우 김혜수, 기구한 삶을 통과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소화해낸 <뷰티풀 데이즈>의 배우 이나영. 두 배우의 연기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

절대 다시는 속지 않으리최국희 감독의 <국가부도의 날>

“IMF 구제금융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구조조정.” IMF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국치일’이라고까지 거론되는 IMF 협상에 ‘성공적’이라는 수사를 붙인다. 1997년 12월 3일,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대한민국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로부터 550억 달러의 긴급 자금을 지원받았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돌파, 물가 안정 및 실업률 최저 기록. ‘아시아의 용’으로 불리던 신흥국가가 이제 막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며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자축할 때였다. 불과 1년 후, 이 신화가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은행이 문을 닫고, 비관한 국민이 한강에서, 집에서 자살을 하며 한 나라가 철저하게 망했던 때. <국가부도의 날>은 대한민국이 파산을 선고한 당시의 그 급박한 상황으로 들어간다.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 단 일주일, 대한민국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 비공개 대책팀 안에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이 IMF의 관리에 찬성하는 재정국 차관(조우진)과 대립하는 사이, 정작 국민들은 ‘한국 경제 위기설은 사실무근’이라는 정부의 공식 입장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정부의 속내를 간파해 역베팅을 도모하며 기회를 잡는 금융 전문가 윤정학(유아인) 같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장 망할 위기 앞에서 미도파백화점에 납품한다는 꿈에 부풀어 어음 거래를 한 작은 공장 사장 갑수(허준호) 같은 사람이 더 많았다.
영화가 전달하는 그 부당한 시간, 침몰하는 국가 앞에서 한시현 한 사람만이 소리 높여 진실을 전한다. “(부당한) 협상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고. “지금이라도 엎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경하게 반대하다가는 “팀장님이 옷을 벗을 수도 있다”는 부하 직원의 만류에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며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물론 촌각을 다투는 그 시각에도 ‘뭣도 모르는 여자가 나선다’는 혐오의 시선이 멈추질 않았다.
<국가부도의 날>은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IMF 20여 년 후 대한민국은 ‘헬조선’의 위기를 맞고 있다. 당시 대다수의 국민은 IMF가 가져올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비정규직 확대 같은 후폭풍을 예측하지 못했고, 국가는 ‘국민의 알 권리’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단 한 명. 이성적인 한편으로 끓어오르는 우리의 분노를 대신 전달해주는 영웅으로 김혜수보다 더 적역의 캐스팅이 있었을까. “시나리오를 보는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며 “이 영화는 내가 하든 안 하든 반드시 만들어야 하고, 꼭 재밌게 만들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씨네21> 인터뷰)는 김혜수의 말이, 한시현의 발언 때마다 떠오른다. ‘절대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영화다.

관련 이미지

1 영화 <국가부도의 날>.

2 영화 <뷰티풀 데이즈>.

아름다운 삶을 찾아서윤재호 감독의 <뷰티풀 데이즈>

“아버지가 죽기 전에 엄마 보는 게 소원이랍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오광록)의 부탁으로 어릴 때 집을 나간 엄마(이나영)를 찾아 중국에서 서울로 온 대학생 젠첸(장동윤). 자신도 분명 엄마를 보고 싶었을 텐데 막상 엄마를 만나고 내뱉은 말은 고작 ‘아버지 핑계’다. 아마 자신을 버린 엄마를 향한 원망 때문이었으리라. 실망스럽게도 엄마는 술집에 나가고, 이미 다른 남자(서현우)와 살고 있다. 결국 아들은 “고작 이렇게밖에 못 삽니까”라는핀잔을 남기고 엄마를 떠난다. 꿍한 아들의 마음은 서운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너무 어릴 때 헤어져 얼굴도 몰랐던 엄마, 막상 만나고 난 후 더 큰 물음표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아들의 뒷모습이 <뷰티풀 데이즈>의 서두다. 영화가 진짜 말하려는 건 젠첸의 엄마라고 일컬어지는, 아들을 보고도 반갑다고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영화 속에서 엄마 말고는 이름조차 없는 이 여자의 진짜 속내다.
엄마는 떠나는 아들의 짐 속에 몰래 자신이 그간 써온 일기장을 넣어둔다. 엄마를 떠나고 온 후에야 아들이 일기장을 통해서 엄마의 과거를 유추해나가는 구성이다. 중국에 남편과 아들을 두고 떠나온 여자, 한국에서 다시 또 새로운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 여자는 어릴 때 목숨을 걸고 탈북했고, 부모를 잃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아야 했다. 마치 탈북 여성의 다큐멘터리 속 어느 기구한 사연과 오버랩되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윤재호 감독은 <뷰티풀 데이즈>를 만들기 전 다큐멘터리 <마담B>를 통해 마침 탈북 여성을 이야기했다. 중국과 한국의 두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 마담B가 그 주인공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취재하는 과정에서 윤재호 감독은 ‘탈북자들의 70%에 달하는’ 탈북 여성들의 삶,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의 삶에 주목했다. 여자는 아들에게 일기장을 줄 때 앞장을 찢은 채로 준다. 아들에게조차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시간. 찢어진 한 장에 있는 차별과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기구하다. 거기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여성의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영화의 제목이 <뷰티풀 데이즈>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지만, 감독은 여자의 남은 삶에 희망을, 두고 온 가족과의 화해를, 새로운 가족과의 삶을 부여해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나영은 조선족 복장과 말투를 통해 기대하지 않았던 신선함을 준다. <하울링> 이후 6년 만의 영화로, 이 작품은 그간의 휴지기를 보상해주는 듯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하게 만든다. 체한 것처럼 꾹꾹 고통을 누르는 먹먹한 감정과 차가운 시선과 따뜻한 속내, 그리고 폭발하는 감정까지 이나영은 한 여자의 연대기를 찬찬하고도 세밀하게 연기해낸다. 영화로만 가두어두기에 너무 아픈 여성의 이야기가 마음을 흔든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글 이화정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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