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공학자를 꿈꿨던 어린 시절
유난히 까만 머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테이블에 코를 박을 듯이 아래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휘청대며 위로 올라갔다. 이내 다시 중력을 못 이기겠다는 듯 슬그머니 아래로 떨궈졌다. 이를 몇 번 반복하던 장강명 작가는 냉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죄송해요. 점심 먹고 급하게 와서요. 뭘 먹으면 급격히 대사율이 떨어져서 꼭 한숨 자야 하는데….”
한낮의 기온이 39도에 육박했던 2018년 8월 중순, 소설가 장강명은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식곤증과 싸우는 중이었다. 등단 후 불과 수년이 지난 신예지만 그의 한 작품 한 작품이 모두 대중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8시간 노동원칙을 지키기 위해 스톱워치로 매일 집필 시간을 잰 뒤 엑셀에 정리하고, 페이스북에 눈금자처럼 정확하게 3일에 한 번씩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짧은 단상을 별점과 함께 올린다. 어찌 보면 사람이라기보다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 같기도 한 그가 어릿어릿한 눈으로 말했다. 눈빛을 보니 사람 같기는 하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1975년,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와 잡지사 기자이자 문학가인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인문서를, 어머니가 문학책을 좋아하셔서 저도 책을 좋아하게 됐어요. 한 달에 한 번 교보문고에 데리고 가셔서 저와 동생에게 사고 싶은 책을 고르라고 하셨죠. 유치한 책을 고르면 별로라는 내색을 조금 하시면서도 결국 다 사주셨어요. 덕분에 만화책이나 추리소설 등을 마음껏 봤죠.” 하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욕망을 어릴 적부터 품어온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로봇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마징가제트나 그랜다이져 같은 만화에 어김없이 나오는 박사들, 독수리 오형제의 ‘남박사’ 같은.
학교 다닐 때는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가끔 들었지만 ‘엄청나게’ 잘 쓰는 수준은 아니었다. 선생님에게서 ‘너는 커서 작가가 될 것 같다’는 예언을 들은 적도 없다고 한다. “백일장에서 대상을 탄 친구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리 잘 쓴 것 같지 않았어요. ‘아빠는 우리 손을 잡고 활짝 웃으셨습니다’ 이런 게 좀 별로였어요.” 이런이유로 장 작가는 문예반이었다가 문학회였다가 교내 문학상을 받고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문학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들의 일반적인 경로를 밟지 않았다.
독서일기(독후감)를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고 중학생으로서는 조숙하게도 <빙점>을 읽어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고등학교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좋아해 하루키 팬인 선생님의 주목을 받았지만 주변인들에게 ‘모범생’ 이상의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스스로도 전업 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연세대 도시공학과에 입학했다. 작가는 대학에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라는 자각과 같은 과 후배였던 부인을 얻었다.
1 동아일보 기자 시절 모습.
2 장강명 작가의 작품들.
‘핫한 작가’가 되기까지
장강명의 마음속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은 소년 시절부터 10여 년간 가끔씩 불꽃이 톡톡 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픽션 쓰기’의 즐거움을 알아가면서 점차 그 마음은 이글이글한 잉걸불이 되어갔다. 장강명은 대학교 1학년 때 PC통신 하이텔의 과소동(과학소설동호회)에 단편을 올리면서 창작을 시작했다. “원고지 30매가 넘는 글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또 <월간 SF 웹진>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잡지도 창간해 운영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학과 공부보다 더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작가가 돼야겠다고 결심해, 군복무 중에도 글을 써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다 떨어졌다. 아직 실력이 모자란다는 걸 깨달았다. 글을 쓰는 일과 관계있는 직업을 얻어 소재를 많이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언론사 시험을 봤으나 실패하고 건설사에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언론사 시험에 응시했고 2002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승부욕이 있어 미친 듯이 취재하고 열심히 일해 수차례 기자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기자 5년 차부터 밤에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 소설 쓰는 즐거움을 알고 있어서 매일 1시간이라도 쓰자 싶었어요. 어느 날 회사에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장편을 쓰기 시작했죠.” 이렇게 해서 쓴 첫 소설은 신문기자가 주인공이었다. 아내에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소설이 아닌 것 같다면서도 계속 잘 써보라고 격려했다. 그 후 2011년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아 등단하기까지, 밤마다 1시간 소설 쓰기는 6년간 이어졌다.
2013년 8월 말 장강명은 출입처였던 국회 기자실을 충동적으로 뛰쳐나와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전업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는 2014년 말까지 소설만 써도 된다고 이야기했고 대신 그 후에도 작가로서 가망이 없으면 다시 취직하라고 했다. 그는 신문사를 그만둔 후 만 1년 동안 5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돈은 30만 원쯤 벌었다. 단편소설 한 편이 책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낭독되었고 과학기술인이 보는 잡지에 서평 한 편을 실었다. 빈 맥주병을 마트에 가져다주고 돈을 받았고 중고서점에 책을 팔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람이 바뀌었다. 2015년부터 <한국이 싫어서>가 주목을 받으며 ‘4관왕’, ‘괴물 신인’, ‘가장 핫한 작가’란 단어가 따라붙었다. 그의 이름은 언론에 빈번하게 오르내렸다. 올해 그는 논픽션인 <당선, 합격, 계급>과 <팔과 다리의 가격>을 내놓았다. 지난 6월에 그의 소설 <댓글부대>가 연극 무대에 올랐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오는 9월 4일부터 약 2주간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으로 각색되어 무대에 오른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열광금지, 에바로드>와 함께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이다.
그의 롤모델, 하루키
강한 자기 확신과 함께 차곡차곡 자신의 작품세계를 넓혀온 그지만 대학 시절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가 떨어졌을 때는 심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주로 하루키의 아류작 같은 작품을 썼는데 그런 유형을 잘 쓰는 작가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의 스타일이랄까,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맞지 않았다.
“모든 예술가는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문체가 아니라 세계관, 인물을 대하는 태도를 모두 합친 게 스타일이죠. 사회부나 정치부 기자는 모호한 것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것으로 기사를 시작해요. ‘이것은 이런 사건이다’라는 규정과 그 후의 부연 설명이 스트레이트 기사인데 이것에 익숙해지면 그전까지 말랑말랑하게 모호해 보인 것들이 한 줄로 요약되죠.”
장 작가는 이를 세상과 맞서 규정하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세상을 규정하려는 사람들은 대체로 단문을 쓰고, 인물이나 사건의 속사정을 다 버리지 못하는 이들은 우유체, 만연체를 쓴다는 말이 이어졌다. “한국사회의 문제와 정면대결하고 규정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자극적인 소재를 마음먹고 골라요. 문장도 그에 맞게 가죠. 하루키의 아류작을 쓸 때는 부분 부분이 잘 맞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소설을 쓰다가 인물과 사랑에 빠져 불행한 결말을 못 쓰는 경우는 없어요. 인물에 대해 가차 없고 플롯도 좋아졌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루키는 그의 롤모델이다. 1990년대에 일본문학은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두 명의 무라카미가 풍미했지만 류는 문학으로 이름을 날린 뒤 사진작가, 영화감독, 방송인 등 문화예술의 전방위로 활약했다. 반면 하루키는 유명세를 얻기 시작할 무렵 인터뷰도, 자잘한 청탁도 싫어 일본을 훌쩍 떠나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머물면서 <노르웨이의 숲> 등을 썼다. 하루키는 자기 작품이 영화나 연극으로 각색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곁눈질하지 않고 묵묵히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로 살아가기에 하루키가 존경스럽다는 그에게, “어떤 작가가 재능이 사라졌어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남아서 그저 그런 작품을 ‘밀어내기’ 한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런가요?”라고 답한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작가가 자기 인생이 문학 작품처럼 절정부터 결말까지 깔끔하게 완결되기를 원한다 해도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풀리지 않아요. 당사자는 제2, 제3의 절정이 올 줄 알고 계속 가요. 제가 소설을 쓸 때도 언제나 만족스러운 부분과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그것을 극복하고 싶고 그러면서 다른 약점을 알게 되고. 평생 써도 완벽하지 못할 거라는 좌절감과 함께 다음에는 더 낫지 않을까, 대작을 쓰지 않을까 기대해요. <앵무새 죽이기>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한 편의 걸작을 남기고 작품을 더 내지 않은 작가들이 있어요. 하지만 이 작품들이 <전쟁과 평화>나 <레미제라블>만큼의 걸작은 아니잖아요. 그럼 그다음의 도전을 해야 하죠. 저는 그런 작가들이 아직 힘이 있을 때 왜 더 안 썼는지, 왜 싸움을 멈췄는지 모르겠어요. 졸작을 써서 비참해지더라도 자신의 업, 직업, 예술적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남의 평가는 상관없어요. 그런 면에서 역할 모델을 생각해보면 하루키가 대단해 보여요.”
대작을 쓰고 싶다
장강명은 작가로서의 현재 좌표를 “배를 띄우는 데 성공했고 그다음 과제인 연안 벗어나기도 막 이룬 상태”라고 말했다. 이제 자신이 가고 싶은 북극성을 향해 먼 바다로 나아가면서 100년 후에도 살아남을 대작을 쓰고 싶다고 했다. 대작을 쓰고 싶은 야심과 예술가로서 투쟁하는 태도를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작가에게 대작은 어떤 작품인지, 도스토예프스키나 빅토르 위고 말고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그는 미국의 범죄소설가인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를 들었다. 그리고 3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가 끝났다.
나는 그동안 장강명의 문학이 너무 친절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왔다. 신문기자 출신인 그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소재를 귀신같이 잘 잡아낸다. 장르문학 작가로 시작한 이력답게 쉽고 재미있고 극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은 없다. 하지만 그 친절함이 전복적이고 거친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을까, 남들이 좋아할 만한 글만 쓰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사근사근한 그의 얼굴 뒤에 문학적 야심이 불타고 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독하게 북극성 하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뚝심도 있다.
한데 나는 그의 속내를 다 들은 걸까. 다음 약속이 있다며 택시를 타고 사라진 장강명 작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좀 까다로운 인터뷰였어. 하지만 내 두려움은 들키지 않았지, 라며 슬며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에세이집 <5년 만에 신혼여행>에 나오는 문장을 참고하면 그의 진짜 고민은 이것일 것 같다. “신이 존재하고 영혼이라는 것도 있고 삶에 성스러운 의무라는 게 있다면 그 의무는 아마도 다른 사람을 네 목숨보다 더 깊이 사랑하라일 것 같다. 그런데 성실하기만 한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사랑이 충만한 인간인가. 나는 저 대작의 바다 한가운데까지 익사하지 않고 가 닿을 수 있을 것인가.”
- 글 권영미 뉴스1 기자
- 사진 손홍주
- 사진 제공 장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