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허스토리>.
그녀의 역사를 기억하라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
23번의 재판, 10명의 원고단, 13명의 변호인. 민규동 감독의 신작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이어갔던 위안부 여성들의 법정 투쟁을 다룬 영화다. 7년간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길고도 고된 재판에 임한 할머니들은 위안부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영화는 자신의 목소리로 변화를 만든 위안부 여성들과 그들을 도운 이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던 여성 경영인 문정숙(김희애)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신고 전화를 개설한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할머니들의 비극적인 과거를 알아갈수록 정숙은 정당한 보상과 사과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일교포 변호사를 선임한 정숙은 배정길(김해숙), 박순녀(예수정), 서귀순(문숙), 이옥주(이용녀) 할머니와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재판을 시작한다.
제목 <허스토리>는 ‘그녀(her)의 역사(history)’라는 뜻으로, 영화는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야 함을 역설한다. “여자들은 이게 문젠기라! 와 다 남 때문이고. 니는 어딨노? (중략) 내가 만들고, 이끌고, 다 했다, 이래 잘난 척 좀 하면 안 되나.” 사업이 성공했음에도 그 공을 남편과 운으로 돌리는 친구에게 정숙은 이렇게 말한다. <허스토리>의 핵심을 관통하는 대사다. 영화는 전쟁의 피해자로만 치부되던 위안부 여성들의 다양한 사연에 귀 기울이며 잊히거나 간과되어온 일제강점기 시대 여성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그 결과 <허스토리>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 어떤 영화보다 여성들의 모습을 다채롭게 그려냈다. 이들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포주의 삶을 선택한 여성도 있고, 비난을 감수하며 동료의 혈육을 끌어안은 여성도 있다. 한국 정부조차 주목하지 않았던 위안부 여성들을 통 크게 후원하는 여성 사업가들과 국적을 넘어 한국 위안부 여성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일본 여성들의 사연도 다룬다.
세간의 편견과 무관심을 무릅쓰고 서로 연대하여 마침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허스토리>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물결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센 2018년의 한국 사회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지는 존재들이다. 영화는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 진정한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2 영화 <여중생A>.
사춘기 소녀의 성장통이경섭 감독의 <여중생A>
<여중생A>는 허5파6 작가가 포털사이트에 연재한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 웹툰은 가정·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 온라인 게임의 명암 등 성장기의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날카롭게 짚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중생A>는 원작의 다양한 소재 중에서도 집단 따돌림과 가정 폭력, 자살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전철역에서 신문을 보는 한 여학생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신문의 첫 장에는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린 여중생 A양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여중생 A양은 누구인가. 그녀는 왜 학교에서 투신했는가. 영화는 여중생 장미래(김환희)와 주변 인물들의 사연을 중심으로 그 이면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여중생A>는 한국 상업영화가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사춘기소녀의 성장담을 극의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영화다. (성장기 한국 소녀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 중 기억에 남는 영화는 아직까지도 <여고괴담> 시리즈뿐인 것 같다.) 주인공 미래는 독서와 영화를 좋아하는 소심한 소녀다. 학교에서는 따돌림에, 집에서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그는 롤플레잉 게임 ‘원더링 월드’에 접속하거나 소설을 쓰며 현실을 잊으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미래를 일방적인 피해자로 그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근사한 글솜씨가 있고, 가상현실에서는 게임을 잘하는 멋진 플레이어이며, 위기에 처한 친구에게 손을 내미는 법을 알고 있다. 때로는 모든 희망을 내려놓고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어두운 나날들이 펼쳐지지만, 영화는 마지막까지 미래를, 그리고 극중 모든 인물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 이야기에선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냐는 친구 백합(정다빈)의 물음에 미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여중생A>가 불안정하고 유약한 마음을 지닌 성장기의 소년소녀들을 보듬는 방식이다. 극중에서 미래가 쓰는 소설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 소설의 빈칸은 앞으로 수많은 ‘미래’들이 채워나갈 것이다.
영화 <허스토리>와 <여중생A>는 여성 주도의 서사로 ‘남자 영화’ 일색이었던 충무로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우리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오랫동안 듣고 싶다.
- 글 장영엽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