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비안 리부터 소피 마르소, 키이라 나이틀리 등이 주연한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보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뮤지컬 <안나카레니나> 효과로 보이는데 이 러시아 뮤지컬을 전 세계 라이선스초연으로 가져온 배경이 궁금합니다.
러시아 뮤지컬과의 인연은 2014년 대구뮤지컬페스티벌의 폐막작으로 <몬테크리스토>를 가져온 데서 시작됐어요.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의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였는데 그 해 평단에서 최고의 뮤지컬로 인정할 만큼 완성도가 높았죠. 러시아 뮤지컬은 역사는 짧지만 무용, 음악, 오페라, 연극 등 기초예술 장르의 수준이 워낙 높아서 우리나라에서도 거부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러시아 제작진과 이야기를 나누다 왜 러시아 원작의 작품을 만들지 않고 알렉산더 뒤마의 작품을 제작했는지를 물었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을 예로 들었는데 워낙 대작이라 엄두를 못 낸다고 하더라고요. “2012년에 만들어진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를 봐라. 극장에서 촬영했으니 그대로 무대로 옮기면 뮤지컬이 되지 않겠는냐”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6년 겨울에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를 만들었으니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보러 갔는데 느낌이 좋더라고요. 지난해 봄, 직원들과 함께 가서 다시 보니 해볼 만하다 싶어서 9개월 만에 우리나라 무대에 올리게 됐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두 번 봤는데 무대가 압도적이었어요. 음악도 좋았고요. 특히 뮤지컬을 처음 본 관객들의 반응이 폭발적인데요, 프로듀서로서 <안나 카레니나>가 기존의 뮤지컬과 다른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비슷비슷한 뮤지컬 중 하나인 복제품(replica)이 아니라 진정한 (authentic) 뮤지컬을 만들려고 애썼어요. 연습도 남산창작센터에서 8t짜리 대형 타워를 놓고 실전처럼 했고요. 국내 뮤지컬 역사상 최대의 물량이라고 할 수 있는 294개의 무빙라이트를 투입했고 무대 세트와 소품 전부를 러시아에서 고스란히 가져왔지요. 의상만 우리나라에서 만들었어요. 2.5m에 이르는 여러 대의 LED 스크린과 3D 영화를 방불케 하는 대형 스크린 등 첨단 무대기술은 러시아보다 우리가 더 높은 퀄리티로 선보이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한 번 제작하면 2주 단위로 공연을 올리고 2주 쉬는 방식으로 3년 동안 공연되기 때문에 장비에 큰 투자를 해요.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공연 시장이 없지만,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투자를 했죠. ‘패티’가 등장할 때 극장의 붉은 커튼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까지 섬세하게 구현했어요. 뮤지컬 평론하는 이유리 교수가 “<안나 카레니나> 연출은 천재”라고 극찬할 정도였죠. 제작 메커니즘부터 배우들의 동선까지 모든 것을 통해 기존 뮤지컬과는 다른 러시아 뮤지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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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김용관 대표가 국내에 선보인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포스터.
3 출연자들의 메시지가 담긴 태양의 서커스 깃발.
4 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
복제품이 아니라 진품을 추구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출연진의 인터뷰를 보니 연습 당시 고생이 심했던 만큼 공연 후 만족도가 유독 높은 것 같은데 이는 진품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 결과이지 싶네요. 요즘 워낙 복제품이 넘치다 보니 진품을 지향하는 출연자와 스태프의 에너지가 관객에게 감동으로 고스란히 전해진 것 같아요. 그간의 여정을 되짚어본다면요?
2000년 클래식 전문 잡지를 만들고 클래식 연주자들의 독주회나콘서트를 여는 클래식 전문 기획사로 출발했어요. 클래식 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2005년 노라 존스 공연을 기획했죠. 작은 기획사에서 그래미상을 8개나 수상하고 세계 최고 음반 판매 기록을 가진 재즈 가수를 초청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지만 성공했습니다. 이후 2005년에 캐나다 대사관 후원으로 몬트리올 아트 마켓인 시나르에 갔는데 태양의 서커스가 화제더라고요. 호기 심이 생겼죠. 주한 캐나다 그리니우스 대사가 태양의 서커스를 그동안 한국에 들여오지 못한 이유가 도대체 뭔지 알아봐달라며 추천서를 써줘서 태양의 서커스 본사로 찾아갔습니다. 수석 부사장을 비롯, 마케팅, 해외 투자 담당, 변호사 등 5명이 둘러앉아 있는데 마치 면접 자리나 다름없더라고요. 저는 “2000년에 시작해 5,000달러의 귀국 독주회를 연간 100여 회 진행했고, 5만 달러의 클래식 음악회를 연간 10여 회 기획했으며, 50만 달러의 노라 존스 공연을 성공했고 음악 잡지 <그라모폰>과 <스트라드>, <인터내셔널 피아노>도 발행하고 있다”고 소개했어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그동안 태양의 서커스에 무수히 많은 한국 업체들이 찾아왔는데 자본이 많으면 공연을 모르고, 공연을 알면 자본이 열악했는데 저는 여러모로 적당해서 파트너로 삼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운이 좋았지요.
운이 좋다고 말하지만 상대방을 믿게 하는 저력이 있는 듯해요. 그 저력은 호기심이 생기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추진력이 아닐까요? 보통 직접 찾아가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구체화하는 것에는 취약한데 김 대표님은 다른 듯해요. 2009년 영국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친선경기 유치 때도 그랬고요.
2005년 태양의 서커스 면접 때 만났던 수석 부사장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고 운영 책임자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가 추천을 해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친선경기 유치 경쟁에 참여했는데 제안서를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가족과 발리에서 휴가 중이었는데, 12개 회사가 경쟁하는 구도에서 자본, 규모,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승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자신을 직접 프레젠테이션하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갔습니다. 스포츠도 레퍼토리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게다가 맨체스터 유나이 티드 구장 이름이 ‘시어터 오브 드림’(Theatre of Dream)이었습니다. 축구나 공연이나 입장권을 파는 메커니즘은 똑같다고 생각했고요. 축구경기에 국내 최초로 하프타임 쇼까지 곁들여서 흥행 기록을 세웠지요.
일을 같이했다고 해서 다 좋은 관계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김 대표님을 추천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2007년 태양의 서커스 <퀴담>이 대성공을 거둔 탓도 있지만, 태양의 서커스 본사에서 감동한 사건이 있었어요. 전 세계 태양의 서커스 공연장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을 제가 해냈지요. 잠실운동장의 공터에 태양의 서커스 빅탑 시어터가 서 있는데 썰렁하더라고요. 어느 나라나 그렇게 한다지만, 뭔가 아쉬웠어요. 그래서 500평이나 되는 빅탑 시어터 펜스에 <퀴담>, <알레그리아> 등 그동안 태양의 서커스에서 만든 13개 작품의 이미지를 대형 배너로 붙였습니다. 예산은 추가로 꽤 들었지만 보기는 좋았지요. 공연 당시 방문한 몬트리올 본사 사람들이 멋진 아이디어라며 감탄하더군요.
자신들도 하지 못한 마케팅을 파트너사에서 훌륭하게 해냈으니 호감과 신뢰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겸손해하지만, 살아남기 어려운 레드오션의 공연 업계에서 무조건적인 신뢰라는 블루오션을 항해하고 있는 듯해요. 2018년 계획은요?
클래식 시장은 저변이 취약해 클래식 공연만으로 살아남기는 힘들어요. 그동안 상업적인 공연을 유치해왔는데 이것이 클래식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클래식을 고집하기 위한 ‘캐시 카우’(cash cow)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동안 클래식 공연기획이 연간 4~6회 정도로 줄었는데 올해부터는 15회 수준으로 확대하려 해요. 라인업은 이미 발표했고요. 세계적으로 클래식 인구가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만큼 음악 인재가 배출되는 곳도 드물거든요. 특히 지난해 ‘영앤잎섬’과의 합병으로 서울 대표 예술축제 중 하나인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를 5월에 열 예정이에요. 실내악의 대중화에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 김용관 대표 프로필
- 1995음연 설립
- 2000마스트미디어 설립
- 2005노라 존스 콘서트
- 2006마스트엔터테인먼트 설립
- 2007태영의 서커스<퀴탐> 전국 공연
- 2009멘체스터 유나이트드 코리아 투어
- 2012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전국 공연
- 2014그레뱅코리아 설립
- 2018러시아 뮤지컬<안나 카레니나> 전국 공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보다는 받게 만드는 사람, 눈앞에 드러나기보다 가려진 사람, 무대 위에 오르기보다 무대 아래, 무대 옆, 무대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 스스로 빛나기보다 남을 빛나게 하는 사람으로서 일하셨잖아요. 20년간 문화예술 현장에 있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 공연계에는 풍부하고도 열정적인 인적 인프라가 넘치지만 ‘쇼 닥터’라고 불리는 우수한 기획자, 창작자가 없습니다. 모두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죠. 어린 자녀들을 공연장에 자주 데리고 가야 합니다. 태양의 서커스의 우수한 작품들은 모두 최고 경영자인 기 랄리베르테(Guy Laliberte)가 어린 시절 보고 느낀 것들을 재창조한 작품들이에요. 또 공연예술을 지원하는 국가나 지자체는 공연예술 단체를 확실하게 믿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줬으면 해요. 태양의 서커스는 퀘벡 발견 450년을 기념하는 축제 공모에서 퀘벡시가 거리예술을 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100만 달러를 지원한 것에서 시작됐어요. 우리나라에서 검증 안 된 젊은이들한테 100만 달러를 준다는 건 지금도 불가능하죠. 전문 공연단체조차도 100만 달러를 후원받기는 어렵고요. 하지만 기회 균등의 지원제도가 필요하고, 선택과 집중의 지원제도도 필요합니다. 잘하면 눈치 안 보고 지원할 수 있어야죠.
김용관 대표는 공연 사업을 일컬어 “눈덩이를 굴리는 사업”이라며 “처음 조그만 눈덩이를 만들기는 힘들지만 한 번 맺은 인연과 경험의 눈을 굴리고 굴리면 자산이 되어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뢰 없이는 인연과 경험의 눈덩이가 커지지 않는다. 인터뷰하는 동안 매사에 진품을 지향하는 그의 태도에서 내 눈덩이도 커져갔다. 신뢰가 개인의 자본에서 예술 생태계의 자본으로, 나아가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 글 오진이 서울문화재단 전문위원
- 사진 오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