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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2월호

안무가·무용수 차진엽 경계 너머 새로운 춤으로
젊은 안무가 중에서 그만큼 폭넓게 활동한 사람이 있을까? 인터뷰를 위해 받아본 안무가 차진엽의 이력서는 10쪽을 훌쩍 넘긴다. 타 장르와의 융·복합 작업, 해외 안무가와의 합작, 해외 연수 및 워크숍, 강연, TV·영화·광고 출연 등 한 예술가가 치열하게 걸어온 자기실현의 여정이었다.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길로 향하는 그는 다음 세대에게 분명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춤 잘 추는 무용수이자 춤 잘 만드는 안무가, 차진엽을 만났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관객이 작품을 완성한다

안무가 차진엽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무용수로 꼬박꼬박 출연한다. 춤추는 것을 좋아해 자신의 이야기를 안무로 확장시키고 싶었다는 그는 여전히 무용수라는 호칭을 좋아한다. “초기 작품은 감정의 배출구 같았다”고 자조 섞인 이야기를 먼저 던진다.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작품에 흠뻑 빠지기 때문에 자기 세계에 갇힐 때가 있어요. 출연하지 않고 안무만 했다면 저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을 생각하고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죠.”
현대 춤들이 얼마나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두컴컴한 객석에서 수동적으로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영감이나 자극도 없이 지쳐버릴 때가 있다. 안무가는 작품을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 어떤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작품을 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같은 공간에서 퍼포머와 밀접하게 교감하기를 원했다. 작품의 주제를 정하기도 전에 관객 참여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레 앞섰다.
“관객과의 관계, 공연의 형식, 새로운 공간의 활용성을 먼저 생각했어요. 무슨 이야기를 담을 지는 나중의 문제였고요. 마크 로스코가 남긴 ‘그림은 붓을 놓은 시점이 아니라 관객이 비로소 작품과 교감할 때 완성된다’는 말을 좋아해요. 관객이 작품을 완성하지요.” 장소특정적(site-specific) 공연을 통해 관객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켰다. 문화역서울 284 RTO극장에서 열린 ‘콜렉티브 에이’ 창단 공연 <Rotten Apple>(2012)은 건축-관객-퍼포머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관객과 퍼포머의 고정된 역할을 대상이자 주체로 확장시킨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은 차진엽의 작품 대다수를 관통하는 주제다. <Three Lips>(2013)는 그리스 비극 중 여인들의 이야기를 가장 처절하게 보여주는 <트로이의 여인들>을 재해석했고, <Body Orchestra: 누가 그녀의 빨간 구두를 훔쳤을까?>(2013)에서는 여성의 욕망을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에 빗대어 그렸다. <Rotten Apple>(2012)과 (2013)에서 탐욕과 허영에 덮인 현실을 여성의 시각에서 통렬히 풍자하는가 하면 <춤, 그녀… 미치다>(2014)에서는 열정적인 무용가이자 감성적인 여성으로서 안무가 자신을 그대로 투영한 춤 독백을 보여주었다.
지난해 개관한 문화비축기지에서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함께 춤 전체를 ‘여성’이라는 일관된 고리에 연결 지은 작품 <미인: MIIN- Body to Body>를 공연했다. 여혐, 비혼주의와 같은 사회 이슈를 다룬 작품에서 여성의 관점이 더욱 풍부하게 감지된다.
“온전히 여성 본연의 몸 자체, 거기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었어요. 저는 여성의 몸을 둥근 원(員)으로 생각해요. <리버런>(2015)이라는 이전 작업에서부터 원의 개념이 명확해졌죠.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함, 생명의 순환, 윤회, 우주의 섭리와 같이 끊임없는 변화와 반복을 뜻하는 원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의 몸과 맞닿아 있어요.”
<Body to Body>는 여성의 몸을 상징하는 원형의 공간에서 펼쳐졌다. 둥글고 촉감적인 사운드가 공간을 감싸고 영상 이미지로 생성과 소멸, 합체와 분리를 반복하는 카오스의 원형 패턴이 투사된다. 바닥을 빨갛게 칠하고 그 위를 모래로 덮었는데 무용수들이 움직일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빨간색이 마치 여성의 속살처럼 보인다. 벽면을 에워싼 유리에 반사되는 무용수들의 모습(reflection)은 미의 기준에 따라 성형 복제되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지적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새로운 형태의 움직임으로 꾸준히 보여준 차진엽은 문화비축기지라는 새로운 공연장을 발굴해 춤 공연을 처음으로 시도함으로써 주변 환경을 십분 활용한 창의성과 작품의 완성도를 보여줬다”는 평과 함께 한국춤평론가회가 수여하는 ‘2017 춤평론가상’ 작품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1 <미인: MIIN- Body to Body>(2017).
2 <춤, 그녀… 미치다>(2014).
3 <Rotten Apple>(2016).

융·복합, 춤 경계의 확장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단과 달리 ‘콜렉티브 에이’는 안무가를 지칭하지 않는다. 단체명은 집단을 뜻하는 콜렉티브(Collective)에 ‘모든 종류의 예술들’(All kinds of Arts) 혹은 단수명사 앞에 붙는 ‘하나’의 의미인 에이(A)를 합성한 것으로, 여러 장르의 사람들이 모여서 단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차진엽의 작품은 설치미술, 영상, 사진, 의상, 음악, 사운드아트, 그래픽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가 만나는 융·복합 예술의 본보기가 되곤 한다.
“다른 장르들이 춤을 보조하기 위해 단순히 작품에 귀속돼 있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로서 융화되기를 원해요. 제 것만을 강조하지 않고 협업 아티스트들의 고유한 성격을 존중하면서 ‘공동작업’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중요하죠.”
춤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융·복합은 의욕만으로는 완성도를 놓칠 수 있다. 더욱이 의식 없이 좇는다면 작품 전체를 퇴색시키는 양날의 검과 같다. 융·복합이 작품에 어떤 의미를 띨지 염두에 두고 타 분야를 끌어들여 춤과 어우르는 차진엽의 탁월한 감각은 그런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노마드, 춤 창작의 자세

융·복합 속에서도 춤의 기본 자리는 결국 움직임이다. 차진엽의 움직임은 몸의 감각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스라엘 바체바무용단(Batsheva Dance Company)의 오하드 나하린(Ohad Naharin)이 개발한 가가테크닉은 극단의 감각을 이용한 역동적인 안무법으로 국내 현대 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2000년대 중반에 그는 가가테크닉을 이어받은 영국 호페쉬 쉑터 무용단(Hofesh Shechter Company)과 네덜란드 갈릴리 댄스 컴퍼니(NDD/Galili Dance)에서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한 발 먼저 감각에 기초한 춤을 체득했다. 덧붙여 세계적인 안무가와의 작업은 무용수로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안무가로서 어떻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몸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말한다. 귀국 후 그는 본격적인 안무과정에서 감각으로부터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형태를 만들어 몸을 구조화시키는 안무법과는 상반된 접근이다.
차진엽의 안무 특징을 묻자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을 잇는다. “경우에 따라 변해요. 다르게 말하면 자신만의 스타일이나 춤 색깔을 명확히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영민한 아티스트들이 고유의 춤 어법을 구축하는 것에 비해 저는 계속 유동적인데, 이게 과연 맞는 것일까 고민할 때도 있었어요.”
그는 새로운 무용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안무 방식을 찾아내고 있다. 현대무용수 두 명, 한국무용수 한 명, 배우 한 명, 보디 모델 한 명이 출연한 <Body to Body>에서는 현대무용수로만 구성된 그간의 창작과정과 사뭇 다른 움직임 조합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이번에는 출연진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인물을 끄집어내는 과정이 흥미로웠다고 한다. 고정된 틀, 특정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 유랑하는 안무법이야말로 다음 창작을 자극하는 원동력일지 모른다.
“나만의 확고한 안무법을 만들겠다거나 훌륭한 작품을 남기겠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의 스타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행위를 하고 작업을 이어나가는 창작자, 다음엔 뭘 할지 궁금해지는 아티스트였으면 해요. 저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고 계속 변화하고 있어요.”

글 김인아_ 춤웹진 기자
사진 오계옥
사진 제공 콜렉티브 에이(Collective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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