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은 냄새나고 더럽다는 숙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발들이 더럽게 보인다면 맞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버린 신발이고 우리가 폐기처분한 신발입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소비문화를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서울고가가 다시 태어나게 된 맥락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서울역에는 다리 밑 염천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화 거리입니다. 신발은 누군가의 시간일 수도 누군가의 오래된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도 있는 소재입니다.”
요약하면 황지해 작가는 폐기처분될 고가도로의 운명에서 새로 태어난 서울로7017의 모습에서 착안해 재활용함에 버려진 신발을 택했다는 것이다. 서울로7017은 서울시의 영역이고, 서울역 광장은 철도청, 나라의 땅이다. 그래도 가든 디자이너인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이 “누가 봐도 예쁘지만 진부한 꽃과 나무”를 택했다면 작품은 시민들의 요청에 의해 두 영토를 이으며 좀 더 오래 남았을지도 모른다.
예술의 기준은 무엇인가
<슈즈트리>는 미술관 바깥에서 태어난 공공미술이기에 <슈즈트리>를 둘러싼 비평도 그다지 많지 않다. <슈즈트리>에 대해 비판적인 논자는 <슈즈트리>가 응당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보행로를 은폐했다는 점, 서울역 광장에 부적절하다는 취지로 주로 장소성과 개념 구성이 치열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비평한다. “작품이 완성되면 그때 말해달라. 기능성, 심미성, 공공성이 기반되지 않는다면 전달자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 이야기가 전달될 것이라는 자신이 있다”고 말했던 황 작가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 문화평론가와 최범 미술평론가, 반이정 미술평론가 등이
<슈즈트리>를 ‘흉물’로 치부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안양문화예술재단 정재왈 대표는 간접적으로 공공미술이 처한 험난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최범 미술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슈즈트리>는 다수 시민들이 흉물로 치부하고 미술 전문가들은 찬성하든 반대하든 이를 예술작품으로 다루었던” 독특한 작품이다.
공공미술의 비극
반이정 미술평론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슈즈트리>를 둘러싼 불평은 크게 셋. 1억 4,000만 원 세금. 9일이라는 짧은 전시. 공공미술의 부적절성. 풀어 말하면 고작 9일간 헌신 3만 켤레의 넝마를 보려고 세금 1억 4,000만 원을 썼냐는 것”이라며 “설령 공공미술이라 한들 만인의 취향을 충족시킬 순 없다. 군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광화문 이순신과 세종대왕처럼 위인상, 혹은 포항 과메기, 영덕 대게, 금산 인삼, 청양 고추처럼 곧잘 웃음의 소재로 전락하는 지방 특산품 조형물 같은 무색무취한 공공미술만 살아남는다. 있는 듯 없는 듯 무난한 조형물은 충격과 불편한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의 본질과도 먼 거리에 있다”며 흉물 논란을 비판했다.
정재왈 대표는 “‘이게 예술이냐’는 논쟁을 촉발하고 제대로 평가받기 전 다수 여론이라는 미명하에 휩쓸려 소멸하는” 공공미술 절대 다수의 비극에 대해 말했다. 최범 미술평론가는 “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있었으면 이만큼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묻는다. <슈즈트리>는 바로 그 부적절한 장소성 때문에 최근 태어난 미술작품 중 가장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 되었던 것이므로 불행한 공공미술이자 행복한 현대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 안에서는 아름다움이 이미 진부해진 지 오래지만 미술관 밖 공공장소에서 대중들은 좋은 재료로 예쁘게 만들어진 것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드러낸다. <슈즈트리>가 거대한 삽질이었다면 미술관 안과 밖 사이 깊은 도랑을 메우려던 삽질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쟁에 덧붙여 <슈즈트리>에 대한 의견이 유통됐던 방식에 주목하고 싶다. 대중들은 SNS를 통해 “못생긴 것”에 대한 적극적인 혐오감을 드러내고 그들의 취향과 일치하는 비판만이 선택돼 SNS에서 유통됐다.
<슈즈트리> 못지않게 이 ‘흉물’을 옹호하는 “가르치려고 드는” 전문가들을 혐오하는 태도도 분명했다. 공공미술이 벽화에 갇혀 있을 때 어떤 주민들은 그 미술을 못사는 마을에 대한 표식이나 재개발을 가로막는 벽으로 보고 혐오했다. 공공미술이 광장으로 나왔을 때 시민들은 소비자의 눈으로 그 미술을 상품의 기준으로 살피고 별점을 매기고 평가를 공유했다. 어느 쪽이나 미술의 의미엔 맞지 않고, 공공성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공공미술이 상상해온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건 그 이후가 중요하다. 다음에 태어날 공공미술은 이 공동체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 넣을 수 있는 더 큰 신발짝을 가지고 와야 한다.
- 글 남은주_ 한겨레 기자
- 사진 제공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