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 게임 <테트리스> 메인 화면에도 등장한다.
도시의 미래, 문화의 역할
소비에트 시절 관료들의 숙소와 관청으로 쓰였다는 대규모의 메트로폴 호텔, 소비에트 실용주의의 육중한 건물들 위에서 빛나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 첨탑들, 볼쇼이 극장 바로 옆에 위용을 과시하며 서 있는 의회 건물, 그리고 그 뒤에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문구 위에서 손을 치켜들고 서 있는 마르크스 동상…. 소비에트 시절의 유산이 모스크바의 문화정책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개인적인 궁금증으로 모스크바에서 첫날을 시작했다.
세르게이 소뱌닌(Sergei Sobyanin) 모스크바 시장은 개막식에서 400여 개의 공공 공원 재정비 사업의 성과를 자랑하며
모스크바를 문화도시로 소개했다. 소뱌닌 시장은 취임 후 무제온 예술공원(Muzeon Park of Arts), 고리키 공원(Gorky Park)
등을 문화적으로 재생했을 뿐 아니라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하는
시책을 펼쳐왔다. 소뱌닌 시장은 개막 연설에서 “예전에는 도시들이 공장을 유치하려고 싸웠다면, 지금은 창의성, 재능, 투자,
도시 개발 효과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유치하려고 싸우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어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의 부인이면서 동지였던 나탈리아 솔제니친(Natalia Solzhenitsyn) 여사가 기조강연을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의 역할을 주문했다. 그는 변화의 속도에 무서움을 느끼는
시민들이 있고, 시대의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 바로 문화의 역할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세대 간,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 가능하고, 그것이 더욱 ‘문명적인 인간상’을 유지하도록 한다고 강조했다.
WCCF 의장을 맡고 있는 저스틴 사이몬스(Justine Simons
OBE) 런던시청 문화부시장은 “미래 도시의 상을 상상하고 구상해내는 것”이 바로 세계도시 문화정책가들의 숙제라고 제시했다. 지금 세계도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도시 인구의 급증, 지가 상승과 주거난, 환경문제 해결에서 문화가 ‘황금실’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WCCF의 오래된 토론 주제다. 어쩌면 모스크바에 모인 23개 세계도시 대표단*은 모스크바 시장의
정치적 주문, 솔제니친 여사가 언급한 시민사회의 문화적 우려, WCCF 의장이 그리는 문화정책가로서의 리더십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숙제를 안고 사흘간의 총회에 참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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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 직후 전
참가자들의 기념촬영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네 번째가
각각 세르게이 소뱌닌
모스크바 시장, 저스틴
사이몬스 런던시
문화부시장(WCCF
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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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부인이면서 동지였던
나탈리아 솔제니친
여사가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영역을 가로지르는 문화정책의 리더십
WCCF에서 생각하는 미래의 도시 문제에 대응하는 문화정책의 역할이 이번 총회 첫 번째 세션의 주제로 설정되었다. 바로
‘영역을 가로지르는 문화정책의 리더십(Weaving the golden
threads-cultural leadership beyond our role)’이다. 보다 문화적인 도시로서 상황이 조금은 다를 것으로 기대했지만, 런던의 문화부시장도 런던 도시계획에서 문화 분야 계획은 달랑 1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서울도 런던과 마찬
가지로 별도의 문화 플랜이 있지만, 물리적인 토지 이용계획을
서술한 도시계획이 더 강력한 실행력과 구속력을 가진다.
토론 패널들은 이론가들이 아니고 현장 실무자들인 만큼,
다른 정책 영역과 소통은 결국 ‘안면 행정’이 중요하다는, 만국
공통의 진리를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뉴욕시에서는 보건, 이민,
도시설계 담당 부서에서도 상주예술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상하이에서 온 참가자는, 가운데 존재하면서 배우러 오기를 기다리는 ‘유니-버시티(uni-versity)’ 방식에서
탈피해, 문제가 있는 곳으로 전문가를 내보내는 ‘멀티-버시티(multi-versity)’ 방식의 문화기업가 양성 과정을 소개했다.
이어진 엑스포(Expo) 세션 중 하나가 암스테르담 시청에서
작년부터 준비해오고 있는 ‘리더십 프로그램’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이었다. 런던의 유명한 빅댄스(Big-Dance) 연출가이기도 한
저스틴 사이몬스 부시장은 브레인스토밍 내용을 직접 정리하면서,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화적 리더십 만들기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문화적 리더십에는 행정에 대한 폭넓은 이해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는 활동가 정신, 그리고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스토리텔러 기질, 본인의 고유한 가치를
믿는 자부심(Authentic to yourself)까지 폭넓게 제기되었다.
다음 날 진행된 분임토의 주제 중 하나인 ‘창의력 vs. 행정의 규칙(Creative Power vs. Administrative Order)’ 역시, 예술가로서 문화행정의 수장을 맡고 있는 그의 문제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사무국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BOP 컨설팅의 연구진이 귀띔해주었다.
모스크바 솔리얀카 미술관(Solyanka State Gallery)의 표도르 파블로프 안드레비치(Fyodor Pavlov-Andreevich) 관장의 폭로성 발표는 매우 논쟁적이었고, 마지막 날 공개 토론회에서도 확인되는 모스크바 문화계의 기류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아방가르드한 행위예술가로 세계적으로도 꽤 알려진 그는 직접
미술관 재원 조성을 위해 본인의 몸을 관객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맡기는, 나체의 죄수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최근에 이
미술관에서 예정된 행위예술 작품이 당국의 검열로 불허된 사태를 소개했고, 런던에서 온 참가자는 “자유가 없는 미술관 관장이
도대체 무슨 정책적 역할을 할 수 있나?” 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이에 “그는 많은 미술관 중 하나의 박물관을 담당하는 한 사람일뿐”이라는 궁색한 답변을 내놓은 모스크바 시청의 문화 담당자의 답변을 들으면서 문화융성을 국정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떠오르기도 했다.
문화정책과 기후변화
여러 정책 영역을 가로지르며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정책의 리더십을 기대하는 이번 총회에서 의욕적으로 도입한 것이 둘째 날 개최된 ‘기후변화와 문화정책: Breaking boundriesbringing culture into the climate conversation’ 세션이었다. 세계도시들 간의 기후변화 공동 대응을 위해 구성된 C40 기후리더십 그룹(C40 Climate Leadership Group)의 대표 안나 비치(Anna Beech)와 NGO 단체인 줄리의 자전거(Julie’s Bicycle)의 앨리슨 티첼(Alison Tichell) 대표가 패널로 초대되어,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 문화예술계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거듭 역설했다. 하지만 WCCF 사무국에서는 올해 세계도시의 우수 정책 사례집을 만들면서 기후변화 대응 사례를 하나의 주제로 별도로 제시했지만, 실제 사례가 별로 없어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모스크바에서 발표한 공원 녹지에 대한 시민의 의식,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과의 상관관계였다. 문화예술이 도시의 환경을 보다 살기 좋게 하면서 동시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듯이, 공원 녹지도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자본주의화한 도시에서 도대체 ‘좋은 것’이 ‘계속 좋은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문제들, 서로 다른 맥락에 따라야 할 해법
행사 마지막 날, 올해 처음으로 도입된 공개 정책 토론회는,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인 ZIL문화극장(ZIL Culture Centre)에서 개최되었다. ZIL문화극장은 1937년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진 최초의 문화시설인데, 당초 리카체프(Likhachev)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그동안 각 도시의 문화정책 담당자들끼리 속내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비공개로 진행되던 총회의 관행을 깨고, 올해 처음으로
일반인을 초청한 정책 세미나였다. 온라인으로 방송되고, 시민과
소통한다는 취지에 ZIL문화극장의 장소성은 충분히 부합하는 듯
했다.
하지만 ‘미래의 문화정책 어젠다: What next for culture in
world cities?’를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는 결국 모스크바 문화예술계와 문화정책 당국 간의 긴장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두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질문하는 아빠는, 정부가 지나치게 공공 문화시설 중심으로만
투자하고 관리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담아서, 민간 영역 문화
기관에 대한 재원 조성 방안과 민관협력 강화 방안을 물었다. 오히려 가장 자본주의화한 뉴욕에서 온 패널은, 세금을 낸 시민이
의사결정하는 정부 예산과 기부자가 혼자 결정하는 기부를 통한
재원 조성 사이의 균형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마드리드에서 온
패널은, 설사 영리 추구형 문화사업이라도 그 기반이 되는 토양을 조성하는 것은 공공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자원이 더 이상 국가 소유가 아닌 상황에서 여전히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해야 할지는 불명확하고, 국민적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시점이라고, 스페인의 어려운 상황을 토로했다. 지정 토론자로 참여한 고홍석 서울시 문화본부장은 “세계도시들이 직면한 문제는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풀어가는 해법은 결국 시민의 의식 수준과 사회적 환경에
맞추어 찾아가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세계도시문화리포트(WCCR) 2015>에서 서술했듯이, 모스크바 시장을 포함한 모스크바 시민들은, 공원을 비롯한 도시공간과 환경 전체를 문화로 인식하는, 광의의 문화 개념을 사용하는 듯했다. 이처럼 문화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정치·사회적
맥락이 다른 도시들이 모여서, 같은 문제 사례를 공유하되, 자기나라로 되돌아가서 적용할 수 있는 해법은, 그 도시의 맥락에 맞추어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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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L Culture Centre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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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마지막 날 ZIL
Culture Centre에서
진행된 공개 정책
세미나.
내년에는 서울에서, ‘문화도시에서 문화시민도시로’
서울이 내년 총회 유치 도시라는 사실은 총회 첫날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폐막식에서 공식 발표된 후, 특히 아시아 지역의 회원 도시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개최되는 행사에서 아시아적 맥락을 반영해보자고 의기투합하는 등 내년 서울 총회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각국의 큰 기대감 속에서 치러질 2017년 총회의 주제는 서울문화비전 2030과 연계한, ‘문화도시에서 문화시민도시로: 시민이 만들고 시민이 행복한!(The Creative-CivicCity: By The Citizens and For Their Happiness)’이 제안되었다. 기존의 도시 마케팅 중심의 ‘창조도시’와 인프라 중심의 ‘문화도시’ 만들기에서, 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문화시민도시’로, 세계도시들이 문화정책의 중점을 전환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특히 2017년에는 세계 여러 도시에서 초청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간의 협업 워크숍 방식으로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정책개발 전문가 연수 프로그램(Leadership Programme)이 처음으로 병행될 예정이다. 유럽 중심의 문화정책 논의가 아시아로 넘어와서 어떤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낼지, 기대해볼 일이다.
* WCCF의 회원 도시는 총 25개 국가의 33개 도시인데, 이번 총회에는 23개 도시만 참여했다. 참가한 도시는 서울, 도쿄, 상하이, 홍콩, 선전, 싱가포르, 런던, 에든버러, 암스테르담, 브뤼셀, 파리, 이스탄불, 스톡홀름, 마드리드, 모스크바, 빈, 바르샤바, 로스앤젤레스, 뉴욕, 샌프란시스코, 몬트리올, 토론토, 부에노스아이레스다.
- 글 김해보
- 서울문화재단 정책연구팀장
- 사진 모스크바 시청, 김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