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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9월호

국악평론가·연출가 윤중강 언제나 ‘마이너리티’를 주목한다
한국의 1호 국악평론가 윤중강. 그는 국악 판에 몸담고 있지만 평론가로 활동한 지 31년째 국악계라는 좌표에서 자신을 ‘마이너’에 위치시키며, 현재 마이너로 일컬어지는 것들에 애정을 가지고 국악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쓰기를 쉬지 않으면서 공연기획자와 연출가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그가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을 모아줘’ 캠페인에 참여했다. 국악 관련 자료를 전하기 위해 용두동 서울문화재단을 찾은 윤중강 평론가를 만났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평론가’ 하면 점잖으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된다. ‘국악평론가’라고 하면 여기에 ‘고급진’ 한복의 이미지가 더해질지도 모르겠다. 윤중강 평론가는 그런 이미지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대학(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하기 위해 가야금을 배웠고, 국악을 하면서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 전반을 두루 섭렵했다. 1985년에 <객석>을 통해 국악평론가로 데뷔한 이후 권위와는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서 국악계의 권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그는 지금까지 열 권에 이르는 평론집을 냈고, KBS 1FM과 국악방송 등을 통해 대중과 만났으며, 국악 축전(2004~2005)을 비롯한 크고 작은 공연에 기획, 예술감독으로 참여해 국악의 판을 뒤흔들었다. 부산국립국악원의음악극 <부산아라>(2011)를 시작으로 연출가로도 활동하고, 1930년대 ‘만요’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이를 소개하는 작업도 펼치는 그는 걸어다니는 방송국이자 박물관처럼 느껴지는 사람이다. 국악평론가 생활 31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그는 놀라우리만치 에너지 넘치고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보인다.

선생님의 글을 보면 국악을 이야기하며 1970~80년대 블루스를 언급하기도 하고, 평론집 중에 영화를 모티프로 한 책이 있을 정도로 영화도 좋아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문화예술 전반을 어떻게 그렇게 다채롭게 흡수하며 그 에너지를 꾸준히 이어오는가.

예전에 백남준이 “나는 선비다”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얘기하는 선비는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으로, 문학·사학·철학과 예술을 두루 아는 이를 칭한다. 나는 그가 말한 ‘선비’로 살고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1930년대에 관심이 많은데 종종 내 안에 그 시절의 예술가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극작가 김우진과 작곡가 김해송도 있고, 어떤 모던보이도 내 안에 있어서 명동 신세계백화점 앞을 지날 때 예전 ‘미치코 백화점’을 지나는 듯 느껴지기도 하고, 서울문화재단 앞 청계천변을 보면서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생각났다. 1930년대를 살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게 다른 사람과 좀 다른 것 같다.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였지만 어떻게 보면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아주 진지한 것과 가벼운 것이 공존하고 국악과 양악이 모두 어우러지던 시기였으니. 가요와 함께 민요를 바탕으로 새롭게 불린 신민요, 코믹송인 만요, 외국에서 들어온 재즈 등이 일제강점기에 있던 네 가지 장르다. 나는 그 장르들을 넘나들었고, 지식이 깊지는 못해도 넓기 때문에 국악만 하기에는 너무 답답하다. 내 지식과 정보를 국악에만 한정하는 게 싫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홍난파, 윤심덕, 그 시대의 지식인들, 그들이 지닌 특징과 매력이 모두 내 안에 있어서 그것을 발휘해야 하는데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930년대 모던보이를 꿈꾸는 윤중강’이라고 보면 될까?(웃음) ‘만요’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말 나온 김에 그 이야기를 더 이어가면 좋겠다. ‘만요컴퍼니’를 운영하며 대중에게 아직 생소한 만요를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지 않나.

흔히 일제강점기에 대해 얘기할 때 억압받고 힘들게 살았던 것이 주로 얘기된다. 국악 학자들도 그 시대 경향에 대해 슬프고 한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1920~40년대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오히려 ‘나라를 잃었지만 일본인들이 억압하는 상태에서 슬프고 주눅 들어 사는 것은 그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만요를 만든 김해송 같은 작곡가가 그랬을 것이다. 만요는 웃긴 노래다. 한국의 민요와 일본의 엔카, 미국의 재즈 등 다양한 요소가 섞인 독특한 노래인데, 가사로는 당시의 시대상을 희화화한다. 김해송의 <청춘삘딩>이란 곡엔 새로운 직업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두부 사려~’처럼 외치는 소리로 시작해 모던보이의 출근길 풍경, 신문기자 등 새로운 직업인에 대해 말라깽이, 안짱다리, 사팔뜨기 등 묘사를 늘어놓은 노래다. 광복 이후의 만요로 남아 있는 건 <빈대떡신사> 같은 곡이다.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리집에서 매 맞는다”라는 대목처럼 상황이 슬프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희화화해 늘어놓는 것이지. 신신애가 부른 <세상은 요지경> 같은 곡도 만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셈이다. 1930년대에 많은 사람은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고, 만요는 평범한 사람들의 그런 소박한 희망을 담은 노래다.

만요로 음악극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실은 공연한 적이 있다. 너무 제대로 못 터뜨려서 그렇지(웃음). 전에 내가 진행하던 국악방송 프로그램에서 만요를 튼적이 있는데 청취자들이 참 좋아해주셨다. ‘아 이런 걸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만요컴퍼니에서 2011년에 음반을 냈고, 그해에 만요컴퍼니가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플랫폼의 상주단체로 있으면서 <인천 세 자매-홍예문-로맨스>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갈등하는 근대여성 세 자매의 이야기를 ‘낭독음악극’으로 만들어 공연했다. 사실 생각은 많은데 크게 보여주지 못한 프로젝트가 더 있다.

만요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는 인터뷰 내내 여러 번 언급한 작곡가 김해송이 6·25전쟁 이후 종적을 감추기 전에 마지막으로 공연한 곳이 현재 명동예술극장으로 바뀐 공연장 ‘명치좌’였다고 했다. 명동예술극장이 재개관해 1주년을 맞이한 2010년, 그는 만요와 김해송을 인연으로 ‘노래와 영화 속 명동풍속도’라는 강연도 열었다. 서울 곳곳에 문화예술의 역사가 압축돼 있고, 그는 그 역사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수집하는 수집가다.
어찌 보면 1930대를 ‘애정하는’ 그를 요즘 우스개로 영락없는 ‘옛날 사람’이라고 생각할 법하지만, 윤중강은 줄 곧 음악의 좌표에서 국악을, 국악계의 좌표에서 평론을 ‘마이너’에 포지셔닝해온 사람이다. 대가에 대한 쓴소리도 거침 없이 했고, 국악의 대중화를 주장하며 적도 많이 생겼다. 20년 전 그가 국악이 나아갈 방향과 관련해 언급한 ‘퓨전(fusion)’ ‘크로스오버(cross-over)’와 같은 단어에 당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 두 단어는 제법 흔한 표현이 됐다. 국악기로 록 음악을 하는 잠비나이 같은 팀이 세계 최대의 록 페스티벌인 영국 글래스톤베리의 무대에 서는(2014년) 시대가 됐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1, 2 윤중강 평론가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꾸준히 글을 써 평론집을 내고 있다. 2015년에 나란히 발간된 열 번째 평론집 <비평에 해답이 있다>(사진1)와 아홉번째 평론집 <시대와 축제를 읽다>(사진2).
3, 4 윤중강 평론가(사진3)는 그간 수집한 국악 관련 자료(사진 4)로 ‘서울을 모아줘’ 캠페인에 참여했다.

당신은 자신을 항상 ‘마이너’에 포지셔닝한다. 평론가로서 생각하는 국악의 위치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대해 듣고 싶다. 정말 국악이 마이너라고 생각하나.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5 1930년대 ‘만요’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연구한 윤 평론가는 이를 소개하는 만요콘서트를 진행했다.
6 회의 장면을 연출한 만요컴퍼니 멤버들(2011).

국악은 지금대로라면 더 발전하거나 영역을 넓힐 수 없다고 본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대학 교육 시스템과 국립국악원 중심으로 한 공연장의 국악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치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즉 그 이상으로 할 수 없다는 거다. 국악의 외연을 넓혀야 하고 그러려면 국악 판에서도 마이너에 있는 이들이 잘돼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악에서는 ‘가무악희’라고 해서 노래하는 사람과 춤추는 사람, 악기 연주하는 사람, 연희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 연희하는 사람을 잘 대우해주지 않는다. 내가 쓴 글 중 많은 부분에서 국악의 그런 마이너를 주목해야 한다고 얘기해왔다. 1990년대에는 ‘21세기는 해금의 시대’라고 얘기했더니 사람들이 ‘놀고 있네’ 라고 반응했다. 국악기인 ‘가거대피해-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중에서 해금은 마이너였는데, 조옮김이 가능하다는 점 등 해금이 여러 면에서 높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해금의 디바> 같은 공연을 만들기도 했다.
처음으로 대학로에서 국악 공연을 기획한 사람도 나다. 공연하며 국악 하는 사람들에게 ‘국악도 대학로로 가야하고 대학로의 문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당시 강은일, 김용우 같은 친구들이 같이했는데 그들은 연주만 하겠다고 하더라. 그런데 대학로에서는 연주만 하지 않고 관객과 대화도 하는 식으로 가야 했다. 사실 연주자 사회자가 나뉘어 있어서 내가 사회를 보고 돈을 벌면 나도 좋았겠지, 그러나 대학로의 공연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 그런 걸 탈피해서 공연했다. 2004~2005년 국악축전, 2012년 아리랑페스티벌도 국악 공연으로서 여러 가지를 처음 시도하는 자리로 의미 있었고.

‘국악의 대중화’ ‘대중음악의 국악화’를 얘기할 때 국악계 내외의 호불호도 많이 갈린 것으로 안다.

정말 많았다. 1990년대 중반에 내가 방송에서 그런 얘길 하니 한 대학교수가 조용히 나를 불러 얘기한 적도 있다. ‘국악은 본디 격이 없는 음악이고 이걸 대학에서 수용해 격을 높여놨는데 당신이 왜 그렇게 다시 격을 떨어뜨리냐’고 하더라. 그런 모습을 보고 국악이 ‘그들만의 음악’이 돼간다고 느꼈고 그건 곧 망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국악이 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일정 부분의 고급스러운 음악만 좋아하느냐는 게 내 생각이었지. 지금은 예전에 비판하던 이들의 태도도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다.

평론가로서 본인이 국악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보나.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많이 노력한 것 같다. 내가 1970년대 후반 국악을 시작했는데 오랫동안 사람들은 ‘전통 음악’만 얘기했다. 그래서 전통 음악보다는 ‘창작 음악’에 관심을 갖자고 했지. 1985년 <객석>에 평론가로 데뷔하며 쓴 글이 황병기 선생에 관한 글이었는데 그는 창작 음악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지 않나. 1990년대에 들어서는 국악의 돌파구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1994년 ‘국악의 해’에 공연을 많이 했는데 막상 국악만으로는 콘텐츠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국악과 재즈의 만남’ 같은 기획이 많이 생겼지. 그래서 ‘크로스오버’ ‘퓨전’을 국악의 방향으로 언급했다. 한국 음악에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1994년에는 글을 쓰고 살짝 관계하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2004년이 되면서 국악 축전의 예술감독을 맡았고, 그때 내가 미움을 좀 받았다. ‘국악은 전통이고 나이 많은 사람이 잘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나는 ‘국악은 창작이고 젊은 음악가도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으니까. 새로운 흐름을 만들면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척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척 싫어한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7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2016)의 한 장면. 윤 평론가는 여우락 페스티벌의 모든 프로그램을 보며 ‘청중’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매체가 온라인으로 다변화하면서 누구나 공론장에 쉽게 글을 쓸 수 있고 평론가를 자처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면서 평론·평론가의 가치가 절하되는 듯 느껴진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한 대중음악 평론가는 ‘평론가를 양성하는 교육 시스템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더라.

일단 대학 교육에는 기대를 안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교육을 받고 성장한 사람, 뮤지션에게는 기대를 걸게 된다. 고무적인 것은, 예전 국악계 학생들은 수직적인 사고를 했는데 요즘은 몰라보게 수평적인 사고를 한다는 점이다. 스승이 자신의 방식을 제자에게 고집하면서 가르치는 식이었는데, 요즘은 제자가 공연하면 스승이 오질 않는다. 학교는 학교이고 공연은 공연이라는 것이지. 근 10년 사이의 변화인 것 같다. 학생들이 학교나 국악계에 기대기보다는 시스템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예전에는 선후배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같은 세대, 또래들이 작업을 함께 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들에겐 ‘우리는 인디 국악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고 그렇게 홍대 시스템을 닮기도 한다. 실제 홍대 앞에서 밴드 하는 친구들과 교류도 하고, 동세대들끼리 그룹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평론과 관련해서도 대학에서 강의가 개설되곤 한다. 교과목에 평론 분야가 포함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론을 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잡다한 것에 대해 얇고 넓게 알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 부분도 교육해야겠고. 지금 대학교에서 하는 국악교육은 창의성의 교육이 아니라 전통의 전승적인 측면과 모방적인 측면이 혼재된 교육이다. 지금 변화하는 환경에 너무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최근에 한 언론에서는 ‘국악이 뜨고 있다’는 기획보도를 했다. ‘국악의 대중화’ ‘대중음악의 국악화’가 조금씩 실현되는 것 같은데 현장에서 그걸 체감할 수 있나.

그렇다. 올해 국립극장에서 열린 여우락 페스티벌을 모두 봤다. 사실 눈길이 간 것은 무대에 오른 사람들의 국악적인 깊이보다는 청중이 우수했다는 점이다. 청중이 공연 문화에 익숙하고 ‘국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에 대해 우호적이다. 무대의 사정이나 음향이 별로 좋지 않아도 명인에 대한 공연이라면 그걸 감수할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을 모아줘’ 캠페인에 참여했다. 국악과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 왔는데 어떤 면에서는 선생님 자체가 걸어다니는 박물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관심 가진 분야는 자료를 수집해 책이나 음반으로 발간하곤 했다. 가야금에 대한 팸플릿과 전단을 모아서 최근에 <종이에 스민 가야금>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하고, 2008년에는 전시도 했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자료는 국악 관련된 서적과 자료, 서울에 관련된 음반들이다. 아리랑에도 관심이 많아서 관련 음반을 갖고 있다. 음반을 모으고 제작하면서 언제부턴가 음향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 그 음악에 담긴 의미와 기억이 나에겐 더 소중하다. 특히 1930년대의 음악에 대해 계속 수집하고 연구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 시대의 지식인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문화+서울

진행 이규승
서울문화재단 홍보팀장
정리 이아림
사진 김창제
자료 사진 제공 민속원, 만요컴퍼니,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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