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절차, 그대도 유죄
연극계에 ‘희곡 훔치기’가 만연했다. 생각보다 심각하다. 하지만
더 심각한 건 희곡을 훔치고도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극단은 작가에게 아예 연락을 취하지 않거나, 연락하더라도
공연 직전에야 허락을 요청했다. 문제가 생기면 ‘같은 연극인끼리’ 라는 온정주의에 기댄다.
‘도둑 공연’의 만연에는 지역문화재단과 작가 단체의 구멍 뚫린 검증 절차와 견제 장치도 한몫했다. 먼저 지역문화재단은
작품 지원을 할 때 작가 동의서를 받지만 이는 강제 조항이 아니다. 극단이 ‘작가로부터 희곡 사용을 허락받았다’고 주장하면 그뿐, 작가가 실제로 동의했는지는 확인하지 않는다. 게다가 희곡작가협회에는 작가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시스템조차 없다. 이참에 극단들의 인식 전환과 함께 지역문화재단의 검증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1
지난 5월 대구의
한 극단이 오세혁
작가(사진2)의
희곡 <지상 최후의
농담>(사진1, 공상집단
뚱딴지, 2015)을
작가의 동의 없이
무대에 올리려다 작가측으로부터 공식적인
문제제기가 있었다.
2
오세혁 작가.
작가의 동의는 뒷전인 연극계 잘못된 관행
지난 2014년에는 제주도의 한 극단이 오세혁 작가의 <아빠들의 소꿉놀이>를 무단 도용해 공연하려다 논란이 불거져 공연을 취소했다.
“대본이 있어야 연극을 올리잖아요. 그러면 작가한테 동의를 받고 올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공연하는 게 말이 됩니까? 제가 화나는 것은 항상 맨 뒤로 밀리는 게 작가라는 거죠.”
지난 6월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오세혁 작가는 평소 그답지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앞서 5월 대구의 한 극단이 자신의
희곡 <지상 최후의 농담>을 자신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공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역문화재단의 지원금을 받은 공연임에도,
사전에 작가에게 알리지 않았고 당연히 작가료 협의도 없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저의 모든 작품의 저작권은 극단 걸판이 가지고 있으며, 저 또한 걸판의 동의 없이는 어떤 작품도 올리지 못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작가 동의 없는 공연’의 문제점을 공론화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것이 ‘돈 문제’로 비칠지
조심스러워했다.
“작가가 글을 썼으니 돈을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작가를 존중해 미리 연락하고 합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극단에서
당연히 작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관행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화가 납니다.”
오세혁 작가는 최근 막을 내린 <보도지침> 대본과 <헨리 4세-왕자와 폴스타프>의 각색을 맡는 등 대학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현재 극단 걸판을 이끌고 있으며
한국희곡작가협회 이사로 저작권 권익도 담당하고 있다. 안산에
기반을 둔 오 작가는 지역 극단의 열악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잘못된 관행’과 정면 대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에게 이런 황당한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제주도의 한 극단은 오 작가의 작품을 자기들 창작물인 것처럼 꾸며 공연하려다 들통나기도 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희곡 훔치기’가 전국적으로 만연했다는
점이다. 대구의 또 다른 극단은 지난 6월 임은정 작가의 희곡 <기막힌 동거> 공연을 준비하면서 개막 사흘 전에야 작가에게 연락해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 극단은 김규남 작가의 희곡 <용을 잡는 사람들>을 마찬가지로 작가 동의 없이 2016년 지역문화재단 지원사업에 신청해 지원받았다.
오 작가는 ‘희곡 훔치기’의 문
제점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작가 동의 없이 지원금을 받은 부분, 지원금을 받고도 2~3년 또는 3~4개월이 지나도록 작가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부분, 그리고 그럼에도
재단에서 극단에 지원금을 줬다는
부분. 우리는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사실 ‘희곡 훔치기’는 해묵은
골칫거리다. 고연옥 작가는 “예전에 제 동의 없이 연극이 올라간 적이 있어요. 한국희곡작가협회를
통해 극단에 작가 동의 절차를 거치도록 요구했습니다. 저작권법에는 작가 동의가 없으면 공연 중지를 요구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어려운 극단 사정을 봐주자는
입장이 많았습니다” 라고 연극계의 온정주의적 분위기를 전했다.
‘희곡 훔치기’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문제를 풀려면, 지원사업 선정 때 ‘작가 동의서’의 제출을 의무화하는 등 재발 방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지역문화재단의 한 관계자는 “현재 공연 단체로부터 지원사업을 신청받을 때 사업계획서에 작가료 지급 증빙서류를 요구하지만, 내지 않더라도
강제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고연옥 작가도 작가동의서 문제를 짚었다. 그는 “작가가 작가동의서를 직접 써주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극단이 그냥 작가의 동의를 받았다고 써내는 것뿐이죠. 지금 작가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시스템조차 없어요. 희곡작가협회에서 하다가 번거롭고 인력도 없어 지금은 전화를 못하고 있어요. 또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작가들도 있잖아요. 이강백 선생님처럼 교과서나 참고서에 희곡이 실리는 경우에는, 작가 자신이 저작권 관리를 합니다”라고 전했다.
결국 ‘희곡 훔치기’에 대한 문제는 제기됐지만,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을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먼저 연극인과 지역문화재단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연극인 최창우 씨는 SNS를 통해 “이제라도 지원사업 신청 시 작가 동의서를 필히 제출하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과 공연 횟수, 극장 객석 수를 고려한 객관성 있는 저작권료 책정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 글 손준현
- <한겨레>에서 연극, 클래식음악 등 문화 분야 전반에 관해 글을 쓰고 있으며, 연극의 공공성에 특히 관심이 많다.
- 사진 김창제, 공상집단 뚱단지 페이스북 (www.facebook. com/ddongs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