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예술이 미래를 여는 힘
언폴드엑스 2025 초청작품 프리뷰
글로벌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가장 ‘핫’한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즐거움, 기술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깨달음이 언폴드엑스를 관통한다.
기술이 예술의 변화를 불러올까, 예술이 기술의 발전을 자극할까? ‘기술에 영감을 주는 예술’을 지원하고자 기획된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 ‘언폴드엑스UnfoldX’가 12월 9일부터 21일까지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다. ‘언폴드엑스’의 이름으로는 4회째이자, 테크놀로지 아트라는 미래형 장르를 개척하기 위해 2010년 시작된 ‘다빈치 아이디어 공모’로 거슬러 올라가면 16년째 이어진 행사다.
아트디렉터로 한국인 손미미와 영국인 엘리엇 우즈로 구성된 미디어아트 그룹 김치앤칩스가 선정됐다. 2009년 결성된 김치앤칩스는 예술과 기술의 경계에서 작가이자 스토리텔러인 동시에 기획자로 유럽·아시아·북미를 아우르며 폭넓게 활동해왔다. 이들은 올해 언폴드엑스에 ‘Let Things Go: 관계들의 관계’라는 제목을 붙였다. ‘사회란 다양한 행위자들의 관계망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 아래 작가와 관객, 기술과 기관, 몸짓과 소리, 개념과 실천 등이 뒤섞이며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보여줄 전시와 공연을 모았다. 11개국에서 참가한 작가들의 최신작 26점 전시와 5팀의 퍼포먼스 공연 중에서도 특히 초청작 7점은 기술 융합예술의 경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누크 크라이토프, <전 지구의 언어>, 2018-21, 몰입형 설치, 8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4시간
유쾌한 시작이다. 옛 서울역의 100년 역사를 품은 1층 메인홀에 걸린 8개의 대형 디스플레이에서 서로 다른 ‘춤판’이 펼쳐진다. 몸짓의 언어인 ‘춤’은 통역이나 번역이 필요 없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쇼트폼 영상으로 언제 어디서든 스크롤 몇 번만으로 다채로운 춤을 만날 수 있다. 작가 아누크 크라이토프Anouk Kruithof는 52명의 국제 연구팀과 함께 2018년부터 세계 곳곳의 춤 양식을 조사하는 댄스 리서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작가는 유튜브·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서 수집한 196개국, 250시간 분량, 1천여 개 춤 스타일을 품은 8,800편 영상을 확보했다. 트월킹, 보그, 포트나이트 춤, 플래시몹, 수피 춤, 뮤지컬 체어 게임 등 다양한 몸짓에서 춤이 지닌 자기표현과 주체적 가능성을 발견했다. 네 시간 길이로 제작된 몰입형 설치 작업 <전 지구의 언어Universal Tongue>2018-21 영상을 보노라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 어느새 국적도 문화도 희미해진다. 동시에 고정되지 않고 계속 움직이며 뒤섞이는 지구의 유동성과 혼종성이 감지된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춤과 움직임이라는 몸의 언어가 어떻게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를 파고드는지를 알게 한다.
송예환, <(누구의) 월드 (얼마나) 와이드 웹>, 2024, 설치, 박스 종이 위 프로젝션 매핑, 가변 크기
소위 ‘박스 종이’라 불리는 마분지를 구조물처럼 쌓아 만든 키보드 형태의 무대는 송예환의 설치 작품 <(누구의) 월드 (얼마나) 와이드 웹>2024이다. 마분지라는 연약한 소재로 제작한 팝업 극장 형태의 공간, 프로젝션이 투사한 영상이 닿아 펼쳐지는 한국어 키보드 배열 등은 인터넷 공간의 불안정성과 임시성을 은유한다. 그 무대 위에서 ‘사용자’는 클릭·스크롤·타이핑 같은 동작으로 브라우저와 상호작용하는 온라인 퍼포먼스를 체험하게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웹 기반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작가는 사용자 친화적인 웹 환경이 초래하는 역설적 불편함을 마주했다. 그런 의문에서 출발해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 아래 가려진 허점을 드러내는 작품이 탄생했다. 이를테면 영어 기반의 인터넷 환경에 접속하기 위해서 한국의 우리는 반복적으로 ‘영문 전환’을 해야 한다. 인터넷 세상이 ‘월드 와이드 웹WWW’이라고 자랑했던 중립성, 개방성, 민주주의의 약속이 어느새 언어적·기술적 종속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꼬집은 작품이다. 그래서 제목이 월드와이드웹을 향해 묻는다. ‘누구의 월드이며, 얼마나 와이드 웹’인지를. 아르코미술관과 두산아트센터 그룹 전시를 거쳐 지난해 송은미술대상 본전시,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등에 참여한 작가는 해외 활동은 물론 국내에서도 이름을 각인시키는 중이다.
드리즈 더포르터, <플랑드르의 스크롤러>, 2021, 인터랙티브 설치, 서버 랙, 스크린, 서버, 4대의 라즈베리 파이, 197×60.4×100cm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방식으로 사회적 문제를 툭툭 건드리기로는 드리즈 더포르터Dries Depoorter도 탁월하다. <플랑드르의 스크롤러The Flemish Scrollers>2021는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 정부의 의회 생중계 영상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회의 중에 휴대전화를 몰래 사용하는 정치인, 즉 ‘주의가 다른 곳을 향한 순간’의 얼굴을 AI가 포착하면 자동으로 캡처해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해당 정치인을 태그하는 방식이다. 국회라는 공적 공간에서 태만하고 산만한 정치인의 부끄러운 민낯을 AI와 손잡은 예술이 실시간으로 폭로해버린다는 점에서 2021년 발표 당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의 민중을 향하던 ‘감시’가 시민에 의한 역방향 디지털 감시로 바뀌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했다. 심지어 이 작업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며, 의회 생중계가 없을 때는 기존 회의 영상을 보여준다고 한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배터리 5퍼센트 이하일 때만 실행되는 애플리케이션 <같이 죽자Die With Me>, 유명 장소에서 찍힌 공개 CCTV 영상을 수집하고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인플루언서의 사진을 찾아 정교하게 연출된 사진과 실제 상황을 나란히 보여주는 풍자적 작업 <더 폴로워The Follower>2023-25 등이 있다.
송호준, <압축하지마>, 2015-, 인터랙티브 설치, 다채널 비디오, 가변 크기
뼛속까지 공대생이건만 일찍이 예술가가 되겠노라 선언한 송호준 작가 또한 못 말리는 괴짜다. 그는 대량살상무기에 맞서 사랑과 평화의 말을 발사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2007, 아마존닷컴에서 구매한 우라늄 원석으로 만든 <방사능 보석>2010 등을 선보인 후 급기야 2013년 세계 최초로 ‘개인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하며 금지와 금기에 당당히 맞서는 작가가 2015년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시작한 ‘압축하지마’ 세계 대회는 동영상 압축 알고리즘에 의해 인간의 존재가 쉽게 압축 당하지 않도록 카메라 앞에서 최선을 다해 무작위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하는 퍼포먼스 참여형 작업이다.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내야 압축을 피할 수 있다. 참여자는 10초 동안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난리 부르스’를 핀다. 인간이 인공지능의 예측을 초월할 수 있을지를 실험하고 도전하는 작업인 셈이다. 고작 10초 만에 우리는 창의적이라 믿은 것들이 얼마나 뻔하고 반복적인지, 기발한 행위가 이미 누군가 언젠가 했던 과거의 경험에서 튀어나오는 무의식에 기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대회는 스위스 바젤, 인도 고아, 이탈리아 로마, 대한민국 서울을 거쳤고, 더 많은 도시로 이어질 예정이다.
오블릭 사운드워크(차크람 응), <더 클럽>, 2024, 사운드 설치, 혼합 재료, 100×280×280cm
한 번에 4명까지 핀볼게임을 즐길 수 있는 흥겨운 게임장 <더 클럽The Club>2024은 컬렉티브 예술가 오블릭 사운드워크Oblik Soundwork의 작품이다. 공과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해 홍콩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악기 발명가 겸 사운드 아티스트인 차크람 응Chaklam Ng이 결성했다. 응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전에 새로운 악기가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악기의 오류나 예측 불가능성이 창작의 원천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관람객이 핀볼게임을 시작하면 공이 범퍼와 각종 장치에 충돌하며 리듬을 생성한다. 핀볼의 운동데이터가 장치 안에서 혼합돼 그때그때 다른 구조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참여자는 게임을 넘어 핀볼을 연주 도구 삼아 실시간으로 음악을 생성하는 DJ가 되는 셈이다. 우연과 예측 불가능이 만들어내는 음악적 긴장이 ‘더 클럽’을 꽉 채우기에 작품은 놀이와 사운드 실험이 동시에 일어나는 공동 연구실이 된다.
바삼 이싸 알사바, <바깥은 혼자 돌아다니기에 위험하단다>, 더블린 더글러스 하이드 갤러리 2023년 설치 전경, 사진 Louis Haugh
관객을 판타지 게임 같은 꿈속 풍경으로 데려다 놓는 몰입형 설치 작업은 바삼 이싸 알사바Bassam Issa Al-Sabah의 <바깥은 혼자 돌아다니기에 위험하단다It’s Dangerous to Go Alone! Take This>2022. 제목은 고전 게임 <젤다의 전설>의 유명한 대사를 인용했다. 가상의 비디오게임 속을 떠도는 주인공을 통해 전통적 남성성의 영웅서사를 전복하는 30분 길이 CGI 필름 작품이다. 주인공은 근육질의 전형적 영웅상에 머무르지 않고 장면마다 몸의 형태, 성별 등이 계속 바뀐다. 피부가 유리처럼 투명하다가도 점액질로 번들거리고 녹아내린 몸이 꽃·곤충과 뒤섞이는 등 판타지, 에로티시즘과 보디 호러가 자유자재로 결합해 매혹적이면서도 섬뜩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영상 속 신체의 일부와 사물이 3D 렌더링 조각으로 전시장 곳곳에 놓여 가상과 현실이 맞닿은 듯 충격은 배가 된다. 게임을 차용한 작품을 넘어 게임과 영상이 어떻게 몸·젠더·영웅·진보 등을 규정했는지 드러내고 체험하게 하는 작품이다.
스카웨나디, <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4, 3채널 머시니마 뮤직 비디오, 가변 크기, 후원 주한퀘백정부대표부, AbTeC, 협력 일렉트라
스카웨나디Skawennati의 3채널 뮤직비디오 <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Garden>2024 또한 한번 보기 시작하면 좀체 빠져나오기 힘든 작품이다. 그리스신화의 세 여신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속 세 주인공은 북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에서 ‘세 자매’라 부르는 기본 작품 옥수수·콩·호박을 의인화한 존재다. 이들 세 자매가 시대를 넘어 슈퍼히어로로 재탄생하는 줄거리인데, 인류의 시대 구분을 접촉 이전, 식민화, 유전자 변형, 가까운 미래로 나눠 세 자매가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과정이 기발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전쟁, 식민화, 기업 수탈, 농약 사용 등 수많은 위협을 무찌르는 과정이 통쾌하다. 작가는 캐나다 원주민 모호크 출신으로, 사이버 원주민 영토 프로젝트AbTeC의 공동 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가상 환경에서 영상을 촬영·제작하는 머시니마machinima 기법이 탁월하게 적용돼 보는 맛도 쏠쏠하다.
글로벌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가장 ‘핫’한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즐거움, 기술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깨달음이 언폴드엑스 2025를 관통한다. 그 안에서 오늘의 예술이 미래를 여는 힘을 발견할 수 있다.
글 조상인 백상미술정책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