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을 향한 관계들의 실험
미리 만나는 한중일 교류 프로그램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이 교류하고 협업하는 이번 프로그램은 예술가로 하여금 서로 다른 언어를 매개로 교차하는 가운데,
아시아가 지닌 고유한 감수성과 미래를 향한 비전을 보여준다.
서울문화재단이 매년 선보이는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 ‘언폴드엑스Unfold X’는 신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새로운 창작 가능성을 탐색하며 미래 예술의 방향을 제시하는 플랫폼이다. 올해는 ‘Let Things Go: 관계들의 관계”를 주제로 12월 9일부터 21일까지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다. 예술과 기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세계의 조각을 엮어내는 13일간의 축제다.
특히 2025~2026 한·중·일 ‘3국 문화교류의 해’를 맞아 한국 서울문화재단, 중국 중앙미술학원Central Academy of Fine Arts, 일본 도쿄도역사문화재단Tokyo Metropolitan Foundation for History and Culture 세 기관이 협력해 그 의미를 더한다. 서울·베이징·도쿄 동아시아 세 수도가 함께하는 이번 축제는 한·중·일 문화 교류의 흐름을 확장하며, 각 도시가 지닌 첨단 기술력과 창작 역량을 결합해 지리·도시 차원의 문화가 교차하는 새로운 예술 생태계를 구성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삼국은 오랜 시간 교류와 갈등의 역사를 거치며 서로의 문화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근현대에 이르러 교류가 일시적으로 단절되거나 왜곡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 냉전의 종식과 경제 성장에 힘입어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며 문화 교류가 활발해졌다. 이후 2000년대에는 국제 비엔날레와 기획전을 통해 삼국 예술가들의 교류가 확산됐다. 이러한 문화 교류는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미래로 향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21세기는 기술·정보·과학의 시대로, 기존의 분류 체계와 위계가 해체되는 흐름 속에서 서구 중심의 이원론적 인식이 재고되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 가상과 실재, 유기체와 비유기체, 젠더의 구분과 경계가 모호해지는 다형적 체계 속에서 ‘동아시아성’은, 지역주의의 틀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성으로 재해석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융복합 예술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장이 된다.
올해 언폴드엑스의 한·중·일 교류 프로그램은 전시·워크숍·공연·발표 등 다층적으로 구성된다. 전시 부문에서는 한국의 룹앤테일Loopntale, 일본의 사이드 코어SIDE CORE, 중국의 치우 위Qiu Yu가 각각 게임, 스트리트 문화, 기술 매체를 통해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룹앤테일의 <피드Feed>2025는 도심 경계 공간에 존재하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보이지 않는 리듬을 감각하는 비디오게임이다. 아파트 단지와 고가도로로 둘러싸인 하천가에서 밤이 되면 낮 동안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드나들고, 플레이어는 이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다중의 시점으로 재구성된 장소의 기록을 마주한다. 제목의 ‘feed’는 ‘먹이다’라는 동사이자 데이터를 갱신하는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무너진 전광판에 흩어진 장면들은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생성하는 피드feed로, 시뮬레이션 속 보이지 않는 연결망을 드러낸다. 인간의 개입이 사라진 자리에서 또 다른 존재들의 리듬이 조용히 이어지며 세계를 갱신한다.
사이드 코어의 <도시 걷기: 지하 ver.rode work ver. under city>2023- 는 <rode work>2017- 시리즈의 연장선에 놓인 신작으로, 접근이 어려운 지하 조정지와 폐역 등에서 촬영한 스케이터들의 활주를 통해 ‘도시의 지하 공간’을 탐구한다. 서로 다른 장소의 영상을 연결해 가상의 지하 도시를 구성하며, 지질학·방재·도시론 등 다양한 관점을 교차해 도쿄의 지층을 드러낸다. 이번 작품에는 스케이터 모리타 다카히로가 퍼포머이자 디렉터로 참여했다. 스케이트보드를 매개로 도시와 인간의 관계를 재해석하며, 변화하는 지하 공간의 미지성과 상상력을 환기한다.
치우 위의 <덜걱거리는 뼈Rattling in the Bones>2024는 기계적 운동 구조와 자연적 요소를 결합해 인간·기계·자연의 관계를 탐구하는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3D 프린트 재료와 금속·광물을 조합해 생명 리듬을 지닌 듯한 유기적 구조를 구축하며, 차가운 기계와 원초적 물질의 마찰을 통해 생명의 기원과 그 미래를 은유한다. 관객은 기계의 리듬과 자연의 맥박이 교차하는 감각을 경험하며, 기술과 자연의 새로운 균형과 공생 가능성을 사유하게 된다.
전시 외에도 다양한 한·중·일 교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12월 10일 룹앤테일은 전시에 이어 ‘모듈 창작 워크숍’을 진행한다. 게임 플레이를 통해 이야기의 조각을 조합해 도시 괴담을 생성하는 집단 창작 실험으로, 억압과 망각된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며 기억과 상상이 교차하는 잠재적 아카이브를 형성한다. 같은 날 오후에는 중국 중앙미술학원 예술과 기술Art+Technology 분과 교수인 페이 준Fei Jun의 강연 ‘하이브리드 인텔리전스: 뉴미디어아트 맥락 속 인간과 기계의 협업’이 열린다. 그는 인공지능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다중의 의도성을 지닌 결합체로 보고, 인간과 기계의 협력으로 형성되는 하이브리드 지성이 예술의 주체성과 창작 패러다임을 어떻게 확장하는지 논의한다.
12일 열리는 ‘언폴드엑스 이브닝’에서는 일본 작곡가이자 다중 악기 연주자인 고시로 히노Koshiro Hino가 이끄는 실험음악 그룹 고트goat의 공연이 열린다. 곡마다 악기 구성을 달리하며, 전통 음계를 벗어나 노이즈와 악기의 원초적 질감에 집중한다. 강박적인 리듬의 반복과 몽환적인 긴장, 비선형적 하모닉스를 통해 도시적이면서도 원시적인 감수성을 탐구한다. 이들 작가는 서로 다른 매체와 언어를 사용하지만, 전시의 핵심 주제인 ‘관계들의 관계’를 통해 느슨하게 연결돼 관람객이 각기 다른 기술적 서사를 체험하도록 이끈다.
삼국이 함께한 이번 교류 프로그램은 축제 플랫폼 안에서 기술과 예술의 접점을 통해 서로의 창작 언어를 번역하고 관계의 확장을 시도한다. 세 도시의 예술가들은 서로 다른 언어·문화·기술 기반을 매개로 교류하며, 동아시아가 지닌 고유한 감수성과 미래 지향적 비전을 보여준다.
이 교류는 단순한 문화적 만남을 넘어 예술과 기술이 결합해 ‘관계’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실험이자, 동아시아의 역사적 기억과 사회적 맥락을 바탕으로 기술과 예술이 제기하는 새로운 질문—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감각의 전환, 창작의 주체성—을 함께 사유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이번 기획은 동아시아 예술의 잠재력을 재확인시키며, 지역 간 연대가 기술적 실험과 결합해 열어가는 새로운 창작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단발적인 협력 사업이 아니라 예술가와 기관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창작 생태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다. ‘관계들의 관계’라는 주제처럼, 이번 교류는 서로의 차이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예술적 실천이며, 국가 간 협력을 넘어 예술이 사회적 상상력을 재조직하는 동력으로 작동할 것이다.
글 박소현 독립 큐레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