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예술가와 나눈 배우인생의 전환점에 관하여
현업 연극인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은 예술가의 작업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지난 3년간 플레이업 아카데미에 참여한 세 연극인 권귀빈·김선유·이선에게 물었다.프로 예술가들에게도 재교육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3~4년 정도 지난 시점에 유독 소모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 고민하다 플레이업 아카데미를 만나게 됐다. 예전에는 정확한 의도나 목적을 모르고
그냥 어디에 좋다고들 하니까 수업을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성장과 발전에 대한 갈증이 생긴 뒤 수업을 접하니, 관점과 시야가 달라지면서 과거에 터부시한 것들이 소중해졌다.
김선유
배우가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활동했는데, 내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이 예상보다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고 싶어도 대구에서는 한계가 있고…. 처음엔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났다. 뜻밖의 장소와 프로그램에서 그동안 내가 느꼈던 것을 이해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면서 프로그램의 내용 외에도 인연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권귀빈
코로나19로 공연계가 위축되면서 창작 활동 방향에 대한 고민이 많이 됐다. 개인적인 변화도 있었는데, 그때 김신록 배우의 소셜미디어에서 ‘플레이업 아카데미’를 알게 됐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배우들”이라는 설명이 당시의 나에게도 적용된다 싶어 신청했다. 올해로 활동한 지 20년이 됐다. 경력이 오래되다보니 교육이 필요해도 받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 플레이업 아카데미에 참여하면서
대학 1학년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시 해 볼 수 있다는 느낌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 미안한 감정은 어디서부터 온 걸까.
권귀빈 2010년 명동예술극장에서 배우 재교육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나도 대학 졸업 후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소모되는 느낌에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느낀 성취감이 있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기억하고 있어서, 오히려 후배들이나 이런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한 친구들이 참여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움직임과 발성, 극작과 연출 등 여러 프로그램 중에서도 ‘신경심리학’ 수업이 독특하다. 연기를 감각의 영역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과학 이론과 접목한 프로그램이 흥미로운 지점은 무엇이었나.
김선유
공연이 끝나면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그런 나를 게으르다거나 이러면 안 된다고 다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그런 행동이 신경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거라는 이야기가 참 위로됐다. 장재키 선생님
수업으로 나도 모르게 생긴 행동에 대한 의문이 많이 해결됐다.
권귀빈
많은 데이터를 분석해 그 인물이 되어가는 게 연기다. 이런 생각을 뇌 12신경이라는 과학적 기준으로 정리·활용한 것이 ‘신경심리학’이었다. 12개의 신경으로 분리된 신체가 나이대나 감정·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하는 것. 수업 마지막에 짧은 발표를 한 게 기억난다. ‘갈매기’의 마샤를 좋아해서 오디션에서도 마샤의 장면을 자주 연기했다. 뇌 12신경을 이용해 몸을 전부 분리하고 대사를 분석해 접근해보니 마샤라는 사람이
달리 보이더라. 새롭고 좋은 시도였다.
이선
특별 수업으로 짧게 경험했지만, 감각으로 하던 연기에 과학적 접근이 더해지며 내 연기와 행동에 근거가 생겼다. 20대 초반의 역할을 맡았다고 했을 때, 실제 나의 경험을 떠올리며 연기하는 것과 그때 나올 수 있는
행동 특성, 신경 발달에 대한 이해가 있는 상태에서 하는 연기는 아주 다르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재현하는 건 오히려 오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스스로의 명확성을 확립해주는 과정이랄까. 나중에 꼭 정규 수업을 듣고
싶다.
이선의 경우 버바텀 시어터, 판소리 마스터클래스, 타이트와이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수업 간 공통점이 적어 보이기도 하는데, 무엇이 선택 기준이었나.
이선 연기로 시작했지만, 극작과 연출에도 욕심이 있다. 다양한 장르에 관심이 많아서 거리예술이나 무브먼트 공연을 하기도 했다. 플레이업 아카데미 중 희소성 있는 프로그램은 거의 다 신청했다. 언제 또 들을 수 있겠나 싶어서.(웃음) 워낙 몸치라서 학생 때부터 모든 움직임 수업을 들어왔다. 재즈댄스·치어리딩·한국무용·발레·댄스스포츠·탭댄스·현대무용·힙합·뉴잭스윙까지. 움직임 개발에 강박 아닌 강박이 있다. 줄타기(타이트와이어)도 그렇게 접근했는데, 지금도 꾸준히 줄을 타고 있다. 줄타기는 움직이면서 하는 명상 같다. 시선을 둬야 할 지점이 명확하게 있지만 주변 시야를 넓게 봐야 하고, 발바닥의 감각도 예민하게 작동시켜야 한다. 집중력, 밸런스, 코어, 마음 다스리기 등 배우 훈련과도 연결되는 게 많다. 나는 정서적 연기술보다는 과학적으로 소리내는 법, 몸을 운용하는 방식 등을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노동자의 몸을 관찰해 정리한 루돌프 폰 라반의 워크숍도 궁금하다.
프랑스 거리극 단체 크타 컴퍼니Ktha Company의 프로그램에는 세 사람 모두 참여했다. 어떤 경험으로 기억되나.
김선유
어느 시점부터 객석에 앉아 있으면 졸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극장 밖 예술이 궁금해졌고, 그 과정에서 크타를 만났다. 거리에서의 연기술 같은 걸 배울 줄 알았는데, 상상하지도 못한 것들을 했다. 예전에는 무대에서
뭔가를 해내야 하고 관객에게 메시지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 대사와 움직임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가득했다. 그런데 크타 프로그램을 통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등장만으로도, 내 존재만으로도 이야기나 에너지를
나눌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그 후로 연기가 좀 편해졌다.
권귀빈
개인적으로 좀 충격이었다. 연극의 본질을 다시 탐구하는 시간이었다랄까. 관객과의 소통, 있는 그대로의 존재 인식, 에너지 같은 말을 오래도록 들어왔지만, 보이지도 않는 에너지를 어떻게 하느냐는 의문이 있었다. 크타의
훈련은 몇 가지 법칙 안에서 하나를 반복해 진행하고, 횟수를 거듭하며 하나씩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그 시간이 쌓이니 처음 만나는 관객과도 이상하게 소통이 됐다. 배우로든, 사람으로든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라
생각하는데, ‘그동안 나는 어떻게 소통해왔지?’ 싶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이야기도 내가 듣고 내 이야기도 관객이 들으면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중요했다. 이 작업을 통해
공연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겠다는 걸 알게 됐다.
이선
거리공연 경험이 있지만, ‘거리에서 연극을 한다’는 개념이지 ‘거리와 함께한다’라는 감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떤 공간이나 범주에 갇히지 않고 불특정 다수의 관객과 좀 더 가까이 만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신청했다.
그런데 ‘관객’보다는 ‘거리’를 만난다는 개념이 더 들어오더라. 니콜라 Nicolas Vercken 연출이 공연하는 동안 ‘지나가는 모두가 나에게 힘을 준다고 생각하라’, ‘싸우려 들지 말라’고 했다. 연결성에
집중하게 되니, 평소에도 만끽하던 것들의 개념이 내가 가진 인식의 범위에서 확장돼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예전에 거리에서 소외되거나 환영받지 못한다는 감각이 있었다면, 프로그램을 경험한
후에는 편해지고, 거리를 사랑하게 됐다.
플레이업 아카데미를 통해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권귀빈
플레이업에서 크타를 만난 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크타 컴퍼니와의 모든 경험이 내가 가진 틀을 하나씩 깨줬다.
교육자로서도 관심이 많아서 이걸 전파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선
연기를 선택한 게 내 인생에서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기를 접하지 않았다면 나와 내 몸, 주변 환경을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들여다보지 않았을 거다. 다양한 관심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를 가두는 고리도
많다. 연기를 하며 그 사슬로부터 점차 해방됨을 느낀다. 결국 전체는 하나고 하나는 전체이며,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구나 싶다. 허황된 말 같지만 플레이업 아카데미에서 실제로 와닿는 경험을 했다. 길지 않은 내
기억력이 제일 아쉽다.
김선유
나 자체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크고 작은 강박 속에 살았지만 그런 줄도 몰랐다는 걸 플레이업 아카데미에서 알게 됐다. 김혜리 선생님이 음성이 변하려면 신체가 변해야 하고 신체가 변하려면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게 될까? 싶었지만 실제로 되게 만들어주는 매커니즘을 알게 됐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것을 통해 숨을 조절하고 그러다보면 신체가 이완되고 그것이 좋은 음성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에서
많은 치유를 받았다.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삶을 더 사랑하게 됐다. 수업을 신청할 때는 이렇게까지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줄 몰랐다.
글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 |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