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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4월호

살아 있는 노들섬, 그 공존의 의미

새로이 만들어질 노들섬에 남아 있는 자연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노들섬의 욕망은 아직 완성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바로 문화다. 그것은 살아 있음이다.

도시는 문화를 상징한다. 문화는 한편으로 자연을 자양분 삼고, 한편으로는 자연과 대립하며 성장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연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심상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근원이 되며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 대지로서의 자연이다. 에덴동산, 파라다이스, 무릉도원, 서천꽃밭… 모든 문명에서 자연은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또 다른 하나는 홍수와 산불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하며 변덕스러운 무자비한 신으로서의 자연이다. 모두를 삼키는 홍수와 가뭄, 마녀와 도깨비의 숲, 호랑이와 늑대가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산, 모든 문명에서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원천이기도 했다. 극락정토와 아르카디아의 자연이나 불가항력적 재앙으로서 자연, 모두 인간의 타자를 의미한다. 인간이 과학과 기술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게 되고, 자연의 힘을 통제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됐을 때 인간은 자연을 상실한다. 자연은 문화의 잃어버린 빈자리, 욕망의 텅 빈 중심으로서의 타자다.

그런 자연과 문화의 경계에서 노들섬은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욕망의 빈자리였다. 노들섬은 원래 섬이 아니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의 영역이 되었다가 물이 빠지면 너른 백사장이 드러나 땅이 되는, 규정되지 않은 자연의 영역이었다. 1917년 일제가 인도교를 놓으며 석축을 쌓고 언덕을 만들면서 지금의 노들섬이 만들어졌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던 이 땅에 고정된 문화의 영역이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언덕은 여전히 자연의 일부였고, 사람들은 너른 백사장에서 피서를 즐기고 물이 얼면 썰매를 탔다. 1968년 한강개발계획이 착수되자 한강은 거대한 인공의 호수가 됐다. 한강의 경계는 단단한 콘크리트로 정비되고 고속도로가 만들어졌다. 한강은 온전히 도시의 일부가 됐다. 넓은 백사장의 모래는 개발을 위한 부지와 도로를 만드는 데 사용됐고, 석축을 쌓은 언덕 주변의 땅은 섬이 됐다. 1969년 한 기업이 유원지를 짓기 위해 섬을 사들이고 매립해 섬은 커졌다. 하지만 서울 최고의 관광지를 만들겠다는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노들섬은 다시 모래가 쌓이고 새들이 찾아오는 자연이 됐다.

2005년 서울시가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하면서 노들섬은 비로소 문화의 영역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계획은 무산되고 노들섬은 자연으로 남는다. 2019년 복합 문화기지가 만들어져 노들섬이 다시 문화 영역으로 편입되자 자연은 문화에 그 자리를 내줘야 했다. 섬의 동편은 그동안 자라난 숲을 그대로 남기기로 했고, 서편은 문화시설로 바꾸기로 했다. 서편에 살던 맹꽁이들은 동편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렇게 한편은 문화가 자리잡고, 한편에는 자연이 그대로 남은 노들섬의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시 2023년, 노들섬에 서울 최고의 랜드마크를 만들어 문화의 영역으로 통합하려는 공모전이 개최됐고 영국의 저명한 아티스트 토머스 헤더윅의 ‘소리풍경Soundscape’이 당선안으로 선정됐다.

자크 라캉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 문화적 활동의 원동력은 욕망이며, 욕망의 실체는 알고 보면 비어 있는 주체의 빈자리, 일종의 공동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욕망은 채워질 수 없다. 만약 욕망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도시는, 예술은, 문화는 어느 지점에 완성돼 더 이상의 발전도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존재하지 않던 노들섬의 자리에 교각을 위한 석축이 지어지자 이는 비어 있는 욕망의 빈자리를 만들어냈고, 노들섬은 끊임없이 확장됐다. 노들섬을 향한 욕망이 커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욕망을 담을 빈자리도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공동의 크기는 물리적 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백사장, 유원지, 관광단지, 오페라하우스, 복합 문화시설, 랜드마크… 노들섬에 투영된 모든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수십 개의 노들섬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문화적 욕망을 채우기도 벅찬 이곳에 여전히 맹꽁이의 숲은 남아 있다. 헤더윅의 당선작에도 맹꽁이 숲은 그 자리에 있다. ‘소리풍경’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랜드마크는 기존 지상을 차지하지 않고 공중에 떠 있기 때문에 기존의 건물도, 숲도 그대로 남는다. 아예 기존의 숲을 파헤치고 거대한 문화적 랜드마크와 인공의 자연을 제시한 안도 있었지만, 다행히 땅보다는 공중에 더 관심이 많은 ‘소리풍경’이 선정되면서 맹꽁이와 나무들은 원래의 자리에 머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자. 우리는 늘 자연과 문화의 공존을 말하지만 이는 일종의 수사일 뿐, 애초부터 자연과 문화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이다. 자연과 문화는 서로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문화의 공존은 사실 자연을 길들여 온전히 문화의 영역으로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도 도덕도 없이 가공할 힘으로 무자비하게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동시에 보듬어주기도 하는 신적인 자연을 살해해야 우리는 자연과 공존할 수 있다. 새로운 노들섬을 만들기 위한 공모전에서 동측 숲은 문화와 동등한 타자의 자연이 아니라 언제든 소거돼도 상관없는, 문화를 위한 백지상태의 빈자리였다. 자유롭게 섬을 활용하라는 공모 지침은 실제로는 그 공간에 자연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 온전한 문화의 상징을 세우라는 신탁이었다. 당연히 어떠한 심사위원의 평을 봐도 기존의 숲이나 맹꽁이의 보금자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래서 노들섬의 자연은 잃어버리면 안타깝고 하루이틀 생각이 나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애써 잃어버린 자리로 돌아가 찾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그저 그런 귀고리였다. 흥미롭게도 노들섬을 위한 그 어떠한 안도 자연을 존중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안은 자연을 문화의 형태로 해석해 상징으로써 존경을 표했다. 풍경, 물결, 구름, 군도, 물, 백로. 저마다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가 똑같이 온전히 문화의 영역으로 종속시킨 인공의 자연이 나무, 물, 맹꽁이의 숲을 압도해 내려다보는 랜드마크의 거석을 모범 답안처럼 제시했다.

오해는 하지 말자. 노들섬에 남아 있는 자연이, 맹꽁이 숲이 소중하니 잘 지켜야 한다는 진부한 생태적 윤리의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노들섬은 그런 장소가 아니다. 그렇다면 새로이 만들어질 노들섬에 남아 있는 자연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노들섬의 욕망은 아직 완성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바로 문화다. 그것은 살아 있음이다. 모든 결여가 채워져 욕망이 완성되는 경우는 오로지 타나토스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 충동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욕구다. 생각해보면 노들섬이 자연으로 남았던 시간은 우리에게 잊힌 시간이었다. 반면 노들섬이 살아 있던 순간은 무엇인가를 욕망하던 순간이었다. 문화의 영역에 속한 시간이었다. 역설적으로 온전히 문화의 영역으로 자연을 편입시킨 이 순간, 그 자연은 욕망의 빈자리가 된다. 그 빈자리로 인해 다시 문화적 욕망은 노들섬에 투영될 것이다. 그 어떤 위대한 백색의 신전이 노들섬을 차지하더라도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연이 존재하는 한 그 자리는 거대한 공동이 돼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과거의 신전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화의 신을 세우려는 욕망은 노들섬을 통해 생의 충동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살아 펄떡이게 할 것이다. 그것이 노들섬이라는 문화의 상징에 존재하는 자연의 의미다.


김영민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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