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으로 물드는 예술섬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환상적인 움직임이 어둠을
수놓는 노들섬. 분홍빛 토슈즈와
함께하는 가을밤의 낭만이
시작된다.
오로라 공주가 자신의 16번째 생일 파티에서 네 명의 왕자와 추는 ‘로즈 아다지오’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서울문화재단은 한강 노들섬을 연중 공연이 열리는 ‘예술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2022년 시작된 야외 클래식 공연예술축제 ‘한강노들섬클래식’도 프로그램은 물론, 관람 환경과 예약 시스템 등을 개선하며 완성도 높은 축제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10월 12일과 13일 공연되는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서울문화재단과 민간 발레단 연합이 공동 제작하는 공연이다. 최근 한국의 발레 수준이 높아진 만큼 민간 발레단의 활동도 활발한데, 특히 지난 10여 년간 발레STP협동조합을 결성해 예술단체의 자생력을 키우고 저변 확대를 도모해온 이들은 합동 공연뿐 아니라 발레 축제를 개최하고 무용수를 발굴하며 관객을 개발하는 등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공연은 발레STP협동조합의 대표적인 세 단체가 협력해 선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유니버설발레단·와이즈발레단·서울발레시어터의 무용수 70여 명이 한 무대에 오르고, 주역인 오로라 공주는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홍향기와 솔리스트 이유림, 데지레 왕자는 수석무용수 이동탁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각각 맡았다.
악역 카라보스는 여성이 아닌 남성 무용수가 연기해 선한 여섯 요정과의 대비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서는 1984년 중앙일보사 주최 비엔나국립발레단Wiener Staatsballett 초청공연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는데,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가 당시 46세 노장으로 데지레 왕자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제대로 된 전막이 소개됐다. 국내 발레단으로는 1994년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 10주년 기념작으로 마린스키 발레의 원형을 따른 작품을 공연한 후 올해까지 서너 차례 재공연했고, 국립발레단도 2004년 공연 이후 12년 만인 2016년에야 공연하는 등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에 비해 자주 보기 힘든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 이유는 3시간 가까이 되는 작품 길이가 클래식 발레 가운데서도 비교적 긴 편이며, 춤의 난도나 무용수 규모, 무대 제작 등에서 웬만한 발레단 역량으로는 어려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흔히 볼 수 없는 발레 작품이기에 반갑기도 하지만 야외무대에서 전막을 공연한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높은 공연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야외무대를 고려해 원형의 안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일부 축소해 중간휴식 없이 1시간 35분간 공연하는데, 3막 4장의 구성은 유지하되 줄거리 밖의 장식적 춤 두 부분(1막 왈츠 군무와 2막 꿈속에 등장하는 오로라 솔로)을 삭제해 극 전개에 속도감을 높였다. 다소 보수적인 러시아 발레단의 경우 원작의 속도 그대로 연주하는 것과 달리, 미국을 비롯한 일부 발레단은 동시대 관객의 성향을 고려해 빠른 연주로 공연 시간을 단축하는 추세다. 야외에서 쉬는 시간 없이 관람하는 환경은 물론이고 쇼츠와 릴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서울 시민의 속도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축약은 적절한 각색이라 할 수 있겠다.
동화에서 차용한 ‘빨간 두건 소녀와 늑대’의 춤
카라보스의 저주가 깃든 바늘에 찔려 쓰러진 오로라 공주
1막에선 오로라 공주가 16번째 생일 파티에서 네 명의 왕자와 추는 ‘로즈 아다지오’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흔들림 없이 왕자들과 교대로 손을 맞잡는 오로라 공주의 고난도 동작이 관전 요소라 할 수 있다. 1막은 노파로 변장한 카라보스에게 장미 꽃다발을 받은 오로라 공주가 꽃다발에 숨겨진 물레 바늘에 찔려 쓰러지는 것으로 끝난다.
2막은 데지레 왕자가 꿈속에서 라일락 요정의 도움으로 오로라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사냥길에 플로레스탄 왕국을 발견해 1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오로라 공주를 깨우는 내용이다.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눈에 띄는 각색은 라일락 요정의 존재감인데, 악역 카라보스의 역할만큼 그에 맞서는 라일락 요정의 비중을 크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짧은 키스 장면을 제외하면 2막 대부분이 꿈속 장면으로 줄거리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이 장면이 없다면 공주에 대한 키스와 청혼이 설명될 수 없기에 직접 각색에 참여한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의 안무 의도가 담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앙증맞은 안무가 돋보이는 고양이 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3막 결혼식이다. ‘파랑새와 플로리나 공주’, ‘장화 신은 고양이와 앙증맞은 흰 고양이’, ‘빨간 두건 소녀와 늑대’가 보여주는 동화 속 캐릭터도 큰 볼거리지만, 오로라 공주와 데지레 왕자의 그랑 파드되는 따로 떼어 공연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안무를 보여준다. 기교 면에서는 파랑새의 춤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데지레 왕자와 오로라 공주의 솔로 바리아시옹에 이은 경쾌한 파드되 코다에서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축하객이 한데 어울려 마주르카를 추고 라일락 요정이 이들을 축복하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잠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동화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 분홍빛 토슈즈와 함께하는 가을밤의 낭만을 위해 10월 어느 주말, 노들섬에 들러보면 어떨까.
글 김예림 무용평론가
사진 제공 유니버설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