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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11월호

전자 초고속도로를 달리는 짧은 여행*

백남준을 (통해) 다시 읽다

백남준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의 작가로 선정됐다.

백남준, <시스틴 채플>, 1993, 비디오 설치,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프로젝터 40여 대, 비디오 프로세서 2대), 비계구조물, 가변 크기, 울산시립미술관 소장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ßmann이 커미셔너를 맡아 진행된 이 전시는 독일이 통일된 후 처음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였다. 각 나라의 국가관이 자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내세워 전시하는 이 예술 올림픽에 독일 정부는 동독 작가와 서독 작가 한 명씩을 선택해 통일 독일의 모습을 선보이고자 했다. 클라우스 부스만은 상투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반론으로 독일의 동쪽 끝(한국) 작가 백남준과 독일의 서쪽 끝(미국)의 작가 한스 하케Hans Haacke를 선정한다. 정부의 반대를 예상한 클라우스 부스만은 언론에 선제적으로 작가 리스트를 발표해 이를 기정사실화한다.** 독일의 미술사학자이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독일관 전시를 만들었던 플로리안 마츠너Florian Matzner에 따르면 베니스 비엔날레는 국가를 초월해 예술가의 만남을 성사한 독일관의 작가 선정을 전체 비엔날레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모토는 ‘예술의 네 개의 방위, 서양과 동양, 남과 북, 혹은 현대적 유목민으로서의 예술가“The Four Cardinal Points of Art: East and West, North and South,” or “The Artist as Modern Nomad”’**였다.
백남준의 전시 제목은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The Electronic Superhighway?From Venice to Ulan Bator》였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은 독일관의 백남준과 한스 하케가 받았다.
동구 공산권의 붕괴, 냉전의 종식, 통일 독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아 시대의 상징으로 지목받은 이 전시에서 백남준은 유목민 예술가로서의 역사 인식, 그리고 미래의 미디어 스케이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드러냈다. 독일관 중앙홀 양옆 공간과 전시관 외부 정원에서 전시한 백남준은 각 공간을 동양과 서양, 정원을 고비사막으로 설정했다. 내부 공간에서 백남준은 그 유명한 텔레비전 메가트론 설치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와 영상 설치 작업 <시스틴 채플>을 놓고, 정원에는 고비사막을 지배한 여러 침략자와 거기에 더해 역사의 개척자와 지배자들을 형상화한 로봇을 전시했다.
플로리안 마츠너: 그들은 ‘마르코 폴로’, ‘칭기즈 칸’, ‘아틸라’, ‘크리미안 타타르’, ‘단군’, ‘캐서린 여제’, ‘알렉산더 대왕’이죠. 이들은 도상학적으로 교통, 이동, 소통의 종류나 수단을 의미하는데, 작품 제목은 권력, 지배, 통치, 탐험, 재정복 등을 암시합니다.
백남준: 그런 이유로 우리는 두 종류의 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 실업에 대처하고 에너지나 전력의 과소비 없는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한 정책으로 전자 고속도로를 제안한 것입니다. 이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의지한 경제 발전을 의미합니다. 소프트웨어는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저는 전자 고속도로를 주장했고, 클린턴이 이를 그대로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1992년 클린턴의 연설문을 읽으며 저의 1974년 보고서***를 생각합니다.
플로리안 마츠너: 그래서 선생께서는 20세기 막바지에 세계를 위성으로 연결하는 전자 고속도로를 700년 전 마르코 폴로나 500년 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역사적 고속도로historical highway와 대체하신 것이군요.****
베니스 비엔날레라는 국가주의를 표방한 예술 올림픽에서 백남준은 전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20세기 말미에 700년 전의 역사적 고속도로를 대체하는 전자 고속도로의 미디어 스케이프를 상상했다. 예술가의 평생에 걸친 전 지구적 소통으로 이뤄낼 세계 평화에 대한 예술적 이상이 마르코 폴로가 항해를 시작한 베니스에서 구현된 것이다.
백남준이 기획하고 작품으로 표현한 전자 고속도로의 미래는 현재가 됐다.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 언폴드엑스 2023에 전시될 <시스틴 채플>1993과 <칭기즈 칸의 복권>1993은 이 역사적인 전시를 구성했던 주요 작품들이다. 고비사막으로 설정한 독일관 야외 공간에 전시된 <칭기즈 칸의 복권>은 말 그대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라는 역사적 고속도로가 광대역 전자 고속도로로 대체되는 미래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당시 독일관은 언덕 위에 세워져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데, 이 건물 뒤편과 옆면 정원 곳곳에 서 있는 침략자와 개척자들의 로봇은 대부분 바다를 향해 놓여 있었고 백남준은 몽골텐트를 가져와 <칭기즈 칸의 복권>과 연결해 작품의 의미를 강조했다.

백남준, <칭기즈 칸의 복권>, 1993, CRT TV 모니터 1대, 철제 TV 케이스 10대, 네온관, 자전거, 잠수 헬멧, 주유기, 플라스틱관, 망토, 밧줄, 1-채널 비디오, 컬러, 무성, LD, 217×110×211cm,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시스틴 채플>은 음극선관이 캔버스를 대체한다는 백남준 선언의 선명한 방증이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상응하는 새로운 미디어 스케이프의 ‘창조’를 예견하고 있다. 프로젝터 40여 대가 거대한 비계에 설치돼 사면의 벽과 천장에 투사되는 이 작품은 네 편의 영상과 하나의 사운드가 이미지 프로세서를 통해 실시간으로 혼합되고 바뀌며 영사된다. 공간에 들어서면 전시 공간 가득 비계가 설치돼 있고(마치 미켈란젤로가 천장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설치한 것처럼), 거기에 천장과 벽 사면을 가득 채워 영사하는 프로젝터가 놓여 있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의 퍼포먼스 장면부터, 백남준의 다양한 비디오 이미지가 섞여 있는 이 비디오는 동시에 재생되면서 교차된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사운드, 이미지의 변환과 번쩍임은 관객을 완전히 다른 몰입의 상태로 만든다. 이에 대해 백남준은 설명한다. “전자 초고속도로는 광대역 통신이며, 복잡한 정보의 축약이다. 원한다면 심지어 전자 섹스electronic sex도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48대의 영사기와 500대의 텔레비전으로 만든 거대한 작품을 일부러 작은방에 설치했다. 이 공간은 디스코장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적인 실험이 될 수 있다.”***** 백남준이 1974년부터 기획하고 1993년 작품으로 표현한 전자 고속도로의 미래는 현재가 됐다. 전자망을 통한 진정한 소통을 이뤄내고, 전 지구적 이해를 통한 세계 평화를 꿈꾼,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로 생태적인 기술 발전을 꿈꿨던 백남준의 예술적 이상은 가능한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파괴와 전쟁의 현장을 시청하는 오늘은 이 미디어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에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백남준은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전쟁’을 우려하고 경계하기에 미디어를 통한 소통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예술가가 예민한 촉으로 감지하는 기술의 시대에 대한 통찰, 미디어가 던지는 메시지를 해독하고 기능하게 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독려하는, 백남준이 제시하는 예술가의 역할은 어떠한가. 단순히 예술 장르와 형식을 선도한 ‘비디오의 아버지’를 넘어 세상을 고민하는 ‘사유자’이자 ‘기술 철학자’였던 백남준을 전유하는 것은 예술을 통해 시대와 기계문명을 읽는 데 여전히 유효한 방식이다.

*         이 글의 제목은 백남준의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도록에 실린 백남준과 플로리안 마츠너의 대화 제목에서 따왔다. Nam June Paik, “A Short Tr i p on the Electronic Superhighway with Nam June Paik,” in Nam June Paik : eine DATA base : la Biennale di Venezia X LV , esposizione internazionale d’arte, 13.6.-10.10.1993, Padiglione Tedesco = German Pavilion , ed. Klaus Bussmann and Florian Matzner et al. (Ed. Cantz, Stuttgart, 1993), p. 116.
**       위의 책. p. 117.
***     백남준은 1974년 록펠러재단으로부터 기금을 받아 ‘탈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플랜(Media Planning for the Postindustrial Society)’이라는 공식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서 백남준은 뉴욕과 LA를 연결하는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를 제안하는데, 이는 다층적으로 구성된 브로드밴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에 대한 것으로 미래의 인터넷 시대를 예견했다고 일컬어지는 보고서다. 1992년 클린턴은 정책의 최우선으로 ‘정보 초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를 캐치프레이즈로 걸었고, 백남준은 이를 두고 “클린턴이 내 아이디어를 훔쳤다(Bill Clinton stole my Idea)”고 주장하며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의 부제로 삼고자 했다.
****   앞의 책, pp. 129-130.
***** 위의 책. p. 130.

이채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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